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에게 편지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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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에게 편지를 권한다
  • 이은정 한신대·국문학
  • 승인 2021.03.07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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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에게 듣는다

■ 저자에게 듣는다_ 『편지, 발신과 수신의 문학』 (이은정 지음, 커뮤니케이션북스, 125쪽, 2021.01)

우편함에 꽂힌 편지에 설렜던 기억들이 있다. 소식과 사연을 담은 편지 대신 광고지와 고지서가 우편함에 쌓이더니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져가고 있다.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워도 글로는 무엇이든 쓸 수 있었던 시절, 오로지 종이 위에 쓰고 지우길 반복하며 편지를 쓰고 읽는 일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고 친밀한 상상적 대화였다. 한두 줄 쓰고 생각이 깊어지다가 편지를 받는 사람 입장에서 다시 읽으며 고쳐 쓰고, 이런 과정을 몇 번이고 거듭하게 했던 힘은 편지의 낭만적 위력이자 타자에게 가닿으려는 적극적인 노력이었다. 편지의 이러한 본질은 문학과 닮았고 인문학에도 닿아 있다.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과 교감을 절실히 희구한다는 점에서 문학과 인문학은 거대한 편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편지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늘 흥미롭다. 중세 유럽에는 편지를 통해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소하고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편지쓰기 안내서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몸짓이나 말로는 다 전할 수 없었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한 ‘편지의 탄생’은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선하고 획기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종이가 귀해서 편지지 어느 위치에 어떤 크기의 글씨로 이름을 서명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드러냈던 한 시기를 거쳐, 근대적 우편제도가 시작된 이후 편지는 평등하고 일상적인 문화 양식이 되었다. 용건을 전하는 기능보다 인간의 마음과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편지가 인정받았을 때 편지체 문학 또한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편지체 혹은 서간체라는 말은 언뜻 고색창연하게 다가온다. 흥성했던 편지가 쇠하면서 편지체라는 말이 낡은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세상의 편지들이 본연의 아우라를 잃고 사라져가는 이 시대에도 문학은 변함없이 강력하게 편지를 불러온다. 평범하고 일상적인 듯해도 매번 특별하고 신성한 것이 편지이듯, 낡은 듯해도 가장 귀한 것을 끝없이 갱신해내는 것이 문학이듯, 편지체 문학은 편지만이 지닐 수 있는 육성의 언어로 가치 있는 의미들을 생생하게 환기한다. 

문학작품에 편지가 등장하는 예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어떤 편지는 소품이나 매개물이 아니라 결정적인 인물처럼 등장해 사건을 전개하고 상황을 전복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며 줄리엣의 거짓 죽음을 전하는 편지가 로미오에게 제때 전달되지 못해 조바심을 냈던 청소년기의 기억도 또렷하다. 편지 때문에 등장인물의 운명이 달라지기도 하고 일을 그르치기도 하며 숙원이 성사되기도 한다. 편지체 문학은 작품에 편지가 등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한 편의 작품을 편지들로 구성한다. 

편지만으로 이루어진 편지체 문학은 일견 평면적인 듯해도 은근히 복합적인 구성의 산물이다. 편지가 지닌 여러 물성(物性)은 작품의 다양한 요소가 되어 풍부하게 변주되거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상정해야 하고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 또한 필요하다. 편지체는 작품의 서술방식을 넘어서 구조이자 장치이며 사건이다. 오로지 편지로 플롯을 전개하고 사건의 필연성과 등장인물의 행동을 표현해야 한다. 수신자에게 전달되지 못한 편지, 필생의 인연으로 이어지는 우연한 답장, 유폐된 공간과 격절의 시간을 잇는 편지, 분실되거나 뒤바뀐 편지, 죽음을 불사하고 남겨진 편지 등은 편지체 소설에서 생사의 드라마를 펼친다. 고전적 러브레터와 비장한 유서편지는 물론, 물리적 시공간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디지털편지와 타임슬립편지까지, 편지체 소설은 편지가 지닌 한계들을 가붓하게 넘는 역동적 상상으로 인간의 목소리와 체온을 담는 작품을 구현한다. 

