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로자식’, ‘빠가야로’, and “You Stupid!” 그리고 “이 진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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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자식’, ‘빠가야로’, and “You Stupid!” 그리고 “이 진셍이!”
  •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20.11.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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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연재: 연호탁의 말로 푸는 역사 기행(29)_‘호로자식’, ‘빠가야로’, ‘진셍이’

“밤이적막하다/적적한짐승이어디엔가숨어서/쉰울음을웃는다/쉼표없는가을밤은적막하고/어둔동굴앞의짐승은사못적적하다”--정자

어려서 주변에서 듣던 말 중에 ‘호로자식’이 있었다. 어른들이 보기에 버르장머리 없거나 본데없는 행동을 하는 아이를 가리켜 험담을 할 때 따라붙는 말이다. 그 말이 무슨 뜻인가 명확히 몰랐지만, ‘애비 없는’과 함께 쓰이는 경우가 많아 뭔가 나쁜 말이구나 하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호로(胡虜)’가 ‘오랑캐 놈[자식]’이라는 뜻의 경멸적 언사인 걸 알았다.
 
간교하고 잔혹한 일본 순사의 이미지와 더불어 일본말 ‘바카야로’의 변형, 빠가야로(ばか野郞: 바보자식)‘도 무시로 들었다. 서양 사람들은 그 어떤 욕설보다도 ‘바보’ 소리 듣는 걸 싫어한다. 그래서 영어사용권에서 “You stupid”가 “You son of a bitch”보다 충격 정도가 크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보라는 말을 장난투로 가볍게 사용하지만, 일본이나 서양은 ‘뭘 모르는 사람이라는 경멸을 담고 있는 욕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강릉사람들이 진셍이라는 말을 부담 없이 사용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바보 진셍이 같은 기”라는 말을 들어도 현지인들은 노여워하기는커녕 빙긋 웃어넘기거나 아예 반응이 없다.
 
진셍이는 ‘바보’의 강원도 방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강릉사람들이 많이 쓴다. 이 말 말고도 판대, 멘지기, 여버리, 얼간이, 천지 등을 쓰는데, 아주 드물지만 어느 때 들으면 정겹고, 또 다른 때 들으면 밥맛 떨어질 만큼 기분이 언짢다. 모든 말의 어원을 다 알 수 없지만, 바보를 일러 판대라 하는 것은 아마도 바보 취급받는 사람이 마치 상복과 패랭이를 걸친 대나무로 만든 판대 같아서는 아닐까 싶다. 과거 인천 풍습에 씨름 판대를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씨름판이 벌어질 것을 알린 후, 씨름판을 벌일 곳에 판대를 꽂고 풍물을 쳐서 마을사람들을 모이게 했다는데, 이 판대의 생김이 어리숙해서 바보를 판대라 이름붙인 건 아닐지....

▲ 정조와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었다고 알려진 심환지(오른쪽). 실제로 둘은 빈번한 서찰 교환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 정조와 정치적 적대관계에 있었다고 알려진 심환지(오른쪽). 실제로 둘은 빈번한 서찰 교환을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다시 胡虜로 돌아가서, 왜 호로자식이 욕일까? 정조도 표현은 다르지만 최측근으로 알려진 서용보(徐龍輔, 1757~1824)에 대해 ‘호종자(胡種子)’라고 칭했다 한다. 평소 야만족이라고 생각하는 오랑캐 호로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은 아닐까? 과거 허욕에 찬 남자들이 일으킨 전쟁의 결과로 국가나 종족이 일시에 무너진 경우를 우리는 여러 차례 목격했다. 조선 중기 소중화국 조선도 남한산성 전투에서 여진족 오랑캐 호로에게 굴욕적 항복을 했다. 그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 백성의 숫자가 물경 50~60만 명에 달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비극은 어디에나 있었다. 인간 잔혹사 중 두고두고 기억할 끔찍한 전사(戰事)의 압권에 이런 일도 있었다.

1383년 제국의 건설자 티무르는 사마르칸드에서 페르시아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킨 사브제와르에 대해 끔찍한 보복을 가했다. “거의 2,000명의 죄수들이 산 채로 차곡차곡 쌓이고 진흙과 벽돌이 함께 섞여 탑을 이룰 지경이었다.” 반항하던 세이스탄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우리의 병사들은 시체로 산을 만들었고 해골로 탑을 쌓았다.” 세이스탄의 수도인 자란지Zaranj에서 티무르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요람에 있던 아이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을 처형시켰다.” 특히 그는 세이스탄 교외의 관개시설을 파괴하여 그 고장을 사막으로 만들어버렸다.(르네 그루쎄: 2009, 603)

끔찍한 보복 전쟁이 무고한 인명을 얼마나 살상했는지, 당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엄청난 공포감을 주었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온고이지신”과 같은 말은 허언에 불과하다.

▲ 야만인으로 번역되는 barbarian은 고대 세계에서는 ‘다른 존재(othering)’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 야만인으로 번역되는 barbarian은 고대 세계에서는 ‘다른 존재(othering)’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참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자신 이외의 존재를 야만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고대 서양의 그리스인이 그랬고, 로마인도 마찬가지였다. 슬라브족 어린아이들과 여자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은 유대상인들이나 마르세이유 노예시장에서 세계 각처에서 잡혀온 바버리언(barbarians, 야만인)을 앞에 두고 과일값 흥정하듯 주접을 떠는 온갖 족속들이 다 그랬다.    

