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급(救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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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救急)’
  • 조영달 서울대·경제교육/시민교육
  • 승인 2020.12.0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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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가 엎드려 생각해보니, 나라의 근본은 쪼개지고 무너져서 물이 끓듯 불이 타듯 하고 여러 책임 있는 관리들은 거칠고 게을러서 응당 말해야 할 바에 침묵하고 심지어 허수아비 같기조차 합니다. 정치의 기강은 씻어버린 듯 말끔히 없어졌고 바른 정치로 국민을 위해야 한다는  원기(元氣)는 완전히 위축되었습니다. 지켜져야 할 예의는 쓸어버린 듯 없어졌고 형벌과 법규를 다스리는 공적인 일(刑政)들이 온통 어지러워졌습니다. 세상의 이치를 바르게 하려 노력해 왔던 지식인의 전통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물어졌고 사회를 지탱해온 공정한 도리가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사라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쓰고 집단의 이익에 따라 버리며 심지어 해롭게 하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恣行)되고 있습니다.
 
나라에 기근이 이어지고 있고 창고는 온통 고갈되어 가고 있습니다. 공헌(貢獻)이 통하지 않으며 감사의 의무를 다하는 일에는 누구도 돌보지 않고 세금과 공물은 조금의 숙고도 없이 멋대로 걷고 있습니다. 또한 국방은 허술할 대로 허술해져 오랑캐들이 우리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온갖 질병으로 인한 고통(病痛)이 널리 퍼지고 급하게 되어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을 예측할 길이 없어졌습니다. 급기야 국민들의 원통함이 극에 도달하고 있습니다.

이제 완급과 허실을 분간하여 정말로 급한 일을 제대로 처리해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예로부터 비록 태평성대라 해도 옳고 그르고 되고 되지 않는 일을 따져야 했기에 가능한 넓게 글을 올려 나라의 일들을 논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의 형세가 엎어질 듯 위태로워 어찌할 수 없는데도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좌우로 둘러서서 보기만 하고 구원하지 않으니 진실로 나라의 형편이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고 여겨집니다.”

이 글은 남명 조식(南冥 曺植) 선생께서 선조 초기에 승정원에 올린 상소문(上疏文, 南冥集)을 축약하고 지금의 말로 조금 다듬은 것입니다. 실로 오늘의 대한민국 사정을 논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정부 수립 이래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를 성취하였고,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6.10민주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를 이루었으며, 지능정보 기술혁명과 코로나19 재난의 시대를 넘어 세계사의 주역으로 거듭나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역사의 흐름을 이어가지 못하고 좌초의 위기로 치닫고 있습니다.

산업화의 성과는 성장 동력의 실종과 투자 효능의 부진으로 빛을 잃기 시작한 지 오래이며 이제 민주화의 성과 역시 법치주의의 훼손과 적대적(敵對的) 대결 정치, 그리고 과거 권위주의 정부를 연상케 하는 민주주의의 퇴행 속에서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극단적 이념대립을 심화시켜 국민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습니다.

과거의 적폐와 유사한 또 다른 현재의 적폐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암울한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대립은 갈등이 아니라 그 본질이 검찰을 현재 권력에 복종하도록 예속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검찰 개혁이 아니라 개악입니다. 최근 수십 년간을 권력의 전횡과 독재를 막을 수 있는 사회를 위해 노력했던 우리 국민에게 이는 그야말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출된 권력에 의해 모든 통제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발상은 민주주의의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선출된 권력의 전횡을 견제와 균형의 원리로 제어하는 것이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안타깝고 너무나 속상한 일이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하여 행동과 실천으로 나서야 합니다. “나라의 미래가 엎어질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서 좌우로 둘러서서 보기만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패놉티콘(panopticon)의 감시자들이 벌이는 조정에서 벗어나 진정코 사람다운 삶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같이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시민으로서 자손들에게 떳떳한 조상이 되어야 합니다. 


조영달 서울대·경제교육/시민교육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교실수업의 질적 연구방법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교육인류학회장, 한국사회과교육학회장, 서울대 사범대 학장, 대통령교육문화수석, 그리고 서울대 내 중앙다문화교육센터 소장 및 공공리더십센터 소장, 교육정책연구센터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교육과정의 정치학》, 《한국 중등학교 교실수업의 이해》, 《제도공간의 질적 연구 방법론》, 《경제학 산책》, 《고통의 시대 희망의 교육》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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