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꾸앙과 함께 라면을 먹으며 바투 칸을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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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꾸앙과 함께 라면을 먹으며 바투 칸을 떠올리다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3.15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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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푸는 역사 기행(45)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45)_ 다꾸앙과 함께 라면을 먹으며 바투 칸을 떠올리다.

 

모든 이름에는 의미가 있고 나름의 유래가 있다.

짜장면을 먹을 때 우리는 양파와 단무지를 곁들인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단무지를 '다꽝'(다꾸앙)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명인 다쿠앙에서 유래된 말이다.

다쿠앙소호(澤庵宗彭) 스님(좌), 도쿠가와 이에미츠(우)
한국식 초절임 단무지(좌), 일본식 쌀겨절임 다쿠앙(우)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쇼군이다."라는 말을 한 것으로도 유명한 일본 에도막부 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德川家光)가 토카이지(東海寺)를 방문했다. 승려 다쿠앙 소호(1573~1645년)는 쇼군이 매일 산해진미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담백한 것이 입에 맞을 것이라 생각하여 다쿠와에즈케라는 무절임을 대접했다. 쌀겨와 소금에 절인 무절임인 다쿠와에즈케를 먹은 이에미츠가 맛있다면서 이 무절임을 선사의 이름을 따서 다쿠앙즈케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막강한 힘을 발휘하던 시절 고려 조정에서는 왕실이나 귀족 집안의 여식을 뽑아 황도 북경으로 보내야 했다. 채홍사(採紅使)가 원나라에 바칠 마땅한 처녀를 물색하는 일을 담당했다. 

한때 동명의 인기 드라마에서 승냥이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기황후(奇皇后, 1315~1369년)도 大元에 바쳐지는 고려의 공녀 중 한 명이었다가 원나라 황제 혜종(몽골식 이름은 토곤 테무르 카안)의 세 번째 제1카툰(황후)이 되었다.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역할이 컸다. 나중에는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임명한 뒤 박불화를 비롯한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인 출신 관리 및 일부 몽골 관료들을 포진시켜 자기 신변의 안전을 지키는 친위대로 삼았다. 

환관 박불화(朴不花)의 이름 불화는 황소를 뜻하는 몽골어 부카(buqa)의 한자어다. 이렇듯 몽골족은 동물을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칭기즈칸의 아명은 테무진으로 알려져 있다. 서양학자들은 테무진을 대장장이라는 뜻으로 풀이한다. 하지만 나의 견해는 다르다. 테무는 낙타를 뜻하고 몽골어 이름에서 ‘-진’이나 ‘-게’는 인칭어미이다. 

과거 몽골의 관직명도 동물 이름을 사용했다. 허니치는 典羊之官이라해서 양의 관리 책임자, 모리치는 典馬者라 하여 말의 관리 책임자, 테무치는 典駝者라 하여 낙타를 관리하는 책임자를 가리켰다.  

몽골 북부의 흡수골 호수를 가기 위해 모른이라는 지역에서 대학생 뭉크자르갈을 동행 가이드로 삼았던 적이 있다. 겨울철 혹한으로 시달려 여대생 손등이 마치 거북이 등껍질 같았던 기억이 난다. 자르갈은 여자 이름으로 많이 쓰이고, 뭉크 또는 몽케는 칭기즈칸의 손자 이름으로 ‘영원’이라는 뜻이다. 두 말의 합성어인 뭉크자르갈이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는 영원한 행복이다. 

유럽 정복에 나선 몽골군이 오스트리아 입성을 앞두고 돌연 본향인 몽골 초원으로 퇴각 명령을 내린 것은 칭기즈칸의 3남인 오고타이 칸(우구데이 칸)의 죽음 때문이다. 1241년 몽골군은 헝가리 폴란드 전역에서 승리를 거둔다. 여세를 몰아 오스트리아 빈까지 진격 포위하나 오고타이칸이 갑자기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쿠릴타이 소집의 건으로 유럽에 진출한 몽골군이 하루아침에 철수해 돌아간다. 쿠릴타이는 몽골의 정책결정 최고기관이다.

쿠릴타이는 칸의 명으로 널리 소집되는 왕공(王公) 및 유력 부족의 수장, 중신으로 구성된 유목 국가의 최고 정치 회의였다. 칸이 사망하면 다음 칸을 선출하기 위해 쿠릴타이가 소집되었다. 쿠릴타이는 새로운 칸 선출뿐 만 아니라 법 제정, 군사적 행동에 대한 논의 등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 논의하는 정치 회의였다.

훌륭한 칸이라는 뜻의 별명인 사인 칸으로 알려진 바투 칸은 칭기즈칸 가문의 장로로서 제국의 대칸을 둘러싼 권력 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대칸 옹립자'로도 알려져 있다. 1227년 칭기즈칸이 사망한 뒤, 혈통 문제가 불거져 바투와 칭기즈칸의 다른 손자들 간의 알력다툼이 생겼다. 

바투 칸(좌), 킵차크 칸국(금장한국) 황제 보좌에 오른 13세기 바투 칸(우)

우구데이 칸은 주치의 혈통 문제를 거론하며 바투를 모욕한 자신의 아들들을 책망했지만, 사촌들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1237년 킵차크 칸국을 건설하고 몽골 본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끊어버린다. 1241년에 우구데이 칸이 죽자 대칸의 자리를 두고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육과 바투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다. 1246년, 구육은 바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쿠릴타이를 소집하여 대칸에 올랐다. 분쟁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바투는 단호함, 강함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바트자르갈은 확실한 행복, 바트바야르는 강력한 기쁨을 희망하는 이름들이다. 바트 에르데네는 단단한 보석처럼 살고 싶다는 기원이 담겨있다. 

바투는 칭기즈칸의 맏아들 조치(또는 주치)의 아들이었다. 그는 몽골제국 금장한국의 칸이었다. 지배영역이 러시아, 볼가 불가리아, 쿠마니아, 코카서스 일대였다. 그는 삼촌들이 모두 사망한 뒤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다들 그를 장형, 큰형님이라는 뜻의 아가(agha)라고 불렀다. 그런 그가 1255년 죽었다. 모두들 그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 모였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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