‘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얽힌 오해와 진실
상태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에 얽힌 오해와 진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1.28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깊이 읽기_ 『제러미 벤담과 현대: 공리주의 설계자가 꿈꾼 자유와 정의 그리고 행복』 (강준호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9. 12)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슬로건에 의거해 공리주의 사상을 정초한 것으로 알려진 제러미 벤담. 그는 다방면에 걸쳐 방대한 저술을 남긴 사상가다.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에서는 아직도 ‘벤담프로젝트’라는 이름하에 그의 미출판 원고들에 대한 정리 작업을 진행 중이며, 그의 사상 전반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 작업 역시 여전히 진행형이다.

저자 강준호 교수에 의하면 이러한 상황에서 국내 학계의 벤담·공리주의 논의는 벤담의 원전이 아니라 2차 문헌이나 주로 공리주의에 비판적인 학자들의 다소 편향된 해석에 의존해왔다. 게다가 일반인들의 경우에는 공리주의자들에 대해 일방적인 비판을 담고 있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와 같은 저서로 인해 벤담에 대한 왜곡된 선입견의 농도는 더욱 짙어져버렸다.

그리하여 저자는 벤담에 대한 지금까지의 비판적 논의 가운데 일부는 이른바 ‘허수아비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많은 학자가 느껴왔던 철학적·정서적 불편함은 어쩌면 벤담의 사상에 대한 다소 불충분하거나 편견에 사로잡힌 이해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 탄생한 이 책은 잘 알려지지 않은 벤담의 실체를 국내에 소개하고 벤담의 원전이나 공리주의 전문가들의 유력한 해석에 근거하지 않은 그에 대한 오해와 일방적이고 편협한 비판을 반박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그리하여 저자는 여태껏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란 짧은 카피와 제한된 정보가 전부였던 벤담의 학문적 성취와 그 진면목에 대해 적합한 평가를 내리고, 국내 학계와 독서계에 공리주의 사상에 대한 최근의 해석과 여러 논제들에 대해 포괄적인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공리주의의 설계자 벤담은 인권 사상의 배아인 자연권에 의문을 제기했고, 파놉티콘(원형감옥)을 기획했으며, 반자유주의·전체주의·집단주의·부권주의의 인큐베이터로 지목 당해왔다. 그가 꿈꿨던 인간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행복의 기준점은 무엇일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만 요약되어버리는 그의 영감과 계획은 끝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을 합리화하는 전거일 뿐일까. 이 책은 벤담과 공리주의를 공평한 이해의 공론장으로 재소환하여 분석함과 동시에 현대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객관의 공리주의·벤담론이라 할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존 스튜어트 밀과 더불어 ‘고전적 공리주의자’로 분류되어온 벤담은 고전적 공리주의나 공리주의 일반에 대한 개괄과 비판 속에 그 사상의 독창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 하지만 벤담은 실제로 여러 주요 쟁점들 ― 예컨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정부의 권한과 민주주의, 분배적 정의, 제국주의 등 ― 에 대해 밀과는 서로 판이한 입장에 서 있었다. 무엇보다 벤담은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인간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독창적인 통찰과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원전과 최신의 이차문헌들을 바탕으로 공리주의의 여러 논제들에 대한 벤담의 독창적인 입장을 ‘중립적’ 관점에서 엄밀하게 재조명하고, 이를 도덕·정치·법·경제·국제관계 등 현대 사회의 주요 쟁점들과 관련지어 그 현대적 가치와 의미를 공정하게 평가하고자 한다. 이 작업은 벤담의 사상 자체에 대한 분석과 해석을 넘어, 여러 쟁점에 대한 현대 학자들의 견해와 벤담의 인식을 비교·평가하는 작업과 동시에 진행된다.

제러미 벤담

제1장에서는 벤담의 공리주의에 토대를 제공한 선행 사상가들을 일별하고, 이러한 사상적 전통 속에서 벤담 공리주의의 독창성을 개괄한다. 제2장은 벤담의 자유 개념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해석들을 문헌적 전거를 통해 비교한다. 이를 통해 근대 계몽주의의 핵심 가치인 자유를 그가 어떻게 이해했으며, 그의 자유 개념을 당시의 관점에서든 오늘날의 관점에서든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살펴본다.

제3장은 벤담이 계몽군주에 의한 개혁으로부터 민주적 정부를 옹호하게 된 역사적·철학적 배경에 대해 살펴보고, 공리주의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옹호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이를 통해 벤담의 정치사상이 현대 국가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가늠해본다.

