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을 이기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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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욕을 이기는 법
  •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 승인 2021.04.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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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칼럼]_ 대학직설

“민주화 투쟁했다는 사람들, 극도의 위선자”라고 한 유력한 야당 정치인은 낙인했다. 아마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공언한 정권에서 높은 지위를 얻고 대도시의 요지에 주택을 보유하고 (또는 임대료를 받고) 여러 방편을 동원하여 자녀의 대학 진학을 도모한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일 것이다. 

물론 사실과는 거리가 먼 낙인이다. 우선, 민주화 투쟁한 사람들 가운데 이런 범주에 들어갈 사람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내가 아는 한, 민주화 투쟁한 대다수 사람들은 “명예도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보통 사람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다. 목숨을 잃은 사람도 적지 않고 그 투쟁에서 얻은 (훈장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제도적, 구조적 상흔으로 고통받는 사람도 많이 있다. 게다가 이 정권의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민주화 투쟁했다는 사람들’은, 내가 아는 한, 소수이다. 그럼에도 ‘민주화 투쟁했다는 사람들’을 싸잡아서 모욕하고 조롱하는 것이 환호받는 세상이 되었다.

더욱 참담한 일은, 이런 모욕과 조롱의 주체가 민주화 투쟁을 필요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갖가지 편법과 탈법으로 권력과 부를 누리고 지위를 세습하는 질서와 제도를 만들고 구사해온 것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다. 어느 유력한 야당 정치인은 전셋값을 23.3% 인상했지만 "시세대로 가격 받은 것 자체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며 "임대료를 5% 이상 올려선 안 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9%를 인상한 표리부동이 비판받아야 한다"고 당당하게 표적을 구부렸다. 적나라한 탐욕이 소심한 탐욕을 훈계하는 세상이 되었다. 당장, 야당 후보가 시장으로 당선되자 재건축 대상 아파트값이 들썩인다. 

그렇지만 부동산 가격 폭등이 한두 해 만에 일어난 일이냐고 억울해할 일이 아니다. 그런 세상을 다시 불러낸 것은 “민주화 투쟁했다는 사람들”이다. 성추행에 약속 번복이라니. 탈법과 편법의 본보기로 부족함이 없다. “정의와 공정을 훼손한 者들을 응징했다”고 폭발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울어진 언론을 탓할 일도 아니다. 원래 그랬다. 민주화가 완성되었다고 잠시 착각한 사람도 있겠지만, 실제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미국에서는 60년 전에 군인 출신 대통령이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설파했지만, 한국에서는 자본-정당-관료-언론-학자의 동맹이 민주주의를 저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당에는 지금의 ‘여당’도 포함된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시장권력과 관료권력과 언론권력은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그래서 민주화 투쟁은 과거완료형(으로 만들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민주화 투쟁했다는 사람들”에게는 사방이 낭떠러지이고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것을 몰랐다면 모자란 것이고 알면서도 경계하지 않았다면 무모한 것이다. “민주화 투쟁했다는 사람들”의 실패는 민주주의의 후퇴이다. 제발 뱀처럼 지혜롭기를 부탁한다.


이기홍 논설위원/강원대·사회학

강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강원대 교수회 회장, 한국사회학회 편집위원장을 역임했다. 주 연구 주제는 사회과학철학, 사회과학방법론, 그리고 사회이론이다. 저서로 『사회과학의 철학적 기초: 비판적 실재론의 접근』, 역서로 『맑스의 방법론』, 『경제, 시민사회 그리고 국가』,『과학으로서의 사회이론』, 『새로운 사회과학철학』, 『지구환경과 사회이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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