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드비크 프렉, 과학지식사회학을 창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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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크 프렉, 과학지식사회학을 창시하다
  • 이을상 부산대·철학
  • 승인 2021.02.1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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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 사고 양식과 사고 집단에 관한 이론』 (루드비크 프렉 지음, 이을상 옮김, 한국문화사, 335쪽, 2020.12)

오늘날 팬데믹 상황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 종교적 힘으로 통제될까? 그리고 집합금지를 명령하는 정부의 방역지침은 정말로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가? 백신 접종은 과연 위험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과학적 사실’에 무지한 사람이다. 이러한 종교적 무지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보다도―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던가? 그 사례를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거니와, 열거한다 해도 무의미한 일이다. 문제의 핵심은 오늘날도 여전히 과학적 사실에 무지한 사람이 많고, 이로 인해 문제 해결이 더욱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사실이란 무엇일까? 이를 ‘매독’(Syphilis)이라는 역사적 사례를 통해 해명한 사람이 있다. 바로 폴란드 출신의 루드비크 프렉(Ludwik Fleck)이다. 매독은 유럽의 역사에서 그야말로 저주받은 질병으로 한때는 ‘성병’(화류병)이었고, 지금은 ‘감염질병’으로 분류되고 있다. 성병이라는 말 속에는 은근히 개인의 성적 문란을 비난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이러한 도덕적 부정 판단으로 인해 사람들은 매독의 징후를 은폐시켜 감염을 사회적으로 더욱더 확산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와 달리 감염질병이라는 말은 개인의 비위생적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여기서는 도덕적 의미가 탈각된 예방적 조치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렇게 성병이나 감염질병은 모두 매독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확연히 다르다. 이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여기서 옳고 그름의 판단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과학은 ‘옳음’을 지향하고, 그른 것은 ‘비과학적’인 것으로 배제된다. 그리고 과학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다. ‘천동설’의 자기 부정이 곧 ‘지동설’이다. 다른 한편으로 비과학적이라는 말은 오늘날 ‘비진리’와 동치다. 그렇다고 하여 과학적 사실이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말은 아니다. 과학은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 왔다. 과학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일 뿐이다. 예를 들어 매독은 19세기 후반에 ‘스피로헤타 팔리다’ 균에 의해 감염된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20세기 초에는 스피로헤타 팔리다의 보균자라 하여 모두 매독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로부터 ‘면역’이라는 새로운 사실이 알려졌다. 이것이 과학의 발전이다. 

그러나 새로운 사실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존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해 종래의 감염 사상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면역체계도 발견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말은 거꾸로 현존하는 개념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과학적 사실의 본성에 이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우리는 또한 과학의 발전상을 추적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프렉의 문제의식이다. 프렉은 일찍이 1935년에 ― 칼 포퍼(C. Popper)의 『탐구의 논리』(1934)와 비견되는 ―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 사고 양식과 사고 집단에 관한 이론』을 출간했다. 하지만 독일 나치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그는 유태인 집단수용소에 감금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에는 폴란드의 의학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최고 국가 훈장을 받았지만, 1957년에 그는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1961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런 이유로 프렉의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은 우리의 학문적 관심에서 멀어지는 듯 보였지만, 1962년에 쿤(H.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 서문에서 프렉의 책이 언급되면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오늘날 과학철학 또는 과학사회학에서 고전으로 읽히는 포퍼와 쿤의 책은 말 그대로 과학적 발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둘 다 과학적 사실의 본성을 밝히는 일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 점은 하버드대학교 총장을 지낸 코난트(J. B. Conant)가 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사실은 사실일 뿐이야”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프렉은 과학이 인간의 일상생활과 유리될 수 없는 역사적-사회적 사고의 산물임을 역설한다. 예를 들어 뉴턴(I. Newton)이 17세기 후반의 영국 사회가 아닌 다른 시대에 다른 곳에서 살았더라도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란 뉴턴이 살던 당시의 ‘사고 양식’에 의해 처음으로 주조되었고, 이를 일련의 ‘사고 집단’이 받아들임으로써 과학적 사실로서 보편화되었다. 사고 양식이란 일종의 세계관(또는 쿤의 ‘패러다임’)과 같은 것이고, 사고 집단이란 학문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이다(뉴턴은 단지 이 사고 집단을 대표할 뿐이다). 이렇게 사고 집단에 의한 보편화가 곧 ‘발전’인데, 과학적 발전에는 또한 학문공동체의 학술활동(학술지 과학, 편람과학, 교과서 과학)이 크게 기여한다. 저자들은 먼저 개별 관점에서 연구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할 것이다. 다음으로 저자들 간의 공통 인식을 바탕으로 ― 이른바 짜깁기된 ― 편람과학이 만들어진다. 이를 교과서가 수용함으로써 과학은 발전한다. 이것이 프렉의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 대강이다.

원서 & 저자 루드비크 프렉(1896~1961)

과학 발전의 원동력을 포퍼는 ‘반증의 원리’에서,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구했다. 이러한 포퍼와 쿤 간의 입장 차는 오늘날도 여전히 논쟁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 논쟁을 쿤이 자신의 사고 형성에 프렉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는 고백을 바탕으로 동시대의 포퍼와 프렉 두 사람 간의 (가상) 논쟁으로 재구성해 본다 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 간의 쟁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포퍼는 ‘통일과학’을 지향하는 논리실증주의의 절대적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프렉은 지식의 사회적 ‘피제약성’을 주장한 ‘지식사회학’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과학 자체의 ‘논리적 합리성’만 추구하는 포퍼와 달리, 프렉은 과학적 인식이 형성되는 ‘사회학적 논의’에 초점을 맞췄다. 이러한 프렉의 논점은 1970년대를 풍미한 과학지식사회학과 일맥상통한다. 70년대의 과학지식사회학은 행위자나 사회집단 간의 갈등과 협상이 과학기술의 변화를 주도한다는 과학의 ‘사회구성주의’를 표방한다. 여기에는 쿤의 책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70년대의 과학지식사회학은 프렉의 ‘과학적 인식의 사회학적 피제약성 및 역사적 구속성’이라는 관점과 다른 것이다. 심지어 프렉은 과학지식사회학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과학적 인식의 사회적 유래를 밝힌다는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비교인식론’이라 불렀다.

그 차이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즉 오늘날 과학지식사회학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 (미래지향적으로) 행위자의 인식 변화와 사회집단의 의식 개선이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이에 반해 프렉의 논지는 현존하는 개념의 역사적 유래를 밝힘으로써 과학의 발전을 (회고적으로) 논증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차이에도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성찰한다는 큰 틀에서 프렉을 과학지식사회학의 창시자라 불러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더욱이 오늘날 상식화된 ‘무지’ 상태에 빠져 있는 과학적 사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과학기술에 대한 지식사회학적 접근은 당연히 필요해 보인다.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프렉을 새롭게 주목하는 이유다.


이을상 부산대·철학

부산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이다.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아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동아대학교 석당연구원 전임연구원, 동의대학교 인문대학 문화콘텐츠연구소 연구교수 등을 거쳤다. 새한철학회 제4회 만포학술상과 대한철학회 제4회 운제학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인간복제의 윤리적 성찰』(공저), 『생명과학의 철학』, 『양심』(공저), 『사회생물학,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공저), 역서로는 『도덕적 인식의 기원』, 『신경과학의 철학』, 『윤리학』, 『인간, 그 본성과 세계에서의 위치』를 비롯해 그 외 다수의 저서와 역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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