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와 피해의 선후 역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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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와 피해의 선후 역전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21.09.12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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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_ 논설고문 칼럼

스페인과 네덜란드, 러시아와 핀란드, 영국과 아일랜드, 일본과 한국, 이 네 쌍의 나라는 모두 식민지통치의 가해자와 피해자이다. 강성한 가해자의 지배를 견디지 못하고, 미약한 피해자가 독립을 쟁취했다. 비교고찰을 하면서 우리의 경우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미약한 피해자가 강성한 가해자를 물리치는 것은 불가능하게 보이는데, 단련을 받고 분발한 힘이 커져서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 힘 덕분에 강약의 역전이 지속적으로 나타나 선진이 후진이게 하고, 후진이 선진이게 한다. 피해자의 신생 독립국은 가해자의 오랜 나라보다, 경제 발전에서 앞서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학문 발전의 새로운 길을 연다. 구체적인 양상을 하나씩 살펴보자. 

스페인은 보수주의 차등론에 사로잡혀 낙후하고, 네덜란드는 혁명을 거치지 않고도 시민사회의 순조로운 발전을 이룩했으며,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데 앞섰다. 스페인에서 이교도이고 탐욕스러운 자산가라는 이유에서 추방한 유태인들이 네덜란드로 가서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선교를 하지 않아, 세계 어디서도 경계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일체의 특권이 폐지되고, 널리 개방된 대등사회가 되어 진취적인 발전을 했다. 오늘날도 외국인이 전연 차별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살고 활동할 수 있는 나라이다. 유럽 중앙에 있는 작은 나라임을 이점으로 삼고 국가를 넘어선 유럽의 학문을 한다. 

러시아는 전체주의의 폭압을 형태를 바꾸어 계속하고, 핀란드는 패권주의를 완전히 청산한 대등사회의 좋은 본보기를 보이면서 누구나 행복하게 하고자 한다. 독립을 하자 대학에 세계 최초로 민속학과를 설립하고, 세계적인 범위에서 민속학을 연구하도록 지원한 것이 특기할 만한 업적이다. 지진아가 전연 없이 모든 학생이 창조력을 발현하게 하는 교육을 이론과 실천 양면에서 가장 잘 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교사들이 자율성을 가지고 자기 소신껏 이런 교육을 하는 것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세계 도처에서 핀란드의 교육을 본받으려고 하지만, 심성을 따르지 못해 성과가 없다.

영국은 폐쇄되고 고립된 나라이기를 고집하면서 우월감을 유지하려고 하지만, 아일랜드는 국가의 장벽을 최대한 낮추고 투자를 널리 유치해 경제발전을 가속화하고 있다. 영국이 폐쇄적일수록 아일랜드는 개방적이어서, 영국이 망하는 것만큼 아일랜드는 흥한다. 거대 다국적 기업의 유럽 총본사가 속속 아일랜드로 모여든다. 인종 차별이 없어 누구나 편안하게 살 수 있다. 아일랜드 문예부흥이 식민지통치의 모든 피해자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사실을 열거하는 경쟁에서 벗어나, 문학사를 의식 각성의 역사로 서술하는 본보기를 보인 것도 높이 평가되고 널리 영향을 끼친다. 
일본은 만세일계(萬世一系)의 신성혈통을 이어온다는 천황(天皇)을 받드는 신성국가라고 하는 데 근거를 둔 차등론을 질서의 근본으로 삼는다. 침략전쟁을 자행한 전체주의에 대해 계속 미련을 가진다. 조직의 일원이 되어 질서를 지키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유럽문명권 학문을 받아들이는 수입학에 매달린다. 한국은 차등론을 부정하는 대등론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민주화를 소중한 가치로 삼는다. 누구나 자기주장을 과감하게 펴서 역동적인 기풍을 조성하고 발전을 위한 동력이 되게 한다. 수입학을 넘어서서 창조학을 하려고 분투한다.  
가해는 가해자의 영광이고 피해자의 치욕이라고 할 것은 아니다. 가해가 영광이라고 여기는 것이 자해이다. 그 때문에 패권주의를 확대하고, 차등론의 폐해를 키운다. 보수주의에 사로잡혀 혁신의 기회를 잃는다. 가해를 당한 것이 피해자의 치욕이라고 하고 말 것도 아니다. 가해에 반발해 힘을 기른 혜택에서 더 나아가, 패권주의를 부정하고 차등론을 철폐해 대외적으로나 대내적으로나 대등론을 실현해야 한다고 깨닫는 더 큰 선물을 얻는다. 

가해와 피해의 역전으로 역사는 발전한다. 가해와 피해의 역전이 선후의 역전을 가져온다. 역사 발전의 원리로 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없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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