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 살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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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 살았으니
  •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 승인 2020.11.0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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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원의 에크리티시즘]_안상학,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걷는사람, 2020)

안상학의 시를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로서 이번에 출간된 신작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다른 독자들도 꼭 한 번 읽어보기를 권유하고 싶은 시집이다. 도무지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때, 납덩어리처럼 가라앉은 마음의 상태를 극복하기 어려울 때, 이를테면 삶의 무상감이 너무 생생해져버릴 때, 나는 이 시집을 읽고 골똘히 시인의 마음과 내 마음을 두 개의 거울처럼 서로 마주 비추어 보았다.

▲ 안상학 시인
▲ 안상학 시인

그러면서 시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한 편의 시가 그것을 읽는 독자의 마음을 되비추어, 불가해 보이는 고통을 안으로 다스려 빛나게 하는지를. 기쁨 앞에서보다 아픔과 슬픔 안에서, 마음과 마음을 껴안은 시적 교감이 가능해지는지를, 안상학의 시는 서늘하게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 시집의 표지를 열면 시인은 자신이 “허망처럼 빠져드는 그런 바닥”에 놓여 있다고 고백하는데, 그것은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바닥”(「바닥행」)으로도 표현된다. 그 바닥의 정동(affects)은 「대서」에서,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불볕 더운 날, 나는 상자(桑柘)나무 가지에 앉아서 울고 있는 새를 생각한다. 가지를 박차고 날아오르면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 가지가 퉁겨 올라 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다는 그 나무를 생각한다.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 나도 그 어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것일까. 뒤통수가 섬뜩한 날 자꾸만 비지땀이 흐른다.(「대서」 부분)”

위의 시에서 “새”는 시적 자아이며, “상자(桑柘)나무”=뽕나무는 시인을 규정하고 있는 삶이다. 새는 삶의 규정력을 거슬러 초월하고자 하지만, 번번이 삶이 “새의 뒤통수를 냅다 후려갈긴다”는 진술은, 그것을 불가능케 만들었던 삶의 가혹함을 환기시킨다. 그 결과로 시적 자아는 스스로를 “가지를 뜨지 못하는 새”, 그러니까 초월을 가능케 하는 날개의 기능이 마비된 새와 같은 처지라는, 비관적 자기인식을 보여준다.
 
“나도 그 어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것일까”라는 자문은 시인의 것이지만, 시집을 읽어나가면서 독자인 나 역시 단순한 중력 이상의 삶의 끈질긴 경험적 인력(引力)이, 새의 비상을 불가능케 하는 외부적 억압인 것만은 아니고,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나”의 마음을 쓰는 역사이기도 하다는 전환적 생각에 빠져들게 만든다.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다는 것은 삶을 규정짓는 개인적 체험 속에서 시적 자아가 끝없이 울어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울음의 체험이 말할 수 없이 깊어질 때, 그것을 시인은 “바닥”이라고 말하는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떠오름 혹은 초월의 희망을 포기하게 만드는 저 마음의 어두운 심연을 의미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시란 마음이 쓰는, 혹은 마음에 대해 쓰는 역사이다.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에서 안상학은 그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억제해 왔던, 스스로의 마음이 써내려 간 역사를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고백하고 있다. 특히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되어있는 시들은 마음이 써내려 간 시인의 역사에 있어 가히 ‘절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가운데 「생명선에 서서」, 「북녘 거처」, 「안동식혜」는 “가지를 그러쥔 채 울고 있는” 어떤 이의 초상이 한 편의 ‘단편 서사시’처럼 표현된 작품으로, 마음을 쓰는 역사라는 서정시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작품들이다.
 
「안동식혜」에서 시인은 “일찍이 어매 없이 자란 나는 당연히 우리 집 식혜 맛을 알지 못해서” “내 그리움은 구름재 너머 맏어매 집을 기웃거리곤” 했다고 고백한다. 이 유년기의 아픈 기억은 안동식혜의 생생한 묘사 속에서 돌연 ‘활기’를 뿜어낸다.

“차례 음식상 물리고 나면 한 보시기 담겨 나오던 고것, 살얼음 사각대는 맑고 발그레 싹싹한, 생강과 고춧가루와 엿지름을 한데 훌 버무려 걸러 짜낸 물에 뽀얀 찹쌀과 노리끼리한 차좁쌀로 쪄낸 밥알 사이사이 깍뚝썰기를 한 무꾸 조각들이 서성이는, 그 위에 채를 친 밤과 땅콩 몇 낱 고명으로 올린,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그 맛은(...)”(「안동식혜」 부분) 

“어매 없이 자란 나”의 고통을 직정적으로 서술했다면, 이 시는 흔한 자기 연민에 빠졌을 것이나, 시인은 반대로 “맏어매 집”에서 먹었던 안동식혜의 맛을 공감각적 이미지의 활기를 통해 묘사한다. “고소, 시원, 달콤, 매콤, 얼콤”한 생생한 혀의 감각들은 “어매 없이 자란 나”의 허기를 낙천적으로 달랬던 시인의 마음의 역설을 잘 보여준다 “손맛의 주인이 어매가 아니고 맏어매여서 다행한 일”이라는 시인의 역설적인 긍정 역시,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을 가을 갈대처럼 서걱거리게 만든다.
 
