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본연의 과학적 정신을, 과학자는 공정한 지적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상태바
“과학은 본연의 과학적 정신을, 과학자는 공정한 지적 자유를 회복해야 한다.”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1.03.14 2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과학이란 무엇인가: 진리를 찾아 나선 인류의 지적 모험에 건네는 러셀의 나침반 | 버트런드 러셀 지음 | 장석봉 옮김 | 사회평론 | 272쪽

이 책은 러셀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고전으로 과학의 발전으로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던 기존 세계관이 어떻게 무너져왔는지를 되짚어, 과학을 매개로 한 진리 탐구가 인류의 삶에 얼마나 많은 자유와 풍요를 선사했는지 찬미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진리가 또 다른 독선으로 둔갑할 위험에 대한 경고도 잊지 않는다. 세상 모든 도그마에 반대하면서도 끊임없이 진리란 무엇인가에 천착했던 러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러셀은 이 책에서, 과학이 맹신에 질문을 던지고 독단과의 갈등을 자처하며, 지난 4세기 동안 돌파해온 주목할 만한 국면들을 펼쳐 보인다. 중세 과학에 대해 이야기하는 첫 장은 먼저 종교가 어떻게 물리학자들에게, 이어서 생물학자들에게 패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하면서 출발한다. 코페르니쿠스 논쟁, 즉 태양계의 중심이 지구인가 태양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과학과 종교 사이 최초의 갈등이었다. 케플러, 갈릴레오, 뉴턴 등 과학자들은 새로운 우주관을 내놓을 때마다, 기존 권위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탄압을 감내해야 했다. 세계가 절대자에 의해 단번에 창조된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발전되어 왔다는 인식은, 우리가 살아온 지구를 탐색하는 지질학과 생명의 탄생을 추적하는 생물학 그리고 그 토대 위에서 꽃핀 진화론으로 확장되면서 편견을 하나씩 깨부숴왔다.

의학이 발전할수록 갈등은 정치적인 영역으로 확장된다. 여성은 〈창세기〉에 쓰인 한 문장, 즉 “너는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고 신이 이브에게 한 말 때문에 한때 출산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해 마취제를 쓰는 일을 금지 당했다. 또한 전염병을 저지할 예방접종은 죄를 지었으면 천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이 “신의 심판을 좌절시키려 시도”한다는 이유로 반대에 부딪쳤다. 낙태는 신학계에서 제기하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여전히 진화론 못지않은 뜨거운 감자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영혼과 영혼 불멸, 그리고 자유와 결정론에 대한 논의다. 영혼이라기보다는 이제 마음이라고 불릴 만한 모든 정신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과학 법칙들에 예외 없이 지배 받는 우리 인간은 맹목적인 운명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인가? 육체와 마음의 관계 그리고 자유의지에 대한 전통적인 담론들부터 러셀의 신중한 의견까지 폭넓게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주가 존재하는 데 어떤 궁극적 의미가 있는가를 묻는 장은 지금 읽어도 현재진행형으로 느껴질 만큼 타당하다. “전능한 힘과 그것을 실험할 수 있는 수백만 년의 시간을 허락받는다면, 나는 내 모든 노력의 최종 결과물로서 인간을 그렇게 큰 자랑거리로 여기지는 않을 것 같다”라는 러셀의 냉소는 우리 인류에게 여전히 뼈아프다.

이 의문은 과학과 윤리를 다룬 마지막 장과 연결되어, 과학은 과연 ‘가치’에 대해 그 어떤 것도 주장할 수 없는가 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철학자답게 ‘양심’ ‘선과 악’ ‘욕구와 행복’ ‘죄와 미덕’ 등 철학과 도덕의 문제를 깊이 있게 파고든다. 비록 과학이 온전히 답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더라도, 과학적 전망의 확장이 지금까지 인간의 행복에 기여해왔다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보는 러셀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러셀은 과학적 정신, 즉 자기가 모든 진리를 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검증을 거친 지식조차 전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태도를 높이 샀다. 그가 이 책을 쓰던 당시는 기존 권위에 도전했던 과학이 400년 투쟁사를 지나 사실상 승리를 거머쥔 시대라 할 법했다.

하지만 그는 과학의 탈을 쓰고 뒤따라 등장한 독선과 아집을 간파하고 경고했다. 과학기술이 전쟁 무기의 파괴력을 높이고 정부나 대기업과 담합하여 오히려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신중하고 잠정적이고 점진적인 과학적 정신보다 과학기술이 더 중요한 영향력을 미치는 사태에 대한 우려였다.

낙관과 비관의 전망이 교차하는 현실은 러셀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의 마무리를 장식한 그의 말이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의 단초인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진리는 때로는 불편하다. 권력을 쥔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야말로 잔인함과 편협함으로 물든 기나긴 역사 속에서 지적이고 총명하면서도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 없는 우리 인류가 일궈낸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