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스킨 VS 프루스트 … 책의 주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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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스킨 VS 프루스트 … 책의 주인은 누구인가?
  •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 승인 2021.04.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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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르타스]

러스킨은 비평가이자 사상가로서의 그의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는 듯싶다.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 종류나 독자들의 반응에 비추어보아도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라는 평가에 걸맞지 않은 대접을 받고 있다. 프랑스 문학 전공자나 애호가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글을 통해 그의 미술 비평과 독서론을 처음 접하는 경우가 많다. 프루스트의 경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세상에 내놓기 전에 러스킨의 미술비평과 독서론을 통해 자신의 머릿속에 ‘특별한 심리적 행위를 재창조함으로써’ 문학적 토대를 쌓을 수 있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민음사)는 존 러스킨과 마르셀 프루스트를 한자리에서 만나게 해주고, 더구나 책읽기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두 대가의 책과 저자에 대한 입장을 비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없이 흥미로운 구성을 보여준다.

러스킨의 독서론은 「참깨: 왕들의 보물」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첫 번째 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글은 1864년 도서관 건립 기금 조성을 위한 강연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독서 행위와 책의 가치, 올바른 독서법 등을 다룬 글은 아무래도 대중 강연이어서 그런지 교육적이고 계몽적인 어조를 벗어나기 어렵다. 러스킨에 따르면 ‘책은 말이 아니라 글이고 정보전달이 목적이 아닌 계속 읽힐 목적으로 쓰인 글’이다. 말하자면 ‘전달이 아닌 보존할 만한 목소리’,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 ‘내면의 진실한 기록’을 적은 일종의 비문(碑文)이다. 또한 책은 대체로 현자들 혹은 위대한 사람들이 가치 있는 것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독자들은 선택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책과 독서에 관한 일반적인 입장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좌) 존 러스킨, (우) 마르셀 프루스트

아마도 프루스트를 발끈하게 만든 것은 러스킨의 책을 대하는 독자의 자세에 관한 주장일 것이다. 즉 독자는 책을 통해 가르침을 얻고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려는 진실한 마음가짐을 가지되 글에서 자신의 생각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구나 책을 읽으면서 ‘내 생각하고 똑 같잖아’ 하는 식의 공감은 독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릇 독서란 독자가 자신의 뜻을 발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뜻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줄곧 추억에 잠기고, 독서를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 속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삼는 프루스트로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책읽기 방식이다. 프루스트는 러스킨을 알게 된 이후 그의 글과 사상에 열광하여 그의 행적을 따라가며 여행을 하고 『참깨와 백합』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기까지 했지만 적어도 책읽기에 있어서만큼은 자신의 독서경험에서 나온 입장을 고수하기로 한다.

프루스트의 「독서에 관하여」는 그가 직접 번역한 러스킨의 저서의 역자 서문이다. 서문치고는 지나치게 장황하고 방대하여 번역서의 관례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독서에 관한 그의 생각과 어린 시절의 기억, 상상력의 근원 등을 알게 해주고 나아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배태한 글을 발견한 듯한 기쁨을 독자에게 주기도 한다. 프루스트는 실제 역자 서문을 쓰기 전에 자신의 어린 시절의 독서경험을 말하면서 ‘책읽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미리 내놓음으로써 러스킨의 독서론의 한계를 효과적으로 지적할 수 있게 된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독서는 혼자 있는 상태에서 지적 능력을 발휘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성적 작업을 해낼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책은 작가에게는 ‘결론’이지만 독자에게는 ‘도발’이고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지점이 독자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독서 혹은 작가의 역할은 우리를 정신적 삶의 문턱까지 인도해주는 것임을 분명히 한다.

여기에서 러스킨과 프루스트의 독서론 중 어느 것이 독자에게 더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책읽기 방법인지 굳이 물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러스킨의 독서론은 독서의 일반적인 중요성과 양서의 가치, 현자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로서의 책읽기를 말하고 있다. 반면에 프루스트는 어린 시절의 독서체험의 소중함과 창조적 독서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책에 대해 말하기 위한 두 사람의 출발점 자체가 처음부터 달랐다. 중요한 것은 책은 저자와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완성된다는 것이다. 소설가 미셸 투르니에가 『흡혈귀의 비상』에서 말했듯이 책은 독자의 참여와 의미부여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아무도 의미를 묻지 않은 책은 연주되지 않은 악보와 같다는 생각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을 것이다.


박아르마 서평위원/건양대·프랑스 문학

건양대학교 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서울대 대학원에서 프랑스 현대문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양대 휴머니티칼리지 브리꼴레르 학부 학부장과 박범신 문학콘텐츠 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지은 책으로 『글쓰기란 무엇인가』, 『투르니에 소설의 사실과 신화』가 있고, 번역한 책으로 『살로메』, 『춤추는 휠체어』, 『까미유의 동물 블로그』, 『축구화를 신은 소크라테스』, 『칸트 교수의 정신없는 하루-칸트 편』, 『데카르트의 사악한 정령-데카르트 편』, 『녹색 광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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