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곡 선생을 놀라게 한 홍합포의 선물 동정향(洞庭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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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곡 선생을 놀라게 한 홍합포의 선물 동정향(洞庭香)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1.01.1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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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 (38)_ 이곡 선생을 놀라게 한 홍합포의 선물 동정향(洞庭香)

“盤中(반중) 早紅(조홍)감이 고아도 보이다/柚子(유자) 안이라도 품엄 즉도 다마/품어 가 반기리 업슬 글노 설워이다.”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조홍시가 早紅柹歌>
        

▲ 노계 박인로와 박인로의 작품을 모아 간행된 ‘노계집’
▲ 노계 박인로와 박인로의 작품을 모아 간행된 ‘노계집’

지난 밤 예상치 않은 큰 눈이 왔다. 어딘가로 가야할 사람은 더 없이 불편하겠지만 별 달리 할 일 없던 나로서는 눈 풍경을 바라보는 일 만으로도 즐겁다. 눈 안 오는 동네 사람들은 백설에 덮인 나무며, 자동차며, 집이며, 거리며, 둑방길이며, 학교 운동장이 전해주는 설레임을 모르겠지? 이런 유치한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식탁 위에 놓인 귤이 먹고 싶어졌고 귤 한 조각을 입안에 넣는 순간 우연찮게 “반중 조홍감이 고와도 보이나다”라는 시 구절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고등학교 때 배웠던 옛 시인데 떠나지 않고 장기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조선 선조 때의 문신 박인로(1561~1642년) 선생은 송강, 고산과 더불어 조선 시가의 3대가로 알려져 있다. 효심 깊은 아들이 빠알간 홍시를 보고 가져가 아버지께 드리고 싶으나 당신께서는 이미 이 세상을 하직하셨기에 그런 일이 아무 소용없음이 슬프다는 내용의 사친시(思親詩)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짠하다. 그런데 위의 홍시 노래에서의 유자가 고사본(古寫本)에는 귤로 적혀 있다. 

“盤中(반중)에 노흰 早紅(조홍) 두려움도 두려울사 비록 橘(귤)이 아니나 품엄 즉다만은 품어도 듸릴  업이 글로 셜워노라.”

당시 귤은 무척이나 귀한 과일이었을 것이다. 시의 맥락을 보아도 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진귀한 과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나도 열다섯 살이나 되어서야 귤을 처음 맛보았다. 조선시대보다 훨씬 전에는 귤이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

목은(牧隱) 李穡(이색)의 부친인 고려 말 문인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년) 선생은 律詩 <謝洪合浦寄橘茶 홍합포가 귤과 차를 부쳐 준 것을 감사하다>에서 홍합포가 보내온 동정향(洞庭香)이라는 이름의 동정귤을 받아들고는 “홀오(忽驁, 깜짝 놀랐다)”라고 했다.
 

晩食藜羹味亦長     만식에는 나물국도 맛이 좋은데
忽驚分我洞庭香     동정향을 나눠 주다니 이것이 웬 떡이오
煙江玉膾雖無計     안개 낀 강의 옥회는 구할 길이 없다 해도
時對金虀發興忙     이따금 금제 대하면서 흥을 가누지 못한다오

감귤에는 금귤(金橘)·동정귤·청귤(靑橘)·산귤(山橘)·왜귤(倭橘) 등 5종이 있는데, 동정귤은 동정산(洞庭山)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감귤로 특히 껍질이 얇고 맛이 좋다고 한다. 중국 호남성 북부 동정호 근처에서 나는 것이 제일 향기롭다는데,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 한다.

금제옥회는 수나라 양제가 맛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음식으로 보통은 산해진미와 같은 맛있는 요리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가늘게 썰어 놓은 농어회가 옥처럼 하얗기에 옥회(玉膾)라고 했고, 회를 찍어 먹는 양념장이 황금빛으로 빛난다고 해서 금제(金虀)라고 했다. 금제는 귤껍질을 잘게 다져서 겨자와 함께 버무려 놓은 귀한 양념장이다. 예전 서양에서는 후추가 귀해서 통후추 한 알 값이 같은 크기의 금값과 맞먹는 향신료였다고 하는데, 동양에서는 귤껍질이 후추 못지않은 최고급 양념이었다.

지금은 누구라도 사먹을 수 있는 맛있는 귤의 원산지는 어디일까? 남자들이 좋아하는 액션 첩보 스릴러 영화 중에 맷 데이먼이 주연을 맡은 본 시리즈가 있다. 그 중 4부가 <본 얼티메이텀>이다. 이 영화의 압권은 북서 아프리카 국가 모로코의 탕헤르에서 벌어지는 격투신이다. 그런데 지명 탕헤르에서 지중해산 귤의 이름이 만들어졌다. 탠저린 오렌지(Tangerine orange)가 그것으로 우리가 흔히 먹는 제주산 귤과 대립되는 유럽산 귤이다. 탕헤르를 영어로는 탠지어(Tangier)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제주 밀감 즉 감귤은 영어로 만다린 오렌지(Mandarine orange)라고 부른다. 표준 중국어인 베이징 官話를 뜻하기도 하는 ‘Mandarine’이라는 이름에서 짐작이 가듯 중국이 원산지인 귤이다. 고대부터 히말라야 동부와 중국의 양쯔강 상류 지방에서 재배했다. 서양 귤은 맛과 당도가 동양의 것과 판이하게 다르다.
 
