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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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
  •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1.05.3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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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명의 생활 에세이]

내가 교수가 된 시절은 민주화 투쟁이 가열차고 민주화가 된 뒤에도 군부 타도 구호가 하늘 높던 시절이었다. 최루탄 가스에 눈물을 흘리고 학생들과 이런저런 충돌이 잦던 시절이었다. 한쪽에서는 민중 사회를 부르짖고 다른 한쪽에서는 빨갱이 척결을 부르짖었다. 지식인, 교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처음부터 어느 한쪽에 가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가담할 인맥이 어느 쪽에도 없기도 했다. 생각이 진보와 보수와 또 진보를 시기적으로 넘나들면서 변하기도 했다. 지금은 아마도 중도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분야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것은 어느 쪽도 나와 생각이 같지 않아서이기도 했거니와 어느 한 진영의 생각을 앵무새처럼 되뇌는 게 내 성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위하여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리라 다짐 비슷하게 했다. 30대 초반에 그런 생각을 했으니 돌이켜보면 스스로 대견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대견할 뿐이었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으니 아무런 기를 펴지 못하고 출셋길도 열리지 않았다. 33년 동안 한림대학교에서 봉직한 걸 두고 한 직장을 지키는 게 대단하다고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 사람아 안 옮긴 게 아니라 못 옮긴 걸 자네도 알지 않는가?

운동권이 주장하던 민중 사회도 보수층이 지지하던 자유 빙자 반공 사회도 내게는 못마땅했다. 그래서 아무 데도 끼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안에서 불거지는 끼는 어쩌지 못해 내 나름대로 한글문화연대도 만들고 한국적 정치학도 부르짖고 그랬다. 내 나름대로의 생각을 내 주도하에 실천하는 것이 성정에 가장 맞아서 그렇겠지. 

그런데 요즘 보니 나와 잘 맞는 사회 가치가 기세를 올리고 있다. 바로 ‘공정’의 가치다. 나는 예전부터 팔이 안으로 굽는 보통 한국인들보다 더 객관적이고 냉정하다고 스스로 느끼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도 별로 안 좋아하고 ‘믿습니다!’도 별로 안 좋아한다. 오죽하면 내가 뽑은 학교 후배인 교수가 왜 그렇게 냉정하냐고 투정한 적도 있었을까? 냉정하긴 뭘, 대학 후배라고 별스럽게 대우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대했을 뿐인데. 

어느 날 대학 부속병원에서 정기 건강검진을 하는데 다른 후배 교수가 마지막 의사 문진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여기 교수인데 수업 때문에 일찍 가야 합니다’ 하면서 새치기를 하는 것이었다. 초짜 교수가 말이다. 이것 봐라? 내가 생각지도 못한 행동이었다. 내게는 줄 서서(앉아서) 기다리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나도 따라 했다는 게 함정이긴 하다. 

요새 젊은 층이 분노하는 것은 이런 조그만 일들이 일상에 번져서 큰 불공정과 비리로 확대되기 때문이다. 민중 사회가 되든 부자 세상이 되든 그건 또 다른 문제지만, 그 속의 절차와 과정은 공정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의 요체가 바로 이 공정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종류의 사회로 가든 그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도 공정해야 하고 그 사회의 인간관계와 사회 활동 모두가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 가치가 그동안 너무 무시되어 왔고, 그래서 청년들이 분노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어느 한 진영에 속하지 않은 것도 진영 논리나 가치보다는 절차와 과정의 공정성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얼마 전까지는 그 사실을 잘 몰랐다. 나는 왜 아무 데도 끼지 못할까 하는 의구심만을 가져왔는데 요즘 젊은이들이 내게 답을 주었다. 내게 진영이 있다면 그건 바로 공정의 진영이다. 이걸로 단체를 또 하나 만들어볼까? 물론 농담이다.    

그런데 내가 한 진영에 끼지 못한 것은 내가 졸자 노릇을 싫어하고 대장 노릇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큰 데 끼지 못하고 작은 거 만들어 대장 노릇 하고, 그랬던 것이다. 윗사람을 잘 못 모셔서 20대에 잠깐 몸담았던 연구소에서는 거의 쫓겨나기 직전에 유학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별로 안 좋은 추억이다. 지금 동네 테니스장에서도 할배들보다는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더 좋아한다. 그들이 싫어하거나 말거나...

내 젊음이 다 사라진 이제야 내게 맞는 사회적 가치가 득세를 하다니, 아무래도 나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 같다.      


김영명 한림대학교 명예교수·정치학

서울대학교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뉴욕주립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림대학교 정치행정학과 명예교수로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객원연구원, 한글문화연대 대표 등을 지냈으며, 한국정치학회 학술상, 외솔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 『담론에서 실천으로: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 『단일 사회 한국: 그 빛과 그림자』, 『이게 도무지 뭣하자는 소린지 모르겠고: 한국 불교, 이것이 문제다』, 『대한민국 정치사』, 『한국 정치의 성격』, 『정치란 무엇인가: 김영명 교수가 들려주는 정치 이야기』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수필집 『봄날은 간다』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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