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적으로 평등하고 자율적인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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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적으로 평등하고 자율적인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위하여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3.21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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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체들의 민주주의 | 레비 R. 브라이언트 지음 | 김효진 옮김 | 갈무리 | 432쪽

『존재의 지도』의 전편에 해당하는 시론으로서 기후위기의 시대에 적절하게도 포스트휴머니즘적인 실재론적 존재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현대의 체계 이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론을 교직함으로써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 사이의 인위적인 간극을 용해하고 객체들의 동등한 ‘실체성’을 단언하는 ‘평평한’ 존재론을 체계적으로 제시한다.

칸트 이래로 철학은, 마음과 세계 사이의 관계, 그리고 객체에 대한 인간의 접근과 관련된 인식론적 물음들에 사로잡혔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이런 전통과 단절하고 다시 한번 제일 철학으로서의 존재론에 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저자는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지향 존재론뿐만 아니라 로이 바스카, 질 들뢰즈, 니클라스 루만, 아리스토텔레스, 자크 라캉, 브뤼노 라투르, 그리고 발달 체계 이론가들에게 의지함으로써 자칭 ‘존재자론’(onticology)이라는 실재론적 존재론을 전개한다. 이 존재론은 존재가 온전히 객체들과 특성들,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주체 자체가 객체의 한 변양태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체계 이론가들과 사이버네틱스 이론가들의 작업에 의존함으로써 객체가 조작적 폐쇄성이라는 조건 아래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역동적 체계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해서 저자는 물질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을 둘 다 제대로 다루는 실재론적 존재론 안에 반실재론자들의 가장 핵심적인 발견 결과를 통합할 수 있게 된다. 존재자론은, 서로 다른 규모에서 온갖 종류의 객체가 다른 객체들로 환원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등하고, 객체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상호작용들의 바깥에 영원한 본질 같은 초월적 존재자가 전혀 없는 평평한 존재론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책은 “그 정치적 제목에도 불구하고, 객체들의 존재론에 관한 책”이지만, 이 책 곳곳에서 존재자론에 기반을 둔 정치 및 사회 이론과 윤리학을 구축할 실마리들이 시사된다. 이 책이 신기술의 증식과 기후변화로 특징지어지는 이 시대에 “사물들이 우리의 삶과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사태를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개념적 자원”을 제공하는 동시에 “한국에서 객체지향 존재론과 그 수용을 둘러싸고서 새롭고 생산적인 논의가 생성되”는 데에도 기여하기를 저자는 기대한다. 또한, 이 책에서 저자는 로이 바스카, 슬라보예 지젝, 질 들뢰즈, 니클라스 루만, 알랭 바디우, 자크 라캉 등의 관련 작업에 대한 엄밀하고 흥미로운 논평도 제시한다.

브라이언트가 제시하는 객체지향 존재론으로서의 ‘존재자론’이 옹호하는 ‘평평한 존재론’의 네 가지 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객체는 물러서 있다는 논제인데, 그리하여 현전 혹은 현실태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되는 객체는 전혀 없기에 모든 객체는 환원 불가능한 독자적인 실체성의 여지를 언제나 갖추고 있다. 둘째, ‘유일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논제인데, 말하자면 모든 객체의 ‘단일한 조화로운 통일체’는 없으며 다양한 관계를 이루는 다수의 회집체가 있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렇게 해서 평평한 존재론은 전체론을 배제하게 된다. 셋째, 객체들 사이의 어떤 종류의 관계도 여타 종류의 관계보다 특권적이지 않다는 논제인데, 여기서 브라이언트가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인간/세계 혹은 주체/객체가 어떤 의미에서도 근본적이지 않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이자 넷째로, 모든 규모에서 온갖 종류의 객체는 그 존재론적 지위가 동등하다는 논제인데, 그리하여 어떤 존재자(혹은 어떤 종류의 존재자)도 여타 존재자의 근원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저자의 존재자론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모든 객체가 동등하”기에 존재자들 사이에 어떤 주어진 위계도 허용하지 않는 존재론적 평등주의로서 ‘객체들의 민주주의’를 구성한다. 평평한 존재론이라는 틀을 통해서 저자는 “사회적·정치적·문화적 이론 및 철학 안에서 인간적이고 주관적이며 문화적인 것들에 대한 강박적인 집중을 줄이”고 “비인간 행위자들에 대한 더 올바른 이해를 계발하”는 활동을 고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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