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단계, 이창동과 그의 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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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단계, 이창동과 그의 시네마
  • 신철하 강원대·영화서사/비평이론
  • 승인 2021.01.1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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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 나의 테제]

■ 나의 책, 나의 테제_ 『봉인된 시간: 이창동, 혹은 반시대적 고찰』 (신철하 지음, 소명출판, 192쪽, 2020.12)

『봉인된 시간』은 남한의 현재태를 ‘잔여적 식민지’로 규정한다. 이창동 영화를 관통하는 지배소 ‘분단체제’는 이 식민지 잔여태를 기원으로 한다. 분단체제는 필연적으로 분단자본주의라는 괴물을(한국적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내재하고 있는 분단자본주의는 분단체제에 기생해서만 그 기능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는 특수한 모델) 짝패로 생식과 번식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포스트분단체제의 남한 일상은 거의 모든 실존들에게 노동의 소외로 파생된 내면의 분열을 예외 없이 사생아로 잉태하는 결과를 낳았다. 행복해지려고 하면 그러할수록 불행의 강도가 오히려 더 증폭되는 이 불가해한 모순은 오늘을 사는 남한 인민이 맞닥뜨린 피할 수 없는 생존 민낯이다.

이 땅의 현실에서 행해지고 있는 ‘힐링(엄격하게 말해 힐링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사기에 가까운 힐링인문학 간판을 걸고 아무 죄의식 없이 점집 비스무리한 행상을 하고 있는 대학의 지식잡화상들을 보라)’, ‘소확행’, ‘욜로(욜로 좋아하다 골로 간다)’, ‘먹방(백종원으로 상징되는, 처먹는 것으로 시간을 고문하다시피 하는 온갖 쓰레기 수준의 방송들)’, ‘거의 집단광기에 빠진, 들불처럼 번지던 묻지마식 여행(역병이 그것을 잠재우긴 했다)’, ‘없는 감정까지 쥐어짜다시피 하며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집단광증에 빠진 듯한, 퇴폐와 퇴행이 분명한, 나훈아스캔들로 정점을 찍은 온갖 트롯 광풍’, ‘기레기와 쓰레기 수준의 지식인들을 동원한 아류미디어의 배설에 가까운 소음의 성찬’ 등은 모두 말의 엄밀한 의미에서 분단체제와 거기에 기생해서 몸집을 키워 온 분단자본주의 현재적 민낯이다. 이른바 ‘봉준호 센세이션’이 이 자장 안에 있다. 그것은 분단자본과 세속적 조급성이 결합한 스캔들처럼 보인다. <기생충>의 계급적 이분법은 유희적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오락영화다. 오늘의 남한 일상은 온갖 허상에 매몰돼 소비의 과잉을 끝도 없이 에스컬레이트하는 소모품 배설 전시장이다.

응시해볼 때, 분단체제는 현 단계가 일제강점기의 연장, 부연하면 잔여적 식민지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명확하게 규율한다. 우리는 아직 일제 식민지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지 못한 이중구속(double bind) 상태에 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분열된 내면을 전제한다. 그러니까 힐링, 욜로, 먹방 등이 행복의 세부가 아니라, 오히려 불행의 끈적한 찌꺼기를 혈관에 누적하는 독(毒)의 배아 과정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내면의 식민성’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남한 인민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의식의 불구다. 분단체제에 이중구속 돼 있는 한 그러므로 인민은 끝없는 반목과 분열, 정치적 갈등과 문화적 열등감의 운명에 처할 수밖에 없다. 식민지와 분단체제의 후유증은 크고 그만큼 고통스럽다. 우리는 이 근인과 원인이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왕조와 오직 자기 영달과 권력에만 눈이 먼 지식인(사대부, 양반)의 협잡과 방관이 만든 최악의 유산이라는 데 동의한다. 말하자면 『봉인된 시간』이 이창동을 빌어 묻고 싶었던 것은 이 비극적 유산의 현재성이다.