「북녘거처」는 “당신은 인생길에서 돌아가고 싶은 길목이 있습니까”하고 물은 후에 “1978년 여름 한 달 살았던 불암산 아래 상계동 종점”의 “북녘거처”를 회상한다. 시인의 가출은 “세번째 아내를 둔 아버지가 살던 셋방”으로부터의 반항적 도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안동역에서 청량리행 열차”를 타고 “러셀의 책 한 권/ 싸구려 야외전축 유행가 레코드판 몇 장”을 들고 떠나온 소년. 청량리역에 도착해 지금도 있는 미주아파트에서 “식모 살던 동생이 남몰래 끓여 준 라면 한 끼 훌쩍”거리고, “상계동 종점 창이 없는 그 집”에서 한 달을 지냈지만, 아버지의 편지 한 장을 받고는 다시 귀향하게 되었다는 회상.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당시의 “불알친구는 십 년 뒤 낙향하여 낙동강에 목숨을 흘려보냈고” “아배도 오래전 소식 없고/ 누이동생도 다른 하늘을 이고 산 지 오래”인데, 오직 시인만 “꼬박꼬박 혼자서만 나이 먹어 가며” 남녘에서 “다 늦어 또다시 가출을 감행할 꿈을 꾸”고 있다는 것.
 
이 다 늦은 세월 속의 가출의 성격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동안 써 왔던 시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내 삶의 가장 먼 그 북녘 거처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다 늦은 가출에의 욕망은 회복할 수 없는 원체험의 장소로 회귀하고 싶다는 간절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제로(zero) 상태에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는 모순적 열망을 동시에 보여준다. 마음의 출가랄까? 그것은 가능한, 그러나 불가능한 욕망이다. 남는 것은 마음의 가출이 만들어낸 마음의 무늬와 그 간절한 흔적의 역사가 아닐지.
 
「생명선에 서서」는 그야말로 시로 쓰는 마음의 역사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지나간다”는 표현의 반복을 통해, 시인의 연대기적 삶을 계기적으로 분절시켰던 ‘사건화된 장면’들이 시간의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는 역전적 시간 구성을 통해, 장면과 장면을 몽타주 수법으로 편집하면서, 기억과 기억 사이를 빠르게 “지나간다.”

“딸내미가 환한 얼굴로 살아가고 있다 다행이다 지나간다(...) 딸내미에게 용서를 구하는 내가 있다 지나간다/ 나는 나로 살겠다고 다짐하던 몽골초원 자작나무 지나간다/ 권정생 선생이 살아나고 나는 서울이다 지나간다(...)/ 아버지가 술 배달을 하고 있다 나는 모른 척 지나간다/ 시를 접고 공사판에서 오비끼를 나르는 나를 지나가고/ 없는 아내가 있다가 사라진다 지나간다(...)/새새어머니의 빗자루가 지나가고 새엄마가 칼을 맞고 있다/ 지나간다 엄마 같던 새엄마가 햇감자를 쪄 주던 1974년 생일날, 지나간다/ 무덤에서 나온 엄마가 병원에 누워있다 지나간다(「생명선에 서서」 부분)” 

이렇게 “영원히 화해하지 못할 그 길을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가서/ 나는 나를 다시 이순의 언저리에 세워본다”. 제목에서의 “생명선”이라는 표현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로서, 시인이 자신의 “이순 언저리”에 대한 현재적 인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난 세월 동안 그가 지나온 사건들과 장소들은 모순적 정념들이 잡거(雜居)하고 있는 삶 자체이다. 즉 그 속에는 “떠나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돌아오는 것들”이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나타나는 것들”이 있다. “그늘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햇살바른 것들”이 있고, “절망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희망하는 것들”도 인접해 있다. 
 
이것은 삶이 충일한 모순의 복합체라는 것을 시인이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의 회상적 감각과 인식 속에서, 그것에 불가피하게 혹은 필연적으로 삼투되어 있는 모순을 객관화된 시선으로 관조할 수 있는 회상적 거리가 확보되어 있다는 것이야말로, “생명선”에 선다는 것의 성숙한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안상학의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은 지나온 날들을 모두 ‘어제’로 부르는 고비 사막에서의 경험과 인식을 쓴 시 「고비의 시간」을 표제로 한 시집이다. 이때 “고비”는 물리적 장소와 마음의 역학 모두에 대한 중의적 표현이다. “모든 지나간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나날들을 어제와 내일로 셈”할 수 있는 압축적 인식을, 회상적 정념 속에서 유려하게 소환하는 이 시집을 읽어가면서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 살았으니, 어제와 내일이 한 권의 시집 속에서 맞춤한 한 몸이 되었구나. 차가운 이 가을에 즐비한 절창을 음미할 수 있어 좋구나. 훌륭한 시집이다.


이명원·경희대 교수/문학평론가

현재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균관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최일수 문학비평 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해왔다. <비평과전망> <내일을여는작가> <실천문학>의 주간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타는 혀>, <해독>, <파문>, <연옥에서 고고학자처럼>, <종언 이후>, <시장권력과 인문정신>, <두섬: 저항의 양극, 한국과 오키나와> 등이 있다. 상상비평상, 성균문학상, 한국출판문화상(저술 부문)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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