이 책 『편지, 발신과 수신의 문학』에서는 10개의 아이템으로 22편의 편지체 소설을 살펴보았다. 10개의 아이템은 연애편지, 우정편지, 다성적 편지, 답장과 회답, 옥중편지, 유서편지, 위장편지, 디지털편지, 타임슬립편지, 미봉인편지이며, 22편의 편지체 작품은 170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문학과 외국문학, 장편과 단편, 고전명작과 대중문학 등을 교차하여 선정했다. 

다채로운 편지체 소설들을 10개의 아이템으로 나누어 서술하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연애편지이면서 유서편지인 소설도 있고, 사랑과 우정의 궤적이 뚜렷하지만 답신과 회답의 양상이 더 중요한 작품도 있다. 더 중요한 특징이 부각되는 아이템으로 분류하되 작품의 고유함을 놓치지 않고 서술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다룬 첫 작품은 편지체 소설의 명불허전으로 알려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며, 마지막 작품은 정치철학자 앙드레 고르스의 『D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 사이에 스무 편의 편지체 작품을 배열하면서 아이템의 전개와 더불어 작품의 내용과 결이 지니는 박자와 선율의 흐름에도 주목했다. 여러 번 읽은 작품이든 새로 읽은 작품이든 편지체라는 점에 강세를 두어 읽으면 새로운 각도에서 다시 읽게 될 뿐 아니라 인간의 욕망과 고통을 대화적으로 상상하게 되어 더 뜨겁게 실감하면서 읽게 된다.  

『편지, 발신과 수신의 문학』은 B6 사이즈의 작고 얇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작품 속 편지들은 수천 통에 이른다. 편지체가 품은 육성의 문장들은 삶을 향한 태도와 온도, 밀도까지 그대로 담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목소리를 그대로 담은 문장들은 무상했던 일상을 다시 바라보게 하고 무연했던 삶에 의미를 비추면서 나 자신을 넘어 다른 이의 삶에 교감하고 접속하게 한다. 작품을 되풀이해 읽으면서 사랑이 지닌 치명적인 용기와 불안에 대해, 우정을 완벽하게 새로 경험하게 된 순간을 향해, 인간의 천박하거나 기품 있는 불가해한 욕망들에 대해, 죽음을 각오하고 행동하는 결연한 몸짓들에 대해, 끝내는 너와 나를 일으켜 세우는 그 힘을 향해, 매번 전율했다. 

책에 실린 22편의 작품 중 먼저 읽을 두어 작품을 권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존 버거의 『A가 X에게』는 첫손에 꼽는 작품이다. 주인공 아이다(A)가 정치범으로 투옥된 연인 사비에르(X)에게 쓴 옥중편지로 이루어졌는데, 아이다의 의연하고 주체적인 모습, 사소함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통렬하고도 에로틱한 문장들을 눈여겨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다른 한 권은 마리아마 바의 『이토록 긴 편지』이다. 여성의 삶을 옭아맨 억압과 폭력의 교차성을 하나씩 끊어내면서 두 친구가 함께 단단한 발걸음을 내디뎌가는 성장을 담은 이 우정편지도 권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시적 정의( Poetic Justice)』를 비롯한 여러 책에서 공감적 상상력을 갖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문학작품을 읽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문학을 통해서만이 타인의 삶을 살아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있으며, 그들의 운명과 나의 운명을 함께 생각하게 하는 서사적 상상력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긴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편지체 작품들은 문학이 지향하는 바로 이 지점을 선명한 육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 줄의 문장을 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아는 우리에게 한 통의 편지가 갖는 무게는 대단히 묵직하다. 편지체 소설은 마치 섀도복싱처럼 발신자와 수신자의 존재를 상상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마침내 우리는 서로에게 가닿으려는 상상적 소통을 갈망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은정 한신대·국문학

한신대학교 평화교양대학 교수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인문고전과 현대문학, 한국문학과 외국문학, 정통문학과 대중문학, 단편과 장편, 시와 소설 등을 엮어서 함께 읽는 ‘A Beautiful Mix’의 읽기와 쓰기 수업을 지향한다. 저서로는 『김수영 혹은 시적 양심』(2006), 『현대시학의 두 구도』(1999), 공저로 『고전멘토』(2015), 『나를 쓴다: 꽃띠들을 위한 자전적 글쓰기』(2014), 『한국어문학 여성주제어사전』(2013), 『명작의 풍경』(2010), 『공감: 시로 읽는 삶의 풍경』(2007), 『명작 속에 숨어 있는 논술』(200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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