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재단’이라는 유령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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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재단’이라는 유령 재단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1.08.30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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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에세이]

 

친구 덕에 증권회사에 가서 계좌를 만들고 듣도 보도 못한 회사 주식을 사서 처음 수익을 본지 어언 30여 년. 그동안 수익도 보고 손해도 보고 마음도 졸여봤는데, 그래도 망하지 않고 별 손해 안 보고 취미 생활처럼 해 온 것이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취미 생활을 해도, 특히 경쟁적인 운동을 취미로 하면 마음 졸이기는 주식이나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뭐 주식 망했을 때처럼 취미 활동이 잘 안된다고 자살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바다나 산에서 놀다가 죽는 사람도 많으니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코로나 사태로 잔뜩 망했을 때는 아예 두 달간 주식 창을 보지도 않았는데, 나중에 다시 오르고 보니 엄청나게 떨어졌었더구먼. 약간 수익을 본 다음에 가만 생각하니 수익금을 다시 투자했다가는 도로 잃을 게 뻔하니 써버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마누라를 주자니 생활비 다 주는데 과잉인 것 같고, 자식들에게 주자니 자기들끼리 그런대로 살고 있는데 버릇 나쁘게 들이는 것 같고 해서, 형편 어려운 형제들에게 한두 푼 용돈으로 주었다. 나는 원래 사치를 좋아하지 않고, 체력도 약하고 귀찮아하기도 하여 해외여행 다니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술 마시고 노느라 탕진(?)할 수도 없고, 가성비 낮은 골프에도 별로 돈 쓰고 싶지 않다. 때때로 하긴 하지만 말이다. 

예전부터 어려운 사람을 돕고 싶은 불타는(!) 정의감이 있었는데, 미술 하는 어려운 사람들을 좀 돕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는 화랑 사람한테 물었더니 그림을 사 주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여 신출내기 화가의 그림 한두 점을 샀는데, 보관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내 그림이 집에 가득한데 남의 그림을 더 들이기가 난처하다. 게다가 이게 무슨 그림이냐 돈도 많다 이런 걸 사들이고 하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할 게 뻔한 마누라에게 이런저런 설명을  하기도 귀찮다. 그래서 그 그림들은 몰래 내 방 한구석에 처박아두었다.

                           어느 가난한 화가의 작업실

그래서 돈 없는 화가들이 전시하는 것을 돕기로 했다. 인스타그램에 전시 후원 광고를 올렸다. 올해 두 번에 걸쳐 두 사람에게 소정의 후원금을 주었다. 그런데 무작정 하는 것보다는 그럴듯한 이름을 거는 것이 나을 것 같아 ‘달빛재단’이라는 이름을 걸었다. 내가 달빛재단의 이사장이다. 나는 교수직을 끝내고 그럴듯한 명함을 갖고 싶었는데, 이사장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이사장 시켜줄 단체는 아무 데도 없다. 그래서 그냥 내가 이사장 하기로 했다. 이사회는 없다. 이사회 없는 초유의 이사장이다. 등록도 하지 않은 이름뿐인 유령 단체다. 

달빛이라는 이름은 인터넷 관문 사이트에서 쓰는 내 별명이다. 누가 그러길, 햇빛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어도 달빛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과연 그렇다. 그런데 달빛이라는 이름은 좀 너무 감각적인 것 같아 ’들빛‘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한다. 들에 비치는 빛. 이것도 좋지만, 어감은 역시 달빛이 더 좋지 않은가 한다.

달빛재단은 앞으로도 어려운 미술인들을 조금씩 도울까 한다. 단 내가 주식 수익을 내는 한에 있어서. 그렇다고 해서 내가 손해 볼 때 후원금을 되돌려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령이 사람을 돕기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달빛재단이 유령에서 좀비로 변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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