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를 지배한 노예 정권, 맘루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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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를 지배한 노예 정권, 맘루크 왕조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2.2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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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42)_ 노예 이야기 2: 이집트를 지배한 노예 정권, 맘루크 왕조

개인이든 집단이든 인간은 틈만 나면 싸웠다. 무슨 이유에서든 싸워왔다. 때문에 어느 면에서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세상 어느 곳에선가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전쟁의 결과는 대재앙이다. 인명의 살상과 문명의 파괴 등 엄청난 참극이 벌어진다. 과거의 전쟁에서 승자는 패배한 상대를 무참하게 학살하거나 포로로 잡아갔다. 전리품으로서의 포로들은 대부분 또 다른 전쟁을 위한 군대에 편성되거나 노예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은 먼저 페르시아 제국의 붕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슬람 팽창 시기 페르시아는 사산조(224~651년)의 통치하에 있었다. 637년 오늘날의 이라크 영역인 카디시야에서 벌어진 전투와 642년의 이란 서부 고대도시 니하반드에서 벌어진 전투, 이어진 헤라트 전투에서의 패배로 사산조 페르시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사산조 페르시아 정규군을 격파한 아랍군은 페르시아 제국 동부 영토인 호라산과 시스탄 방면으로 진출한다. 페르시아를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된 이들의 원정 목적은 약탈적 성격이 강했다. 656년에 시작된 내란을 극복하고 우마이야왕조(661~750년)를 개창한 우마이야 가문의 무아위야는 665년 총신(寵臣) 지야드를 바스라(Basra) 총독에 임명하여 그에게 부하라 일대를 포함하는 호라산 지역 통치를 위임한다. 

 (좌) 무슬림에 의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의 정복을 그린 카디시야 전투도 일부, (우) 이슬람 세계의 형성과 확대

지야드의 아들 우베이둘라는 부하라 침공 직후 이라크 총독에 임명되었는데, 바스라로 귀환할 때 ‘부하라의 射手’ 2,000명을 데리고 가서 자신의 호위대로 삼았다. 이들은 대개 포로로 잡힌 돌궐 유목민 병사들로 후일 압바스 왕조에서 맘루크(mamluq, ‘재산’, ‘소유노예’라는 뜻)의 기원이 되었다. 맘루크는 칼리프 직속의 노예 출신 군인을 말한다. 우베이둘라의 후손들도 한결같이 이런 관행을 따랐다. 

이슬람제국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민족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다. 인종과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형제 무슬림으로 평등하게 대한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만 탄생한 독특한 왕조가 있는데 다름 아닌 노예왕조다. 노예왕조는 노예가 왕이 되어 왕조를 세운 것을 말한다. 이슬람제국의 노예들은 주로 슬라브인들이나 투르크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왕의 노예가 되어 궁궐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궁궐에서 생활하던 노예 중에 왕의 신임을 얻은 노예들은 자유민의 신분을 얻어 국가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노예들은 용병이 되기도 했다. 용병에서 시작되어 장군의 위치에 오른 자도 있었다. 군의 실권을 장악한 투르크계 용병 장군들은 왕을 위협하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들은 자신이 왕이 되기도 했는데 그들이 세운 왕조에는 이집트의 맘루크조, 중앙아시아의 가즈나조 등이 있다. 

역설적이지만, 전쟁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와 다른 세계와 접촉한다. 낯설지만 신선한 세상을 본다. 인종, 언어, 문화, 풍속, 습관 등 새로운 것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색다른 환경과의 접촉과 갈등, 적응 과정을 거쳐 끝내 살아남는다. 그리고 기운 차려 또 누군가와 싸운다. 가히 인류는 전쟁벽(戰爭癖)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낳는다. 전쟁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는 비인간적 숙명이 그중 하나다. 657년을 기점으로 서돌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난 후 중앙아시아 북방 초원 지대에는 투르크계 유목 집단들이 저마다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이 이슬람 세계에 노예를 공급하는 악덕업자들이었다. 아랍 지리학자 이스타흐리(?~957년)는 이들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인들이 같은 종교를 신봉하는 무슬림 형제들의 편에 서서 이교도(異敎徒, kafirs)인 同族들과 전쟁을 하고 노예를 약탈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한다. 민족보다 종교가 앞선 것이다. 암흑과 빈곤의 중세를 살아온 유럽이 흥성하게 된 것도 노예무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좌)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秦)의 장군 백기(白起: ? ~ 기원전 257년), (우) 진나라秦朝 영토 지도

사마천의 『사기』 「백기⸱왕전열전(白起⸳王翦列傳)」에는 전국시대인 기원전 260년 秦나라의 백기(기원전 332?~257년)가 長平전투에서 진나라에 패하여 항복한 趙나라 병사 40만 명을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나이가 어린 240명만을 살려서 조나라에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도대체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은 인간 잔혹사는 그 끝을 알기가 어렵고 그 횟수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칭기즈칸의 후예로 티무르 제국을 세운 악사크 테무르(Aqsaq Temür,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뜻의 차가타이 말) 역시 만만찮다. 

티무르제국의 건설자 아미르 티무르<br>
티무르제국의 건설자 아미르 티무르

1383년 칭기즈칸의 후예로 부마국임을 자처한 티무르는 사마르칸트에서 페르시아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킨 사브제와르에 대해 끔찍한 보복을 가했다. 그 결과 거의 2,000명의 죄수들이 산 채로 차곡차곡 쌓이고 진흙과 벽돌이 함께 섞여 탑을 이룰 지경이었다. 반항하던 세이스탄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병사들은 시체로 산을 만들었고 해골로 탑을 쌓았다.