제4장은 벤담의 경제이론과 대표적인 고전 경제학자들의 이론 사이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고찰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경제이론에서 지향한 평등과 당시 여타 계몽주의의 후예들이 지향한 평등 사이의 관계를 밝힌다. 특히 애덤 스미스와의 비교를 통해 벤담의 경제적 자유주의의 독창성을 규명하고, 그의 경제적 자유주의가 현대 경제사상의 스펙트럼에서 어떤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공리주의는 정의나 평등을 본질적 가치가 아니라 도구적 가치로서만 인정하므로 재화와 권리의 분배 정의나 평등과는 어울릴 수 없거나 그를 포용할 수 없는 이론으로 평가되어 왔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에 들어서 정의 문제는 공리주의 일반에 대한 여러 핵심 비판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제5장에서는 이 점에 유념하면서 벤담이 정의와 평등 개념을 사용하는 특정한 맥락을 밝히고, 이 개념이 오늘날의 분배적 정의와 평등에 관한 지배적 이념과 비교하여 어떻게 평가될 수 있는지 점검한다.

제6장에서는 벤담이 법과 철학을 연결하게 된 역사적 계기와 법과 도덕을 구분하게 된 철학적 계기를 밝히고, 그를 법실증주의자로 규정하는 해석이 옳은지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이를 통해 그의 법철학의 현대적인 의미를 살펴본다. 제7장에서는 벤담의 평화론과 반제국주의의 역사적·철학적 배경을 살펴보고, 특히 제국주의에 대한 존 스튜어트 밀의 입장과 비교함으로써 공리주의를 국제관계에 적용한 결과에 대해 분석한다. 나아가 그의 평화론과 반제국주의가 오늘날 국제평화 유지에 어떤 논리를 제공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제8장에서는 쾌락과 고통에 대한 벤담의 분석을 면밀히 살펴보고, ‘행복’과 ‘웰빙’을 구분한 그의 맥락을 고찰한다. 아울러 이 개념들이 현대의 ‘행복지수’와 어떻게 다른지 규명함으로써 벤담의 행복론이 현대인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환기해본다. 마지막 제9장에서는 사익과 공익의 조화를 다룬다. 이기주의와 공리주의의 충돌 혹은 그 모순의 내용을 점검하고, 이러한 충돌·모순과 대비되는 벤담의 고유한 문제설정, 즉 사익 추구와 공익 추구 사이의 갈등에 대한 그만의 도식을 규명한다. 그리하여 양자의 추구 간 갈등의 해결, 요컨대 이익의 ‘인위적 조화’의 추구 차원에서 벤담의 ‘사적 윤리’ 혹은 ‘사적 의무론’의 역할과 성격에 대해 살펴본다. 이 마지막 논의는 벤담 당대뿐만 아니라 21세기를 사는 개인들을 향한 한 공리주의자의 조언이기도 하다.

이 책은 벤담과 그의 사상에 대한 엄밀하고 공정한 이해와 평가의 시도라는 것, 또한 무엇보다도 벤담의 다양한 관심사들 가운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쟁점이 되는 주제들을 재조명한다는 것에 큰 의의가 있다. 또한 미셸 푸코에 의해 널리 알려지게 된 벤담의 파놉티콘 기획이나 빈민법 개혁안 등이 세간의 오해와 달리 죄수들과 빈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한 것이며, 존 스튜어트 밀과는 대조적으로 제국주의 식민 지배를 비판하고 전쟁을 반대했으며, 동성애를 지지했고, 국고보조에 의한 노동계급의 임금인상을 옹호했다는 저자의 소개는 우리가 몰랐던 제러미 벤담의 개혁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상당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본 원리로 주창한 공리주의는 18세기로부터 오늘날까지 법·도덕·정치·경제를 비롯한 다방면의 학문과 실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근현대 사상사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한 때의 요란한 유행이나 열병 같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근본적 사고방식에 대한 불멸의 통찰을 담고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자유·민주주의·법과 도덕의 관계·평등과 분배적 정의 등의 고전적 테마는 물론, 인권·평화·행복·웰빙 등의 현대적 이슈들까지 차근차근 벤담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반추해낸다. 이렇게 한 공리주의의 설계자가 구상했던 인간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행복의 기준점은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를 읽어내는 데 유용한 시사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