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수갑, 두 손이 아닌 한 손을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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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수갑, 두 손이 아닌 한 손을 채웠다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01.19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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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②_ 조선시대의 수갑


드라마 <옥중화> 포스터

2016년에 MBC 창사 55주년 특별기획 드라마로 제작된 <옥중화>는 조선 명종 때 감옥에서 태어나 자란 한 천재 소녀 옥녀가 억울한 백성을 위해 활약하며, 조선판 변호사 외지부(外知部)가 되는 이야기를 담은 사극이다.


사극에서 한 번도 주요 공간으로 설정된 적이 없는 서울의 대표적 감옥 전옥서(典獄署)를 배경으로 한 것도 독특하며, 연출자가 한류 드라마 붐에 일조한 <대장금>을 만든 이병훈 감독이라는 것도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드라마는 그 시대 역사의 간접적인 교육 측면이 있어서 사극 할 때 고증이 중요하다”(티브이데일리, 2016년 4월 27일 자)라는 <옥중화> 감독의 언론 인터뷰 기사에도 불구하고 사극이 당대 시대상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사극 제작자와 작가들의 열정과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증에 충실한 정통 사극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관련 사료가 부족하거나 학계 연구가 아직 미진한 분야, 특히 당대 일상생활 모습을 재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 드라마 '옥중화' 포스터. 수갑에 대한 고증이 잘못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수갑은 사진 속 인물이 차고 있는 것과 달랐다.
▲ 드라마 '옥중화' 포스터. 수갑에 대한 고증이 잘못되었는데, 조선시대의 수갑은 사진 속 인물이 차고 있는 것과 달랐다.

오늘은 거창한 사극 담론이 아닌 고증이 잘못된 <옥중화>의 한 장면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싶다. 사진에서 보듯이 <옥중화> 포스터 중에는 수갑을 찬 죄수의 모습이 등장한다. 지금처럼 두 손을 채운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조선시대의 수갑은 이와 전혀 달랐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조선에서 사용한 수갑은 두 손이 아닌 한 손을 채웠다.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명과 조선의 수갑 모양의 차이

그럼 조선의 수갑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이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중국 명, 청 시대에 사용했던 수갑과 족쇄부터 알아본다. 여러 종류의 형구 모습이 나오는 백과사전 『삼재도회(三才圖會)』를 보면 명나라에서는 수갑을 마른 나무로 만들었고, 네모 모양으로 두 손을 포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를 수추(手紐:手杻)라 했다. 또 쇠로 만든 두 발에 채우는 형구도 있었는데 이를 각료(脚?)라 불렀다. 『삼국지』에서 조맹덕이 길평을 고문하는 장면을 담은 판화에 보면 누워있는 길평의 왼쪽에 그의 손발에서 벗겨낸 수추와 각료가 보이는데, 『삼재도회』에 나오는 모양과 일치한다. 이상을 고려할 때 <옥중화> 포스터는 명나라의 발목을 채우는 형구 각료를 조선의 수갑으로 잘못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 『삼재도회』에 나오는 명나라의 형구. 오른쪽 상단에 명나라에서 사용한 수갑 ‘수추’가 보이고, 그 왼쪽 바로에 발목에 채우는 형구 ‘각료’가 있다
▲ 『삼재도회』에 나오는 명나라의 형구. 오른쪽 상단에 명나라에서 사용한 수갑 ‘수추’가 보이고, 그 왼쪽 바로에 발목에 채우는 형구 ‘각료’가 있다
▲ 명나라 수갑 ‘수추’
▲ 명나라 수갑 ‘수추’
▲ 명나라에서 사용한 발목을 채우는 ‘각료’
▲ 명나라에서 사용한 발목을 채우는 ‘각료’
▲ 『삼국지』에서 조맹덕이 길평을 고문하는 장면. 누워있는 길평의 왼쪽에 손에 채우는 수추와 발에 채우는 각료가 보인다.
▲ 『삼국지』에서 조맹덕이 길평을 고문하는 장면. 누워있는 길평의 왼쪽에 손에 채우는 수추와 발에 채우는 각료가 보인다.

중국 명나라와는 달리 조선에서 사용한 수갑은 한 손을 채웠는데, 조선 정조 때 만든 형구 규격 등을 보여주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이라는 책자에 등장하는 ‘杻’가 그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杻’는 싸리나무와 수갑 등을 뜻한다. 음은 ‘뉴’, ‘추’, ‘축’ 등 다양하였으므로 수갑을 뜻할 때 어떻게 발음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필자는 『네 죄를 고하여라』(2011년, 산처럼 출판사)라는 책에서 ‘뉴’라 읽을 것을 제안한 바 있지만, 여기서는 당초의 견해를 수정하여 기존 판본의 오류를 많이 바로잡은 것으로 평가받는 동경대 중앙도서관 소장 『훈몽자회(訓蒙字會)』의 내용을 근거로 ‘추’로 고쳐 읽고자 한다. 한편, 다산 정약용이 쓴 『아언각비(雅言覺非)』에서 보듯이 당대에도 ‘杻’의 발음에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던 듯하다. 정약용은 책에서 ‘杻’는 싸리나무라 할 때 ‘뉴’라 읽고 수갑 등 형구를 의미할 때는 ‘축’이라고 읽어야 하지만 사람들이 혼동해서 거꾸로 읽는다고 비판하였다. 즉 수갑 ‘杻’의 올바른 음은 ‘축’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후일 국어학자의 확실한 해석을 기다리기로 하고, 그 전까지는 잠정적으로 ‘추’라고 읽기로 한다.