세이스탄의 수도인 자란지에서 티무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요람에 있던 아이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을 처형시켰다. 특히 그는 세이스탄 교외의 관개시설을 파괴하여 그 고장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렸다. (르네 그루쎄: 2009, 603 참조)

끔찍한 보복 전쟁이 무고한 인명에 대해 얼마나 엄청난 피해를 입혔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9세기 후반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일파인 바랑고이족이 남하하여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예프를 관류하는 드네프르 강 유역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선주민인 슬라브족(the Slavs)을 지배했다. 슬라브인들은 낯선 침입자들을 이방인이라는 뜻으로 루스(rus)라 불렀다. 당시 흑해 북방의 남부 러시아는 두 문명권 사이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루스족 상인들은 카스피해 건너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압바시드 이슬람과 흑해 남쪽의 비잔틴 제국과 활발한 교역활동을 벌였다. 이들의 토산품은 당시로서는 귀했던 꿀과 사치품인 모피였다. 게다가 쉽게 노예들을 포획할 수 있었다. 사로잡은 슬라브족 노예들은 모슬렘의 하렘과 콘스탄티노플 상류층 가문에 팔았다. 노예 교역은 무엇보다 이윤이 많이 남는 장사였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을 돈벌이로 사고파는 일은 역사에 흔하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노예를 가리키는 영어 slave는 고대 프랑스어 esclave에서 비롯되었고 또 이  말은 슬라브족 포로라는 뜻의 중세 라틴어 sclava에서 파생되었다. 그런가 하면 영어 단어 family의 어원은 참으로 아이러닉하다. ‘노예, 노비’를 뜻하는 라틴어 familia에 그 기원을 두기 때문이다.  
  
전쟁과 약탈의 견지에서 보면 언제나 포로가 존재했다. 전쟁 포로였다가 노예시장에서 팔린 사람상품은 노예 신분으로 전락한다. 유목사회에서의 노예는 출신에 상관없이 곤고한 삶을 위로하고 불평등에 분개하며 끼리끼리 모여 살면서 하나의 部를 형성하기도 했다. 대부분 이민족(혹은 다른 부족) 출신인 이들이 시간의 경과와 더불어 새로운 사회 계층이 되는 것이다.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세력들이 걸핏하면 싸우고 노략질하고 그러다 화해하고 하는 일이 되풀이 되던 시절 부족연맹체인 흉노 사회에 바로 그런 노예집단이 있었다. 이들을 중국사서는 ‘자로(貲虜)’라 기록했다. 『三國志』「魏志 烏丸鮮卑東夷傳」 西戎 條에 의하면, 흉노인들이 외부집단과 싸워 포획한 노예들 대부분을 종으로 삼고, ‘자(眥)’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은 ‘자로(眥虜)’라고 했는데, ‘노비, 종’이라는 의미의 ‘虜’는 중국인들이 붙인 중언부언이다. 우리말 종의 고대음은 ‘죵’이었다.

(좌) 1250~1517 맘루크 술탄왕국(Mamluk Sultanate), (우) 맘루크 왕조의 병사들<br>
(좌) 1250~1517 맘루크 술탄왕국(Mamluk Sultanate), (우) 맘루크 왕조의 병사들

노예 출신이 왕조를 창업하는 경우가 있는데, 앞서 말한 맘루크(Mamlūk)가 그 대표 사례다. Mamlūk는 이른바 칼리프에 직속된 노예 신분의 군인을 가리키는데, 본래 ‘소유된 자’라는 의미의 말이다. Mamlūk은 단수형이고, 복수형은 mamālīk이다. Mameluke, mamluq, mamluke, mameluk, mameluke, mamaluke (or marmeluke) 등 이표기가 많다.
 
비슷하게 사용되는 말로 굴람(Ghulam)이라는 아랍어가 있다. 종복(servant), 시동(boy), 청년(youth)이라는 뜻을 지닌 말이다. 천국의 젊은 하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지만, 압바스, 오스만, 사파비드, 무굴 왕조의 노예병사를 가리키는데도 사용되었다. 맘루크는 주로 이집트를 비롯한 中近東 지역, 굴람은 이란 너머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쪽에서 쓰이는 경향이 있다. 

맘루크의 출현 배경은 이렇다. 앞서 호라산 총독에 임명되어 부하라 등지를 침공한 우베이둘라가 곧바로 이라크 총독에 임명되어 바스라로 귀환할 때 ‘부하라의 射手’ 2,000명을 데리고 가 자신의 호위대로 삼았다고 했다. 이렇듯 우마이야 왕조, 압바스 왕조를 비롯한 이슬람 왕조에서는 중앙아시아나 기타 지역에서 잡아온 노예들을 무슬림으로 개종시키고 군사 훈련을 시켜 맘루크로 육성했다. 맘루크 중 상당수가 튀르크인 내지는 소그드인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고용하고 훈련시킨 고용주 외에는 아랍-이슬람 제국에 별다른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군사력을 원하던 아랍 군주들에게 환영받았다.

맘루크집단은 13세기 이슬람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부패, 권력 집단화되거나 지방에 할거하는 세력이 되었다. 그러다가 아예 나라를 세우고 지배층이 되기도 했는데, 그 중에서는 북인도의 델리 술탄 왕조와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운 맘루크 왕조가 유명하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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