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수호조규부터 강제병합까지 47개의 조약으로 보는 근대외교의 침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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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수호조규부터 강제병합까지 47개의 조약으로 보는 근대외교의 침략성
  • 이경미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 승인 2021.07.1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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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서 스케치]

■ 한일 조약 자료집(1876~1910) - 근대외교로 포장된 침략 | 동북아역사재단 엮음 | 이경미 외 6명 지음 | 동북아역사재단 | 750쪽

 

2020년은 일본이 대한제국에 ‘병합’ 조약을 강제한 지 110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동북아역사재단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을 통한 조선의 개항에서부터 1910년 일본의 한국 강제 ‘병합’과 식민지화에 이르기까지 한일 간에 맺은 조약(협정, 협약 등)을 망라한 자료집을 펴냈다. 메이지유신 이래 서구 근대외교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침략 과정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자료집의 구성

『한일 조약 자료집(1876~1910) - 근대외교로 포장된 침략』에는 47개의 조약이 수록되어 있으며, 각 조약마다 원문·번역문·해제를 작성했다. 원문은 한국 측 조약문(한문·국한문)을 기준으로 전문을 입력했고, 번역문은 원문의 내용을 현대 한국어로 풀어썼다. 그리고 조약 원본을 소장한 기관과 해당 조약문의 이미지를 제시했다. 해제는 한국근대사 및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집필진(현명철, 조국, 박한민, 한철호, 김종학, 최덕수-해제순)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다. 해제의 순서는 개요를 제시하고, 조약의 배경과 체결 과정을 서술한 다음, 조약문의 내용을 조관별로 분석했으며, 조약의 역사적 의의를 밝혔다. 아울러 해제 내용과 관련하여 추가 참고 자료를 관련 문서로 제시했다.

수록된 조약들은 체결되었던 시간의 흐름보다 조약이 갖는 속성을 중시하여 분야별로 배치했다. 특히 본 자료집에서는 운요호사건,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러일전쟁 등 정치적 사건과 관련된 조약들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대상을 경제·사회 분야로까지 넓혀 6개의 분야 -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관한 조약(Ⅱ), 조계(거류지)에 관한 조약(Ⅲ), 통상·어업·금융에 관한 조약(Ⅳ), 교통·전신·운수에 관한 조약(Ⅴ), 경찰·사법에 관한 조약(Ⅵ), 국권 침탈에 관한 기본조약(Ⅶ) - 를 설정했다.

 

조일수호조규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조선의 국제적 지위에 관한 조약

조일수호조규는 메이지 정부가 들어서면서 어긋난 한일 간의 외교 관계가 근대적 양식으로 재정립된 것을 의미했다. 그것은 군함과 무력시위라는 침략 행위를 동반했던 동시에 그것 자체가 근대 국제법적 틀을 가지고 체결된 조약이었다. 이에 따라 260여 년의 역사를 가진 한일 간의 국교는 근대식으로 갱신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일수호조규 부록에 대해서도 기유약조를 대신하는 성격을 더욱 엄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여기에는 침략과 근대가 뒤섞인 한국근대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조약들이 포함되어 있다.

조계(거류지)에 관한 조약

조계 관련 조약은 근대적 관계 수립에 따라 전통적 관계가 변용되는 속에서 이루어졌으나, 식민지배에 이르는 침략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일본은 서구와 맺은 불평등조약의 내용을 조선에 적용(한행리정-일본인이 개항장 바깥으로 나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설정한 거리)하기도 했고, 일본의 조계 장악을 둘러싸고 열강과 조율(인천항 매립지) 혹은 갈등(마산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권 확장 행위는 곧 국권 침탈 행위(청진)로 이어져, 식민 지배로 귀결되었다.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통상·어업·금융에 관한 조약

통상·어업·금융에 관한 조약은 무역이나 어업과 같은 특정 분야가 아니라 경제활동 전반에 걸쳐 일본이 조선과의 관계를 어떻게 재편하려 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일통상장정 및 속약의 체결 과정을 통해 일본이 조청·조러 관계를 의식하면서 자국에 유리한 조항들을 마련한 시도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러일전쟁과 통감부 설치 이후에는 일본 어민들의 조업 지역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장해 나가려 시도했는데, 어업에 관한 협정의 체결 과정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판을 개편하고 침투하려는 시도는 대부금 대여와 한국은행 설립과 같은 금융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통·전신·운수에 관한 조약

교통·전신·운수에 관한 조약은 조선 사회에 근대적 변화를 초래한 인프라 건설과 유입의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은 침탈의 역사이기도 했다. 임오군란의 경험은 한국에서 일어나는 변란에 빠르게 대응할 통신 수단 구축의 필요성을 실감하게 했고, 일본이 전선을 장악하는 내용(대항쟁리 불허-타국과 타 회사의 해저선 설치를 인정하지 않음)이 포함된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의 체결로 이어졌다. 또한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의 통신기관에 관한 모든 권리(토지와 건축물까지)를 일본에 위탁하는 협정이 맺어졌다. 이처럼 청이나 러시아와의 경쟁 속에서 한국의 이권을 독점하여 국권을 침탈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던 것이다.

경찰·사법에 관한 조약

사법권 및 경찰권 분야에서도 침탈 과정은 이어졌다. 1909년 한국 사법 및 감옥 사무에 관한 각서가 맺어진 당시 이미 한국의 사법계는 일본인 판검사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열강에 허용한 영사재판권을 철폐하기 위해 맺어진 것이 이 각서였다. 즉 보호국화에서 식민화로 대한 정책의 축이 전환된 지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1907~1909년 사이에 맺어진 경찰권 관련 협정·각서를 통해 일제 강점기 헌병경찰제도가 마련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강제병합조약 출처: 서울대학교

국권 침탈에 관한 기본조약

러일전쟁으로 가속화된 국권 침탈 시기는 한일 간 과거 청산 문제의 출발점이자 양국의 인식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지점이다. 이 시기 조약들의 특징은 위임, 비준, 조인 등 근대적 조약으로서 갖춰야 할 형식조차 충족하지 못했던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한일의정서와 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에서는 위임과 비준, 을사늑약에서는 위임·조인·비준 모두, 그리고 강제병합조약에서는 절차의 결여뿐만 아니라 순종이 비준을 거부했던 사실까지 있었다. 형식적 절차가 생략된 배경에는 한국 측의 완강한 반대가 예상되었기 때문이며, 병합조약에서 비준이 강제된 사실은 앞서 생략된 경위가 역작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본 자료집에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일본 측이 조약의 강제성과 불법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지적했다.

필자: 이경미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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