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철학적 인간학…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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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철학적 인간학…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 조창오 부산대·철학
  • 승인 2021.03.28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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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가 말하다_ 『트랜스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 (야니나 로 지음, 조창오 옮김, 부산대학교출판문화원, 269쪽, 2021.02)

현시대 인문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개념이라면 ‘포스트휴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마치 90년대 초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인기를 끌었던 것과 유사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이후의 사조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 이후의 사조를 가리키는가? 그렇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포스트’는 단순히 시간적인 선후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어떠한 경우의 수가 있을까? 휴머니즘 이후의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발전적으로 확장한 것이거나 휴머니즘에 반대하는 반휴머니즘일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휴머니즘에 단순히 반대하는 게 아니라 이를 초월하는 것일 수 있다. 

여기서 휴머니즘을 발전적으로 확장한 관점이 바로 ‘트랜스휴머니즘’과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이다. 휴머니즘은 인간이 스스로 자기 노력을 통해 향상시켜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 생물학적으로 인간일 수 있지만, 인간다운 인간은 아니다. 그래서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교육을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고 발전시켜야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휴머니즘은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진정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자’를 자신의 모토로 삼는다.

‘트랜스휴머니즘’에서 ‘트랜스’라는 표현은 첫째로 ‘어떤 것을 초월한다’는 뜻을 가진다. 초창기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이 이런 의미를 선호했다. 그래서 트랜스휴머니즘은 자연적인 인간을 초월하려는 ‘진화적 인본주의’를 의미했다. 그런데 자연적 진화는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가능하고 효율적인 인위적 진화는 기술을 통한 인간 향상이다. 그래서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적 수단을 이용해 자연적 인간을 점점 더 업그레이드해서 ‘완벽한 인간’으로 나아가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예를 들어 비타민을 매일 먹어 신체적 능력을 향상시키거나, 또는 특정 약물을 통해 정신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도 한 예고, 칩을 신체에 삽입하거나 또는 냉동 보관을 통해 미래 기술을 이용하여 불멸을 획득하려는 노력도 해당 예라 할 수 있다. 

물론 휴머니즘과는 큰 차이가 있다. 휴머니즘은 ‘교육’이란 과정을 통해 인간을 인간다운 인간으로 이끌려 한다. 여기서 ‘인간다운 인간’은 정신적 능력과 신체적 능력을 향상시킨 인간, ‘자율성’을 가진 윤리적이고 건강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목표로 설정한 ‘완벽한 인간’은 모든 점에서 뛰어난 인간이다. 하지만 ‘모든 점에서 뛰어난’이란 게 과연 어떤 의미인지는 애매하다. 휴머니즘은 단순히 뛰어난 인간이 아니라 ‘자율성’을 갖춘 인간을 목표로 한다. 그런데 트랜스휴머니즘은 자율성을 가지고 자기 계발하는 인간이 아니라 철저히 기술에 의존하여 자신을 향상시킨 인간을 목표로 한다. 즉 이때의 인간은 자율성을 상실하고, 기계에 철저히 의탁해 있는 인간이다.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트랜스휴머니즘보다 훨씬 더 과격하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의 육체를 강조하고, 육체를 기술적으로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능력을 향상시키려 한다. 이에 반해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육체를 인간의 감옥으로 여기고 인간이 육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하드웨어로 옮겨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화 <트렌센덴스>에서 주인공은 육체적 허약함 때문에 육체 대신 슈퍼컴퓨터로 마음을 복사하여 계속 생존해간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마음 업로딩’이다. 여기서 전제하고 있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단순히 ‘마음’, 그것도 복사할 수 있는 데이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데이터에 불과하고 더 좋은 하드웨어로 복사할 수 있다면, 나는 불멸하게 되며, 더 좋은 하드웨어의 도움으로 더 뛰어난 존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특이점’을 강조하면서 강한 인공지능이 등장하게 되면, 이 존재야말로 인간보다 뛰어난 인간이자, 진정한 인간이라고 여기며, 이 존재를 통해 육체를 지닌 인간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단순히 기계에 의한 인간 지배가 아니라 더 뛰어난 지성적 존재에 의한 인간 지배다. 

원서 & 야니나 로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에서 말하는 ‘포스트휴먼’은 이처럼 인간의 육체에서 벗어난 지성적 존재다.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스트들은 ‘트랜스휴먼’이 단순히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포스트휴먼’으로 오기 위한 과도기적 존재라고 규정한다. 이것이 바로 ‘트랜스휴먼’의 두 번째 의미이다. ‘트랜스’는 ‘어디에서 어디로’를 뜻한다. 즉 ‘어떤 출발점에서 목적지로 가는 도중’이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트랜스휴먼’은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이 말하는 ‘포스트휴먼’으로 가는 과도기적 존재를 의미한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을 계승하기보다는 이를 극복하려 한다. 휴머니즘은 항상 인간과 동물, 지성과 감성, 남성과 여성 등 이분법적인 틀을 통해 한쪽을 깎아내림으로써 다른 한쪽을 드높였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인간다움’의 강조다. 인간다움은 ‘동물다움’의 반대이며, ‘동물다움’은 감성적 존재, 여성적 존재와 연관되는 데 반해, 인간은 지성적 존재이며, 남성적 존재다. 휴머니즘의 기본적인 논리는 이 이분법적인 틀 위에서 이루어진다. 반인본주의는 인본주의의 반대로서 이 이분법적인 틀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인간보다 ‘동물’을, 남성보다 ‘여성’을 더 우월하게 여긴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인본주의와 반인본주의가 공동으로 전제하는 ‘이분법적인 틀’ 자체를 비판하며, 이를 극복하자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간과 동물을 서로 구별하기보다는 인간과 동물의 ‘관계’ 자체를 중시하고, 양자를 이 관계의 대등한 관계 항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세 입장 모두 ‘포스트휴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 의미는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 의미가 다르다. 트랜스휴머니즘은 기술적으로 향상된 육체를 가진 인간을 ‘포스트휴먼’이라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이는 ‘향상된 인간’인 ‘트랜스휴먼’이라 할 수 있고, 기술적 포스트휴머니즘은 육체를 벗어난 순수 지성으로서의 인간을 목표로 설정한다는 점에서 ‘포스트휴먼’, 즉 인간을 극복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은 휴머니즘의 틀 자체를 극복한 인간을 ‘포스트휴먼’이라 부른다. 


조창오 부산대·철학

연세대학교 국문과와 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로이파나 대학교에서 『현대의 멜랑콜리적 구성. 헤겔의 현대비극 개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울산대 철학과 객원교수, 부산외대 만오교양대학, 남부대 교양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부산대 철학과 교수로 있으며 연구 중점은 미학, 사회철학, 기술철학 등이다. 저서 『예술의 종말과 현대예술』 외에 다수의 논문이 있으며 번역서로는 『박물관 이론 입문』, 『늙어감에 대하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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