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의 미항, 경주 감포읍 전촌항…해안가 비경, 용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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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미항, 경주 감포읍 전촌항…해안가 비경, 용굴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25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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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혜숙의 여행이야기]_ 경주 감포읍 전촌항
전촌항. 마을은 회 타운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물양장은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옛날에 경주 시내에서 동해로 갈 때면 덕동호를 지나 구불구불 추령을 넘어 작은 마을들의 버스정류장을 헤아리며 천천히 달렸었다. 2차선의 길을 품은 토함산 북동 자락은 본 적 없는 금강산보다 멋있었다. 그러면 길 끝에서 눈앞을 가로막는 솔숲을 만났다. 거기가 바다의 시작이었다. 지금은 토함산 터널이 뚫리고 빠르고 미끈한 국도가 생겼다. 가만 생각해 보면 추령 터널이 생긴 지도 벌써 오래 되었다. 그러나 요즘도 동해로 갈 때면 습관처럼 추령으로 향하는데, 강촌 즈음에 다다르면 이상하게도 옛길을 잃고 저절로 국도에 오르게 된다. 그러면 길 끝에서 수평의 바다를 먼저 만난다. 솔숲은 바다 곁에서 터널로 열려 있다. 

전촌 솔밭. 전촌리 새마을의 31번 국도 양쪽에 펼쳐져 터널을 이룬다. 

솔숲의 터널 속을 달린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엄청난 열기는 이 터널을 뚫지 못한다. 소나무들의 육감적인 몸매 사이사이에 색색의 텐트들이 웅크리고 있다. 숲속은 인간적인 느슨함과 쾌활함으로 가득하다. 숲은 100여 년 전 경주 최씨 문중에서 조성했다고 한다. 숲 속에 최씨 선대의 오래된 묘가 있다. 나무들은 해마다 조금씩 몸집을 늘렸겠지만 솔밭은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있다. 숲 너머는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의 길이는 8백 미터 정도로 추령터널이 뚫렸던 1998년에 개장했다. 송림의 바다는 감포읍 전촌리(典村里) ‘새마을’이다. 다른 마을보다 늦게 형성되었다고 ‘새말’, ‘새마실’, ‘신동(新洞)’이라 했다 한다.  

전촌항 장전마을에서 가장먼저 보게 되는 말 조형물. 마을 뒷동산인 거마장의 상징이다.
전촌항 북방파제. 하늘의 열기와 낚시꾼들의 열기가 조용히 대결 중이다.

솔숲을 지나면 곧 전촌항 장진(長津)마을이다. 항구가 큰 편이다. 정박한 배들이 엄청 많다. 주민 대다수가 어업에 종사하는데 어업인구가 400여 명, 어선은 60여 척이라 한다. 마을은 김행남(金行南)이라는 사람이 개척했다고 한다. 그때 해안에는 긴 갈대밭뿐이라 장전이라 했다고 전한다. 더 먼 옛날에는 이곳에서 담룡(潭龍 혹은 淡龍)과 사룡(蛇龍 혹은 巳龍)이 오래 오래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 ‘장전(長戰)’이라 했다고도 한다. 마을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하늘 높이 솟은 말 조형물이다. 장진의 북쪽 감포 가까운 언덕이 마치 큰 말이 누워있는 형상이라 ‘거마장(巨馬場)’ 또는 ‘거마산(巨馬山)’이라 부른단다. 신라 시대 때는 왜군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병마(兵馬)가 주둔해 있던 곳이라 한다. 항구의 물양장은 공원이다. 크고 깨끗한 화장실과 야외공연장까지 있다. 주차된 차들은 많은데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방파제에 낚시꾼 몇몇이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미풍도 없는 뜨거움의 한가운데에, 참을성 있게, 소금산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바다가 아니라 태양에 중독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전촌항 북방파제 초입에서 북쪽 해안을 따라 산책로가 이어진다. 
산책로 계단을 오르면 전촌항의 긴 방파제와 전촌의 남쪽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뜨거운 길은 잠시, 산책로는 곧 그늘진 숲속을 오르내린다. 

전촌항 북방파제 입구에서 북쪽 해안 길을 따라가면 바닷가 언덕으로 오르는 산책로를 볼 수 있다. 입구에 경고판이 있다. 이곳은 군 작전 지역으로 일몰 이후에는 출입이 통제 된단다. 군사시설을 촬영하는 것도 금지다. 2015년에 개방되었지만 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며 민간인 출입은 잠정적으로 허용되어 있다. 언덕을 오르면 곧바로 군사시설이 나타난다. 뒤돌아보면 전촌항의 긴 방파제와 전촌의 남쪽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빨간 등대와 하얀 등대가 평화롭게 전촌항 내항을 지키고 있다. 뜨거운 길은 잠시, 산책로는 곧 그늘진 숲속을 높고 깊게 오르내린다. 이곳의 높다란 암벽에 숨겨진 굴이 있다고 한다. ‘죽공암(竹孔岩)’ 혹은 ‘대굼바우’라 하는데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들이 왜구를 피해 죽공암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의 강씨 처녀가 물을 구하러 내려왔다가 왜구들에게 발각되고 만다. 강씨 처녀는 주민들의 은신처를 끝까지 말하지 않았고 결국 왜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후 주민들은 강씨 처녀를 기려 마을의 밭에 비석을 세웠는데 언젠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곳이 아닐까 싶은 곳이 있다. 대나무가 우거져 절벽도 굴도 보이지 않지만 분명 이곳이다 싶은. 

용이 승천할 때 뚫렸다는 구멍이 있어 용굴, 구멍이 4개라 사굴 또는 사룡굴이라 한다. 
굴 앞에서는 2개의 구멍만 보인다. 구멍 속에 수평선과 해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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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제법 세다. 용들의 싸움처럼 용굴과 바다가 으르렁 댄다. 구멍 너머는 평화다.

곳곳에 초소가 있다.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단출하고 외로운 모습들이다. 나뭇가지들 사이로 바다는 내내 함께 나아간다. 저 아래에 기묘한 바위가 보인다. 검은 구멍을 가진 기암, 용굴이다. 용이 승천할 때 뚫렸다고 용굴, 구멍이 4개라 사굴 또는 사룡굴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용굴에서 담룡과 사룡이 살았다고 한다. 아주 오래 싸웠다는 둘. 같이 오래 살면 당연히 싸운다. 파도가 제법 세다. 용들의 싸움처럼 용굴과 바다가 으르렁댄다. 깊이 들어갈 수가 없다. 굴 앞에서는 2개의 구멍만 보인다. 구멍 속에 수평선이 있고, 구멍 속에 해변이 있다. 구멍 너머는 평화다. 날씨가 쾌청하고 파도가 잔잔한 날이면 바다 속 몽돌들이 투명하게 보인다고 한다. 오늘 용굴의 바다는 심해 같다. 1970년대 해안 암초로 접근해 온 간첩 6명이 용굴 속에서 지내면서 정찰을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민간인의 접근이 통제되었고 용굴을 아는 사람은 점점 사라졌다. 이제 용굴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용굴 근처에는 사자머리를 닮아 ‘사자바위’라고 불리는 바위가 있었는데 군인들이 보초를 설 때 시야를 가린다고 바위 일부를 깨버렸다고 한다. 지금은 원래의 사자바위 형상을 알아볼 수 없다. 마을 어르신들은 사자바위가 용굴보다 더 아름다웠다고 기억한다. 사라진 것은 언제나 더 아름답다. 용굴의 정수리에 정복자처럼 초소가 앉아 있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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