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깨달음은 토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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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의 깨달음은 토론이다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0.09.2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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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학문의 깨달음은 홀로 얻는 것 같다. 남들과 멀리하고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결단을 고독하게 내려, 설명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보물을 찾아냈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이 올 때에는 이렇게 오지만, 온 것을 잡아내 형체가 있도록 하려면 정신을 차려야 한다.
 
깨달음이 오게 된 연유를 생각하면, 다른 말을 해야 한다. 깨달음이란 남들과 함께 풀려고 한 의문에 대한 획기적인 해답을 얻어, 진행되고 있는 토론을 크게 진척시켜 효력을 입증하는 행위이다. 깨달음을 가능하게 하는 두 축 문제의식과 집중력 가운데, 문제의식은 남들과 공유하고, 해결을 위한 집중력 발휘는 내가 한다. 양쪽이 따로 놀면서 또한 긴밀한 관계도 가져, 학문을 여럿이 하면서 홀로 하고, 홀로 하면서 여럿이 한다.

여럿이 하고 있던 작업을 깨달음을 얻는 과정에서는 홀로 크게 진척시켜, 얻은 것을 토론 거리로 삼고 다지면서 여럿이 함께 앞으로 나아간다. 학문을 홀로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공동 작업을 더 잘 하자고 하는, 더욱 진전된 깨달음을 실행하려고 토론을 한다.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를 들어 말하면, 돈오한 의의를 확인하면서 얻은 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점수 확대를 위해 중지를 모으려고 토론을 한다.

토론은 하려고 하면 언제나 잘 되는 것은 아니다. 통상적으로 하는 강의에서는 학생들이 지식 전달을 받아들이면 된다고 여겨 토론의 불이 붙기 어렵다. “무슨 말을 하는지, 어디 한 번 들어보자.”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를 부른 낯선 청중과 만나야 열띤 논란을 할 수 있다. 토론의 성패를 결정하는 더 중요한 요인은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정도이다. 문제의식 공유가 모자라면 상극을 확인하고, 충분하면 상생의 결실을 얻는다. 몇 가지 기억할 만한 사례를 들고 고찰한다. 득실이 엇갈리는 경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가) 1994년에 내가 생극론(生克論)을 깨달았다는 말을 하고 다니는 것이 알려져, 중진 철학 교수 10인이 발표를 듣겠다는 자리를 마련했다. 엄청난 행운을 얻었다고 감격하면서, 할 말을 잘 가다듬었다. 문학사를 어떻게 쓸 것인지 고심하다가 발견하고 활용한 생극론을 역사철학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변증법이 상극에 치우친 편향성을 상극이 상생이고 상생이 상극임을 밝혀 시정하고, 계급모순과는 다른 민족모순을 해결하는 지침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는 말에 대한 반응은 기대 이하였다. 지나간 시대의 유물인 거대이론을 되살리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는 말을 하기나 했다. 철학알기를 철학으로 여기고, 문제의식을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나) 2015년에 경주국립박물관에 초청되어 가서 일반 시민을 상대로 <삼국유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강연을 했다. 독서의 방법에는 빠지면서 읽기, 따지면서 읽기, 쓰면서 읽기가 있다. 책에 따라서 독서 방법이 이처럼 한 단계씩 높아진다고 하는 깨달음은 전에 이미 얻었으나, 이를 두고 토론하는 강연은 처음 했다. <삼국유사>는 생략된 연결을 메우고, 말이 되지 않는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아내면서 읽어야 할 책이므로 독자가 자기 나름대로 고쳐 쓰면서 읽도록 하니 얼마나 신이 나는가. 고명한 석학이 더 잘 안다는 말에 속지 말고, 누구나 자기 창조력을 마음껏 발현하자. 이렇게 말하니 청중은 각기 자기가 해온 쓰면서 읽기를 재평가하는 안목을 그동안 생각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내 말을 자기 말로 삼았다. 깨달음의 의의를 서로 확인하고 확대하는 큰 성과를 얻었다.

(다) 2018년에 서울대학교 국문과 박사과정에서 특강을 했다. 정년퇴임을 하고 14년이 지난 다음에 얻은 소중한 기회여서, 전에는 없던 새로운 방식을 마련했다. 한 주일에 하나씩 나의 주저를 하나씩 들고, 어떤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돈오를 어떻게 얻고, 점수를 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살피자고 했다. 학생들이 먼저 자기 소견을 발표하면 응답하면서 내 생각을 말하고, 얻은 결과를 정리해 앞으로 할 일을 제시했다. 수강하는 학생들은 문제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협소하고, 엄청난 작업을 두렵게 여겨 적극적으로 호응하지 않았다. 공개 강의를 한 덕분에 밖에서 온 탐구자들이 토론을 확대해 소출이 어느 정도 늘어난 것을 보람으로 삼는다.

(라) 2020년에 서울문화재단에서, 우리 공연예술 계승자들이 듣고 싶은 강연을 해달라고 나를 불렀다. 기쁜 마음으로 준비를 하는 동안에 한 소식이 왔다. 판소리, 탈춤, 가야금 산조 등이 간직한 우리 공연예술은 청중과 창작을 함께 하는 대등창작의 원리를 지닌 것을 소중하게 평가하고 이어받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다. 청중과 대등창작을 방식으로 강연을 진행해, 이런 깨달음을 모두 함께 온몸으로 얻었다. “인류 역사는 차등과 대등의 싸움으로 이어져 왔다”고 하고, “차등예술을 대등예술로 바꾸어놓고, 인류를 위해 크나큰 기여를 하는 혁명을 일으키자”고 끝으로 말한 것이 공동의 결의가 되었다. 문제의식을 깊이 공유하고 바람직하게 해결하기 위해, 집중력을 가지고 분투하는 동지들을 만나 상생을 확보한 성과가 엄청나다.  

(가)ㆍ(다)ㆍ(나)ㆍ(라)로 순서를 바꾸어놓으면, 나빴다가 좋아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는 깨달음을 무효로 만들 수 있으니 경계해야 한다. (다)는 교수가 가련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강의의 부담이 면제되는 연구교수가 될 수 있기를 바라다가 정년퇴임을 해서 자유를 얻은 것이 다행임을 새삼스럽게 알아차린다. (나)에서 알았다. 학문을 하지 않는 일반 시민은 지식을 얻어 써먹으려고 하지 앉으므로 진정한 탐구를 바란다. 이에 응답하는 학문을 해야 한다. (라)에서 만난 전통예술 계승자들은 문제의식과 집중력을 겸비하고 깨달을 얻어 실천하는 주체여서 세상을 깨우치는 데 동참해야 학문도 살아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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