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인종주의를 유지, 강화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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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인종주의를 유지, 강화하는가?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0.12.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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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백인의 취약성: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하는가 | 로빈 디앤젤로 지음 |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88쪽

왜 백인은 인종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그토록 어려워할까? 저자는 백인이 사회화를 통해 스스로도 모르게 백인 우월주의를 깊이 내면화하여 인종 문제와 관련한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이 부족해진다고 진단한다. 그리하여 인종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을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백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저자는 수많은 다양성 워크숍 현장에서 인종주의 체제와 그에 가담하는 백인의 행태를 거명하고 문제 삼는 훈련사의 지적에 백인 참가자들이 드러내는 갖가지 방어적 반응을 지켜보면서, 저런 반응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오랜 기간 숙고한 끝에 ‘백인의 취약성’ 개념을 고안해냈다. 그는 이 책을 시작하며 “나는 백인이며 이 책에서 백인의 집단역학을 다룬다”고 밝히고, 자신이 정의한 백인의 취약성을 바탕으로 풍부한 경험과 사례를 들어 미국의 인종주의를 분석하며 백인으로서 같은 백인 독자들에게 백인의 취약성을 직시하게끔 독려한다.

‘백인의 취약성(White Fragility)’이라는 개념은 옥스퍼드사전에서 ‘2017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을 만큼 주목받았다.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 개념은 ‘백인이 자기네 인종 위치에 대한 도전을 받을 때 의식적·무의식적으로 보이는 방어적 반응’을 의미한다. 백인의 반응은 분노, 모욕감, 수치심, 죄책감 같은 감정의 형태일 수도 있고, 논박하기, 부인하기, 회피하기, 울기 같은 행동의 형태일 수도 있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이념에 기초해 건국되었지만 그동안 미국에서 권력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정체성은 줄곧 눈에 띄게 비슷했다. 그들은 백인, 남성, 중간계급 혹은 상층계급, 비장애인이었다. 권력의 자리에서 내리는 결정은 그곳에 없는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다.

인종주의적 사회에서 자라는 백인은 사회화를 통해 백인 우월주의를 깊이 내면화하고 그에 따른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또한 백인들은 자신들에게 불평등한 혜택과 이점이 주어지는 현실을 당연시하게 된다. 그리하여 백인은 인종과 관련한 불편함을 견디는 능력인 인종 체력을 기르지 않은 채(더 정확히는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자라게 되고, 결국 인종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마치 무릎반사처럼 발끈하며 백인의 취약성으로 대응하게 된다. 그 결과 백인은 인종 스트레스로부터 차단되는 동시에 백인에게 이점을 누릴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인종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을 ‘선량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라는 백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다.

원서 & 저자 로빈 디앤젤로

이처럼 백인은 인종 위치에 대한 도전을 견디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취약하다. 그러나 백인의 취약성의 영향력 자체는 전혀 취약하지 않다. 백인의 취약성은 인종주의적 현실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압박하여 그들을 현재의 자리에 묶어놓는 강력한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 인종주의적 현실에 불균형이 생길 때 기존의 균형을 회복하고 백인의 권력과 통제력을 되찾아오는 기능을 한다.

이 책은 이렇게 인종주의와 가장 연관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종주의 논의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았던 백인성을 논의의 중앙으로 끌어온다. 그리고 인종주의의 여러 전제, 인종주의와 관련한 다양한 개념 등을 풍부한 근거와 사례로 풀며, 백인의 취약성이 나타나는 양상과 백인의 취약성의 기능, 이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어 미국의 인종주의 체제를 분석한다. 이어서 인종주의 해소를 위하여 함께 노력하기 위한 여러 전략과 지침을 풍부하게 제공하고, 자신과 같은 백인에게 함께 더 나아지자고 요청한다.

한국에서 백인의 취약성은 다소 낯선 개념이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인종 문제가 큰 이슈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인의 취약성이 주는 중요한 교훈, 소수자가 차별을 말할 때 방어적 행동으로 기존의 차별적 질서를 유지하는 문제에서는 한국도 자유롭지 않다. 이미 한국에서도 인종, 젠더, 장애, 지역 등의 문제로 다양한 차별이 존재해왔고, 이로 인한 사회갈등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국의 소수자들이 차별을 말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이 책은 이런 측면에서 한국에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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