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공법』을 통한 19세기 서구 국제질서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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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공법』을 통한 19세기 서구 국제질서의 수용
  • 김현주(金賢珠) 원광대·중국철학
  • 승인 2021.07.18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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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만국공법』 (헨리 휘튼 지음, 윌리엄 마틴 한역, 김현주 옮김, 인간사랑, 352쪽, 2021.05)

 

19세기 중국인들은 국제질서를 어떻게 이해하였을까? 

그 단서는 『만국공법』에서 찾을 수 있다. 『만국공법』은 중국 중심적 질서가 자리 잡았던 동아시아가 서구 중심적 국제질서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 중요한 책이다. 본래 헨리 휘튼(Henry Weaton, 1785-1848)이 쓴 국제법 교과서를 중국에 와 있던 미국 선교사 윌리엄 마틴(William Alexander Parons Martin, 1827-1916)이 한자로 번역한 것으로,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 전 지역의 국제법 교과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만국공법』이 번역되기 이전에 중국인들은 외교업무를 ‘이무(夷務)’, 즉 오랑캐 관련 사무라고 불렀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 국가들 또한 중국 주변 국가들과 별반 다를 바 없게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 중국보다 하위의 국가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으로 서양 국가들의 침략을 받은 이후 ‘이무’는 ‘양무(洋務)’, 즉 서양 관련 사무로 달리 부르게 되었고, 중국은 오히려 그들 국가보다 하위에 위치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서양 국가들과의 교류와 마찰이 빈번해졌고, 그들 국가들이 국제법을 내세워 이익을 챙기는 상황에서 중국도 국제법을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제법 지식이 전무한 중국 관리들을 상대하기 어려웠던 미국 외교관의 제안으로 번역이 시작되었다. 번역자인 마틴의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다고는 하지만, 전적으로 마틴 혼자 번역한 것은 아니었고, 『만국공법』은 번역과정에서 중국인 관리들의 도움을 받고 윤색되어 중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다듬어졌다. 그 결과 중국인들에게 국제질서는 공적이며 도덕적인 질서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세계가 ‘천하’라는 하나의 범주에 속하고, 그 중심에 중국이 위치했던 중국적 질서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는 사실이 과거에도 겪은 적이 있었던 낯설지 않은 기억으로 포장되었다. 그리하여 약육강식의 피비린내 나는 국제현실을 그들은 춘추전국시대, 즉 예악이 붕괴된 혼란한 시기로 이해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여러 나라들이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듯이, 중국이 이제는 세계 여러 나라들 중의 하나가 되어 다른 나라들과 패권을 다투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적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여겨졌다. 그런 생각이 『만국공법』 번역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렇게 도덕적 개념과 인식이 반영된 『만국공법』은 서구 국제질서와 중화 국제질서를 화해시키려는 시도이면서, 동시에 비도덕적 현실과 도덕적 이상을 일치시키기 위한 외침이었다.

『만국공법』이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19세기 당시 중국인들이 느꼈을 위기의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는 전복적 변혁의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그들과 같은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 전통과 현실, 동양과 서양이라는 굴레 속에서 아직도 그 조화를 위해 싸우고 있는 것 또한 같다.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만국공법』은 서양과 동양의 인식의 차이를 깨닫고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만국공법』을 통해 서양의 국제법과 국제질서를 처음 접한 동아시아인들은 서로 너무나 다르다고 느꼈던 법과 질서에서 ‘같음’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동서양의 교집합적 도덕이다. 도덕의 모든 내용이 같지는 않겠지만, 인의와 정리 등 도덕적 감성이 일치한다는 점을 느낀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법을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이 모든 나라가 공유할 수 있는 ‘법’으로 존재하고, 그 성격은 동아시아인들도 수용할 수 있는 도덕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서양의 국제법과 국제질서를 수용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고 본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는 교통 및 통신 수단의 발달로 하루면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닐 수 있고, 그곳의 문화를 직접 볼 수 있고, 그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며, 심지어는 직접 가지 않더라도 온라인으로 언제, 어디서나 소통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가 아직은 많이 부족하고, 서로에 대해 반목하고 있는 것도 여전하다. 『만국공법』이 동아시아의 호랑이 중국이 자신을 내려놓고 세계 속에 여러 나라들  중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중국인은 물론 동아시아인들에게 각인시켰고, 세계 속의 평등과 민주 의식을 고취시켰던 것처럼, 이제 세계 어느 나라, 어느 사람이나 자신을 내려놓고 세계 속의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21세기 세계가 모두 마주친 위기를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만국공법’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다. 


김현주(金賢珠) 원광대·중국철학

현재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HK+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고, 동 대학 동아시아학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중국청화대학교 철학과에서 중국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발표한 논문으로는 「헌정의 ‘중국성(Chineseness)’이 갖는 이데올로기적 성격」(2018), 「중화질서의 해체와 그에 대한 청 정부의 대응」(2019), 「만국공법에 대한 청말 지식인의 인식과 현실과의 괴리」(2020) 등다수가 있다. 저서로는 『춘추전국시대의 고민: 양주·묵자·법가의 제안』(2021)이 있으며, 역서로는 천밍밍의 『중국의 당국가체제는 어디로 가는가: 혁명과 현대화의 경계』(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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