티베트인들도 자신들의 영역 밖의 존재를 야만스런 오랑캐로 간주하고 호르(hor)라 불렀다. 티베트 사람들에게는 강족(羌族) 사람들, 회골족(回骨族) 즉 오늘날의 위구르족이 다 호르였다. 심지어 칭기즈칸의 몽골족도 호르로 불렸다. 칭기즈칸은 “호르 장겔제뽀”라고 불렀다.
 
우리가 야만이라는 개념을 갖고 멸칭(蔑稱)으로 사용하는 ‘오랑캐’라는 말은 실제로는 순록유목민을 가리키는 ‘오론커’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자로는 올량합(兀良哈), 호리개(胡里改), 알랑개(斡朗改), 악륜춘(鄂倫春) 등으로 전사되었다.
 
전쟁 포로는 중요한 자산이었다. 포로는 팔면 돈이 되는, 때문에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저 형상이 사람 닮은 非人間이었다. 전쟁과 약탈의 견지에서 보면 언제나 捕虜가 존재했다. 출신이 어찌 되었건 일단 포로가 되어 팔리면 그는 上典의 사유재산인 奴隸 신분으로 전락한다.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 막북(漠北)과 몽골초원을 지배했던 부족연맹체 흉노 사회에도 노예집단이 있었다. 이들을 중국사서는 ‘자로(貲虜)’라 기록했다. ‘眥’는 ‘노비’를 뜻하는 흉노어의 음차자이기 때문에 정확히 말하면 노비들로 이뤄진 하나의 집단으로서 ‘자부(貲部)’라고 표기하는 것이 옳다. 訓을 취한다면 貲虜는 貲(재물 자)와 포로(捕虜) / 종, 노복 / 오랑캐를 가리키는 虜(사로잡을 로)가 합쳐져 재물로서의 노비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물론 노비가 되기 전에는 다른 신분, 다른 족속이었을 것이다.漢族은 이방인을 지칭할 때 말끝에 ‘포로’, ‘종’, ‘하인’을 뜻하는 ‘로(虜)’를 붙였다.
 
그래서 평소에도 비하적으로 위로(魏虜)라 부르던 북위(北魏) 정권을 수립한 탁발족의 두발 형태가 삭발(索髮)이라고 해서 색로(索虜) 또는 색두로(索頭虜)라 불렀다. 오랑캐라고 얕잡아 보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저들의 야만을 어쩌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울분에 찬 심정을 교활한 종놈이라는 뜻의 말 교로(狡虜)를 써서 달래기도 했다.
 
진시황 때 장군 몽염을 시켜 일시나마 흉노를 막북으로 몰아낸 일에 성공했으나 그 이후 한 고조 유방만 해도 백등산 전투에서 치욕적 패배와 후퇴를 겪는 등 漢族에게 흉노라는 족속은언제나 극도로 불편한 금수(禽獸)였다. 자신들의 교만을 모르는 한족은 다음과 같이 융갈과 흉노를 야만으로 치부했다. 『신당서』 「돌궐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예절과 양보는 군자와 사귀는 방법이지 금수나 이적을 접대하는 방법이 아니다. [중국의] 곱고 아름다운 것을 밖에 베풀게 되면 융갈(戎羯)같은 마음이 일고, 융갈의 마음이 일어나면 (중국에) 쳐들어와 도둑질을하게 된다. 성인(聖人)은 음식(飲食)과 성악(聲樂)을 [융갈과] 함께 나누지 않았고 [융갈이] 조공을 오면 문밖에 거주하게 한 다음 역관(譯官, 舌人)에게 날고기를 주고 먹으라고 함으로써 [융갈들이 중국의] 향기 좋고 맛난 것을 알지 못하게 했다. 한대에 교만한 흉노[驕虜]를 길들이려고 그들을 연나라와 조나라의 미색에 빠지게 만들고 태관(太官, 관직명)의 진미를 맛보게 하며 무늬가 있는 비단옷을 입혔기 때문에, [만약 조정에서 물자를] 주면 [흉노의] 요구가 늘어나고 [물자의 공급을] 끊으면 [흉노의] 원한을 샀으니, 이는 승냥이나 이리에게 좋은 고기로 배를 불려 마음대로 사냥을 해서 먹게 한 것과 같았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의 교만함을 모르거나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 이는 마치 무지의 지와도 같다.”


연호탁 가톨릭관동대·영어학

한국외대에서 영어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명지대에서 중앙아시아사 전공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가톨릭관동대 관광경영학과 교수로 그동안 『중앙일보』에 ‘차의 고향’, 『동아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에 칼럼 ‘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 『교수신문』에 ‘욕망의 음식: 음식문화사’를 연재했다. 저서로는 『문명의 뒤안 오지의 사람들』, 『차의 고향을 찾아서』, 『궁즉통 영어회화』,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 『문화를 여행하다: Travel, Culture&People』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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