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은 당위가 아니다…평등은 존재가 아니라 당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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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은 당위가 아니다…평등은 존재가 아니라 당위이다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1.03.0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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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불평등 기원론 | 장 자크 루소 지음 | 박아르마 옮김 | 세창출판사 | 195쪽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고, 자연법은 불평등을 허용하는가?” 지금 보아도 쉽게 답할 수 없고, 우리 사회, 우리 인간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듯한 이 질문은 1753년 디종 아카데미가 제기한 질문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넘은 담대한 질문은, 철학자 루소를 깨우기에 충분한 질문이었다.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가 그처럼 담대한 질문을 제기한 이상, 자신 역시도 그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여겼다. 루소와 같은 철학자에게 그것은 일종의 의무와도 같은 것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구상하면서 원시 시대의 이미지를 찾아 숲속을 거닐었다. 인간이 문명의 발전과 사물의 진보에 따라 본성이 왜곡되고 불행에 빠져들기 이전에 살았던 자연 상태의 이미지를 발견하기 위해 생제르맹에서 일주일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숲속에서의 산책에서 루소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에 대한 성찰을 떠올려 냈다. 그는 그에 대한 논문,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과 근거에 관한 논문」을 제출했지만, 과거 일등상을 수상했던 『학문 예술론』과는 달리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후에 이 논문에 서문과 헌정사를 붙여 출판해 내니,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었다.

루소는 이 책에서 어떻게 불평등을 벗어날 것인가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소의 성찰이 미완성된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루소에게 있어 상당히 불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애초에 디종 아카데미가 제기한 질문 자체가 불평등의 해소법은 묻지 않았던 것이다. 루소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을 나름대로 성찰하였고, 자연법이 불평등을 허용하는가에 대해서도 나름의 견해를 내놓았다.

그 견해가 우리 시대에 비추어 마땅한지 그렇지 않은지, 또 아직도 남아 있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는 우리가 답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루소는 인간들 사이에는 두 가지 종류의 불평등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자연적 불평등과 정치적 불평등이다. 자연적 불평등이야 설명할 것조차 없다. 우리는 모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떠받들지만, 최근의 과학은 공부도 재능(DNA)이고, 심지어 노력조차 일정 정도는 재능(DNA)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과연 우리는 진정 “평등하게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루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자연적 불평등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더욱이 정치적 불평등과 자연적 불평등의 관계에 대해서도 루소는 침묵을 택한다. 즉 루소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을 논하며, 자연적 불평등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정치적 불평등만을 논한 것이다. 그렇다면 루소는 왜 그렇게 했을까? 그는 자연적 불평등이 아니라, 정치적 불평등이 현재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장 자크 루소

루소가 볼 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던 인간들에게 있어, 자연적 불평등은 별문제가 아니었다. 자유롭고 독립적인 인간은 오로지 모든 것을 자신에 비추어 바라봤기 때문에, 남이 힘이 세건, 아니건 그러한 여타의 사실은 그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즉 자연적 불평등은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했다. 그런데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면서 상황은 변하게 됐다. 인간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게 된 인간에게는 질투와 소유욕이 등장했다. 그리고 남보다 더 낫고 싶다는 이 감정은 인간들 사이에 불평등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인간들 사이 불평등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보자. “자연법은 불평등을 허용하는가?”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루소는 이미 이에 대해 답한 바 있다. 자연에는 분명 불평등이 있다. 그러나 자연법이 불평등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 사이 (자연적) 불평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와 ‘타인의 시선’이기 때문이다. 루소에 따르면 이러한 근거로 인해 “불평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없었”던 것이다.

인간의 근원적 모습을 고찰하려고 했던 루소의 시도는 현대에는 조금 틀린 것으로 보일지 모른다. 인류학적·역사학적 연구는 과거의 인류가 루소적 인간보다는 홉스적 인간에 가깝다고 말하고 있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은 존재하나, 자연 상태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 상태를 벗어나 사회를 만들면서 비로소 정치적 불평등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자연적 불평등은 존재하나 우리가 사회 속에서 그것으로 사람들 사이를 가르기 전에는 불평등이 아니다. 정치적 불평등은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가 창조한 불평등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이며, 자연법이 아니라 사회가 그것을 허용해 온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들 사이 불평등은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결코 아니며, 이처럼 우리의 모든 자연적인 성향을 변하게 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오직 사회의 정신과 그것이 낳은 불평등”이다. 그렇다고 해서 루소는 본원적인 상태인 자연으로 돌아가자고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말을 그렇게만 해석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루소는 이러한 질문에 답해 주지 않으며,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답해야 할 문제다. 그의 말을 정리해 보자. 자연적이건 정치적이건 ‘불평등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가 만든 것이지 인간의 본원적 상태가 아니므로, ‘당위가 아니다.’ 이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런 결론이 나올 것이다. 평등은 존재가 아니라 당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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