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헤겔의 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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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과 헤겔의 군주론
  • 서규환 인하대 명예교수·정치학
  • 승인 2020.10.25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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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규환 칼럼]

문재인 대통령은 조국 법무장관을 이제 놓아주자고 발언한 바 있다. 격한 비난들이 즉각적으로 일어났지만, 단순한 에피소드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짙어지면서 여론 중심에서 사라져 버린 듯하다. 문재인은 조국을 개인적으로 총애한다거나 양자 사이의 사적인 친밀도 그리고 그와 관련된 얘기들이 그 담화와 더불어 부상했지만, 담화 의미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지 않은 채 빠르게 시들어버렸다.

대통령 담화는 깊은 의미론적 맥락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담화는 대통령 담화 그 자체로써 국민들이 그 합리적 타당성 논의를 초월하여 받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의식 사고, 적어도 그 한 자락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고 있는 맥락이다. 헤겔이 <법철학>에서 군주에 대해 논술했던 맥락이 상기되었다: 합리적 토의와 숙의에도 불구하고 논란이 해결되지 않고 분쟁이 격화하기만 할 때 군주는 ‘그것이 짐의 뜻이노라’라는 담화 발표로써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결단을 내린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금 헤겔 군주론에 거론해야 할까? 첫째로 정치제도론적 맥락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민에 의한 정치를, 국민이 국가의 결정을 직접 결정하는 정치를 의미하는데, 오늘 현실에서는 이러한 민주주의가 온전하게 실현되고 있지 않다. 선진 민주국가들의 정체 형태도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을 혼합한 정체이다. 혼합정체 모델은 국가 정체가 군주정, 폭정, 귀족정, 과두정, 민주정, 중우정 그리고 다시 군주정으로 순환한다는 법칙을, 순환에서 일어나는 타락 정체들의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폴리비오스가 고안한 혁신적 사상에서 연원하고, 루소의 정치사상에서 다시 부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의 현실 민주주의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국민투표권제는 민주정 요소이고, 의회제는 귀족정 요소이고 그리고 일인최고결정권자제(대통령, 수상)는 군주정 요소이다. 둘째로는 학문사적 맥락 때문이다. 정치신학적 사상 연구가 재부상하는 경향에 주목해야 한다. 20세기 초반에 슈미트가 정치신학적 물음들을 던졌고, 그 반향은 넓게 퍼져 나갔는데, 최근에 슈미트 사상 재평가 분위기와 더불어 정치신학 회귀라 말할 수 있는 연구 동향이 부상했다. 그 가운데에는 벤야민의 저작들을 슈미트의 문제 제기에 따라 다시 읽는 아감벤의 강한 영향력도 있다.

물론 그 담화 발언은 헤겔 군주론에서 말하는 자연적 결단과는 다른 측면이 있다. 조국 사건은 의회와 정당들, 그리고 시민사회에서 숙의와 토론의 과정에, 무엇보다도 사법부의 재판과정을 밟고 있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헤겔의 법철학에서 작동하는 정치신학 사상에서 문제를 제기해 볼 필요가 있다. 대통령은 자연과 정신, 신과 인간을 잇는 역할을 한다는 정치신학적 군주론의 군주의 대체라 무의식적으로 사유한 결과, 그 실착이 아닌가 하는 의문.

헤겔은 입헌군주제에서의 군주의 역할이 고대 그리스 공화정에서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준거했던 동물의 내장이나 조류의 비행 등의 양태에 비교하고, 군주의 결단은 자신 이외의 다른 인물들의 외부 지지들을 참조하지 않는다 한다: 군주의 결단은 군주의 순수한 주체성의 “자연적” 담화이기 때문이다. 이런 한에서, 헤겔은 루소의 인민(국민)주권론 이후에 등장했지만 군주주권론에서 실체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아무튼 헤겔연구사에서 헤겔의 군주론은 국가주의를 정초하고 있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점을 이 맥락에서 지적해 두어야겠다.

국가주의는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에 등장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 소련, 독일과 일본의 군국주의적 파시즘, 이른바 구 사회민주주의적 유럽, 주체사상의 북한, 저발전 국가의 개발독재형 국가주의 등. 문재인 정부가 물론, 박정희 정권 시대의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를 단순하게 반복하고 있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몇몇 정책들, 특히 부동산정책에서 그러하지만 국가주의 징후를 확인할 수 있다. 권위주의적 국가주의에 저항했던 민주화 운동권 주체들이 지배 권력 중심부를 차지했는데 자신의 국가주의를 깨끗하게 청산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떠한 형태의 국가주의이든 그 정점에는 최고 통치자의 총체적 권위와 복종 군중심리가 작동한다. 그리고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이 “제왕적” 대통령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 길은 열려 있다.

그리고 끝없는 논란과 분쟁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킬 결단은 궁극적으로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 그것이다. 우리의 헌법은 인민주권론을 선포하고 있다.


서규환 인하대 명예교수·정치학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후, 독일 빌레펠트(Bielefeld)대학교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 클라우스 오페(Claus Offe)교수로부터 비판이론을, 역사이론의 거장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교수로부터 역사의미론을 사사했고, 정치학 및 사회학을 전공하여 사회과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현대성의 정치적 상상력』(1993), 『비판적 현대성의 정치적 이론』[증보판](2011), 『정치적 비판이론을 위하여』[증보판](2011), 『박인환, 정치적 메타비판으로서의 시세계』(2008), 『열린총체성의 해석과 정치』(2009), 『더 많은 민주주의와 비판시민사회』(2010), 『비판적 시대정신』(2011), 『비판적 위기학의 정치와 정치적 이론』(2012), 『시각언어의 비판, 서양미술작품의 정치의미론 1』(2013), 『시각언어의 비판, 서양미술작품의 정치의미론 2』(2014), 『정치적 모랄리아 1: 레비나스』(2017), 『정치적 모랄리아 2: 슈미트와 벤야민 사이, 아감벤』(2018) 등이 있다. 계간 황해문화 초대편집주간, 인하대 교학부총장, 인하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인하대 명예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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