모로코 북서부 탕헤르테두앙 주의 주도인 탕헤르는 지브랄타르(Gibraltar) 해협의 서부 마그레브 해안에 위치해 있다. 주민의 숫자는 약 95만 명(2014년 현재)으로 스페인에서 27km 정도 떨어져 있다. 고대 페니키아의 항구였으며, 예로부터 아프리카와 유럽을 연결하는 주요 교역지로 중요시되던 곳이다. 5세기까지 로마 제국의 영토였으며, 이 일대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렸고, 그 후 반달족의 침입을 받고 쇠락해진 상태에서 잇따라 비잔틴 제국과 아랍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탠지어(Tangier)라는 영어 명칭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과거 이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였다. 페니키아인들의 교역 지점이었던 때도 있었다. 원주민은 잘 생긴 베르베르인이었다. 이들이 이곳을 고대 베르베르어로 틴지(Tingi)라고 불렀다. 식민지 지배자인 로마인들이 이를 틴지스(Tingis)로 받아들였다. 베르베르인들은 오래 전부터 탄자(Tanja)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7세기 후반 이후 이 일대를 지배한 아랍어를 쓰는 사라센 이슬람들은 현지인인 베르베르인들이 쓰는 Tanja를 탄자흐(Ṭanjah)로 받아들여 사용하고 있다.
 

사실 탠저린 오렌지(Tangerine orange)는 오렌지이고, 귤은 시트론(citron)이라고 하는데, 귤속 과일 중 하나인 citron이 유대인을 통해서 지중해와 유럽으로 퍼져나갔고, 레몬과 오렌지는 이베리아 반도에 정착한 우마이야 왕조의 무슬림을 통해서 8세기 이후 처음으로 유럽에 알려졌다. 그래서 오렌지와 레몬은 오랫동안 무슬림과 결부되는 이국적인 과일이었다.

귤속(citrus) 나무는 연평균 기온이 15℃ 이상 되는 난대지역에서 자라기에 알맞으며, 물 빠짐이 잘 되고 겉흙이 깊은 모래 참흙이 생육에 좋다. 한국에 있는 재래 귤 품종은 당유자, 진귤, 병귤, 유자, 청귤, 동정귤, 홍귤, 빈귤, 사두감이 있다.

앞서 말했듯 귤은 원산지가 인도와 중국이다. 히말라야 동부 지역과 중국 양쯔강 상류 지역에서 고대부터 재배했다. 흔치 않은 귀한 과일로 왕족의 식단에나 오를 선택받은 몸이었다. ‘회귤유친(懷橘遺親)’이라 하여 “귤을 품어가 어버이께 드린다”는 유명한 중국 고사성어가 있다. 고사의 주인공 육적(陸績)의 이름을 붙여 ‘육적회귤(陸績懷橘)’이라고도 한다.

육적(188~219년)은 중국 후한 말의 관료이자 학자다. 그가 여섯 살이 되던 해, 아버지 육강(陸康)을 따라 구강(九江)에서 원술(袁術)을 뵈었다. 원술이 손님인 육씨 부자에게 귤을 대접했는데, 육적은 그 중 둘을 품안에 숨겼다. 육적이 떠날 때, 원술에게 배례를 하는데 그만 귤이 품에서 흘러나와 땅에 떨어졌다. 원술이 웃으며 “육랑(陸郞)은 내 집에 손님으로 왔으면서 떠날 때 어찌하여 주인의 귤을 품안에 감춰 가지고 가느냐?”라고 물었다.

육적은 “어머님이 귤을 좋아하십니다. 집에 돌아가 어머님께 맛보시라 드리려고 그랬습니다.”라고 답변했다. 원술이 어린 나이에 모친을 생각하는 육적의 효심이 기특하고 놀라워 귤을 하나 더 건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시를 지어 가로되, "효(孝)와 제(悌, 공경할 제)는 모두 천성이니 6살짜리 어린아이가 옷소매 속에 귤을 품어 어머니에게 전해드려 깊으신 사랑에 보답하는도다".

* 황색 과일의 대표 귤(橘)
形聲은 상형, 지사, 회의, 전주, 가차와 더불어 한자의 구조 및 사용에 관한 여섯 방식(六書)의 명칭 중 하나다. 두 글자를 합해 새 글자를 만드는 방식을 따른 形聲漢字 ‘橘’에서 ‘木’은 뜻을 ‘矞(율)’은 음을 나타낸다. 그런데 矞은 꽃구름 즉 색채가 있는 상서로운 구름을 뜻하는가 하면, ‘과시(誇示: 자랑해 보이기)하다’라는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귤나무는 示威的 가시가 있는 나무를 뜻한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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