▲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린 형구. 가운데에 있는 추(杻)가 조선에서 사용한 수갑이다.
▲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린 형구. 가운데에 있는 추(杻)가 조선에서 사용한 수갑이다.
▲ 동경대 중앙도서관 소장 『훈몽자회(訓蒙字會)』. 오른쪽 맨 하단에 ‘杻’가 있다. 이보다 앞선 판본인 예산문고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두드레(手械) ‘류’라 한 것을 바로잡아 ‘츄’라 기재된 것을 볼 수 있다. ‘류’, ‘츄’는 지금 식으로 ‘뉴’, ‘추’로 읽을 수 있다.
▲ 동경대 중앙도서관 소장 『훈몽자회(訓蒙字會)』. 오른쪽 맨 하단에 ‘杻’가 있다. 이보다 앞선 판본인 예산문고본 『훈몽자회(訓蒙字會)』에 두드레(手械) ‘류’라 한 것을 바로잡아 ‘츄’라 기재된 것을 볼 수 있다. ‘류’, ‘츄’는 지금 식으로 ‘뉴’, ‘추’로 읽을 수 있다.

수갑, 어떻게 사용했나?

추(杻), 즉 조선의 수갑은 길이가 약 50센티미터이고, 두께는 3센티미터 남짓 되었는데, 지금의 금속 수갑과 달리 마른 나무로 만들었다. 그럼 수갑은 어떻게 채웠을까? 사실  『흠휼전칙(欽恤典則)』에 나오는 모양만 가지고는 도저히 사용 방법을 알기 어려운데, 다행히 고종 때 만들어진 법전 『육전조례(六典條例)』에 힌트가 나온다. 이에 따르면 죄수의 목에 씌우는 칼 - 한자로는 ‘가(枷)’라고 쓴다 - 위에 오른손을 올린 후 거기에 수갑을 대고 못을 막아 고정하도록 했다. 필자는 조선말기 사진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죄수들을 찍은 사진 속 수갑 찬 죄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당 사진에 따르면 앞 줄 칼을 찬 죄수들 중에 유독 가운데 있는 죄수의 오른손이 칼 위에 고정되어 있다. 오른손에 수갑을 채운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 조선말기 죄수들의 모습. 앞줄의 칼 찬 죄수들 중의 가운데 사람은 오른손에 수갑을 함께 차고 있다.
▲ 조선말기 죄수들의 모습. 앞줄의 칼 찬 죄수들 중의 가운데 사람은 오른손에 수갑을 함께 차고 있다.

물론 감옥에 수감된 모든 죄수들에게 수갑을 채운 것은 아니다. 『경국대전』에는 죄수들이 지은 죄의 등급에 따라 채우는 형구를 구별하였는데, 먼저 사형수의 경우 목에는 칼, 손에는 수갑, 발목에서는 쇠사슬을 채우도록 했다. 탈옥은 꿈에도 생각 못 하게 한 것이다. 다음으로 사형만큼은 아니고 노역형이나 유배형에 처할 죄수들의 경우는 칼과 함께 수갑을 채우되 발목에 채우는 쇠사슬은 면해주었다. 이보다 더 가벼운 죄를 범해서 수감된 죄수는 수갑도 빼고 목에 칼만 채우도록 했다. 이로 볼 때 조선전기에는 노역형 이상의 죄인은 수갑을 차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정조 때 『흠휼전칙』에서는 사형죄를 범한 평민이나 천민 남자들만 수갑을 채우도록 했다 조선후기로 가면서 수갑 채우는 일을 더 엄격히 제한했던 셈이다.

수갑 사용의 다양한 사례

앞서 본 것처럼 수갑을 채우는 대상을 법규로 엄격히 제한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왕명에 따라, 혹은 지방 관리들이 편의에 따라 규정이 무시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효종 때 일본 나가사키로 가던 도중 일행과 함께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선원이었던 하멜(Hendrik Hamel)이 남긴 『하멜표류기』를 보면 표류한 이듬해인 1654년(효종 5) 5월 초에 탈출을 감행하다 체포된 동료들이 제주목사에게 끌려가던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들은 그들의 몸에 두꺼운 널빤지 모양의 칼을 씌우고 쇠사슬로 단단히 묶었고, 한 손에는 칼에 연결된 수갑을 채웠다는 것이다. 외국인에게도 수갑을 채운 것이다.

▲ 전라도 강진의 하멜기념관 속 패널. 칼과 수갑 등이 정확히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록으로 수갑 찬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 전라도 강진의 하멜기념관 속 패널. 칼과 수갑 등이 정확히 그려져 있지는 않지만, 기록으로 수갑 찬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영조 때에는 오른손만 채우는 나무 수갑인 추를 간혹 두 손 모두 채워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영조 초반인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을 때 이에 가담한 죄수들을 잡아 신문하기 위한 국청(鞫廳)을 설치했는데, 이때 규정과 다르게 죄수들의 양손에 수갑을 채워 손을 전혀 쓰지 못하도록 했고 이것이 관례가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상당한 가혹행위라 할 수 있는데, 이듬해 보고를 들은 영조가 원래대로 오른손만 채우도록 바로잡았다.
 
한편 정조 때에는 평, 천민 사형수에게만 채우도록 한 수갑을 관리에게 채우기도 했는데, 1795년(정조 19) 8월 국왕 정조는 관내 백성 수십 명을 곤장 등으로 마구 매질해서 죽게 한 창원부사 이여절(李汝節)을 잡아다 칼과 수갑을 모두 채워서 가두도록 지시한 것이 그 한 예이다.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있지만 조선시대에 사용된 수갑의 모양과 쓰임새 등이 보다 분명해졌다. <옥중화>에서와 달리 조만간 사극에서 한 손만 수갑 찬 제대로 된 조선시대 죄수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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