영화는 우리시대 개념을 창안할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다. 영화가 시대정신을 동의어로 소환할 수 있는 이유인 것이다. 이창동의 거의 모든 페르조나들은 분단체제가 낳은 괴물과의 싸움으로 고통받거나 젊은 청춘을 버린 영혼의 절규로 들끓는다. ‘신애(밀양)’는 돈에 눈이 멀어 아들을 살해한 가해자가 기독교라는 신을 빌어 억지로 만든 용서에 끝내 분열해버리며, ‘영호’(박하사탕)는 ‘광주’라는 시대극에 얄궂은 운명처럼 빨려들어간 후 서서히 괴물이 되어가면서 마침내 그의 푸른 청춘과 작별한다. ‘막동’(초록물고기)은 그가 가장 사랑하던 엄마(실제는 ‘성아[형]’)를 공중전화 너머로 외마디 비평처럼 간절히 부르짖다 비정한 현실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하며, ‘종수’(버닝)는 분단체제와 그것에 기생하여 독버섯처럼 창궐한 분단자본주의의 유령과 싸우다 자신의 젊음을 송두리째 저당 잡히는 불운한 인생의 환영이 된다.

▲ 시네마 [버닝]에서 종수가 새벽안개를 뚫고 파주에 시설돼 있는 비닐하우스 중 태운 흔적을 찾아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니는 쁠랑.
▲ 시네마 [버닝]에서 종수가 새벽안개를 뚫고 파주에 시설돼 있는 비닐하우스 중 태운 흔적을 찾아 숨을 헐떡이며 뛰어다니는 쁠랑.

『봉인된 시간』이 포스트분단체제의 민낯을 논하는 질료는 단연 영화다. 그것은 ‘운동-이미지’(들뢰즈)를 구조하고 있는 영화언어를 소환할 것을 주문한다. ‘쁠랑’과 몽타주는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한 이미지 도구이며, ‘암전’과 ‘리듬’은 그것의 심화를 위한 툴이다. 이창동은 <시>를 거쳐 <버닝>에 이르러 한국영화 100년사를 통틀어 거의 넘볼 수 없는 위계의 영화적 리듬을 모그의 스코어를 통해 구축했다. 가령, 종수가 안개 낀 새벽 들녘을 헐떡이며 거의 반미치광이처럼 튀기 벤이 태운 비닐하우스 흔적을 찾아 헤매는 쁠랑(들)과 그 감정(/정동)을 드라마화하는 “The way home” “crying knife” “vinyl house”의 엠비언스(bgm), 그리고 마지막 엔딩 크레딧에 올라온 “suffer and suffer”의 사운드 잔상은 한국영화에서 구사하기 힘든 전무후무한 깊이와 울림을 각인한 대 사건이다. 들뢰즈는 이를 리토르넬로의 다른 호명인 ‘탈영토화’로 개념화했으나, 나는 그것을 동시대를 돌파하는 단 하나의 언어, ‘무위’(혁명)로 고쳐 썼다.


신철하 강원대·영화서사/비평이론

『자연과생태』 편집위원을 맡고 있으며 강원대 영상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노자와 에로스: 에로스와 생명정치-도덕경주석>, <사랑의 파문-노자, 아나키, 꼬뮌>, <문학과 디스토피아>, <한국 근대문학의 이상과 현실>, <역사의 천사> 등 다수가 있다. 최근 ‘잡종적 글쓰기’를 통해 한국 근대 200년의 지적 유산을 전면적으로 해체하는 실험에 착수했으며, 그 하위 범주인 한국문학사 100년의 집적을, 나아가 기록의 그것(들)을 해체-재구성하는 모험의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있다. 한국의 현재태를 ‘잔여적 식민지’로 규정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의 궁극적 해방이 ‘무위(無爲)’를 매개로 생태아나키를 지향해야 한다는, 남한의 포스트분단체제와 정치의 미적 재구성에 대한 연구, 『에코아나키-통일이행기 한국문학의 해석적 모험』이 작업의 최종심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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