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도토스 〈역사〉: 역사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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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 〈역사〉: 역사의 탄생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9.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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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17강>_ 김경현 고려대 명예교수의 「헤로도토스 <역사>」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17강 김경현 교수(고려대 명예교수) 강연의 서론과 결론부를 발췌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김경현 교수는 헤로도토스가 왜 서양에서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는지, 즉 그가 “어떻게 역사라는 새로운 장르를 발견했는가”를 오랜 기간에 걸친 사학계의 논쟁과 함께 그의 저작인 『역사』 소개를 통해 답한다. 무엇보다 『역사』란 책이 “헤로도토스 개인이 탐구한 것”이자 “신들이 퇴장한 역사적 공간에 대한 서사”라는 점이 눈에 띈다고 지적하는데, 이는 헤로도토스 스스로 “페르시아의 전제주의에 맞설 수 있는 그리스인의 힘으로 간주한 자유와 평등이란 정치 이념의 확산”과 “기원전 6세기 이래 경험과 추론에 입각한 지식 체계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존의 신화적 인식을 밀어내고” 있던 지적 풍토에 큰 빚을 진 결과라고 말한다. 이 같은 배경에 힘입어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그리스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호메로스 서사시를 모델로 삼아 창조적으로 모방”한 끝에 차별화된 연구 방법과 서사 기법으로 “새로운 문학 형식”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고 얘기한다.

▲ 지난 8월 29일, 김경현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8월 29일, 김경현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17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사학사에서 헤로도토스의 위치

1950년대 말 독일의 고전학자 샤데발트는 헤로도토스를 주제로 삼은 대학 강의에서 이렇게 서두를 시작했다. “먼저 한 가지를 말해둬야겠다. 매우 놀랍게도 헤로도토스는 현대의 연구에서 오랫동안 실질적 가치와 의의를 인정받지 못해왔다. 심지어 역사가의 지위조차 인정받지 못할 정도였는데, … 나이브하게 현대의 기준을 그 고대작가에게 부과한 것이 주요 이유였다.”

샤데발트가 지적한 나이브한 시대착오는 문헌 비판의 방법론을 구비하고 과학적 역사를 표방한 19세기 이래 근대 역사학의 풍토에서 배양된 것이었다. 문학으로서의 역사는 급속히 퇴조했고, 연구와 서술에서 비판, 분석, 논증을 중시하는 경향이 대세를 이루었다. 고대사 분야도 예외일 수 없었고, 헤로도토스에 대한 평가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었다. 독일의 고전학자 폴렌즈가 쓴 책은 『역사』를 기원전 5세기의 문화ㆍ정치적 맥락에서 해설한 것으로, 오늘에 보면 실로 외경심을 자아내고, 또 최초로 주석 작업을 시도한 영국의 고전학자 곰므는 『역사』를 문학으로 다룰 필요를 역설했다. 하지만 모두 광야의 외침 같았다. 영향력은커녕 아무런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오히려 『역사』 (특히 전반부)의 현란한 정보들이 대부분 문학적, 수사적으로 구성된 것(즉 허구)이며, 관련 지역들을 두루 여행했다는 헤로도토스의 주장도 믿을 수 없다는 연구가 속출했다. 급기야 비슷한 부류의 시도들을 모아 ‘거짓말쟁이 학파(Liar School of Herodotus)’라 명명하고, 그를 비판하는 단행본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역사』가 거짓말 혹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의 혐의에 시달린 것은 반드시 근대 역사학, 문헌학의 기준 때문만은 아니었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의 아버지(pater historiae)’라는 명예 칭호를 처음 사용한 것은 기원전 1세기 로마의 문필가 키케로였는데, 흥미롭게도 그 문맥은 이런 것이었다. 역사의 기준은 시와 달리 진실이지만, “역사의 아버지인 헤로도토스에게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fabulae)이 허다하다.” 라틴어 fabula는 그리스어 mythos에 상응하지만 더 넓게 불합리한 이야기라는 의미를 포괄하는 단어였다. 방점은 역사의 아버지보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 판단은 키케로의 다른 글들에 비친 단상들과 대체로 부합한다. 한 곳에서는 로마의 서사 시인보다 헤로도토스를 더 믿을 이유가 있는지를 반문했고, 다른 곳에서는 ‘격류 없는 평온한 시냇물’ 같은 문체를 헤로도토스의 최대 장점으로 꼽았다. 분명 키케로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나아가 ‘헤로도토스는 어째서 역사의 아버지인가?’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키케로는 대체 어디서 ‘역사의 아버지’라는 개념을 습득한 것일까?

헤로도토스보다 2세기쯤 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역사’를 다룬 방식이 그 단초였으리라 짐작된다. 거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에 지식과 기예의 지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역사는 철학이나 시(서사시와 극시)처럼 보편적인 메시지가 없으며, 그저 시간 외에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을 모아놓는, 말하자면 독립적 장르로 볼 수 없는 글쓰기 형식이었다. 그 사례로 헤로도토스가 거론되었다. 그러니까 헤로도토스는 과거를 다루는 미숙한 산문 형식인 ‘역사’의 전범(典範) 쯤으로 간주되고, 그런 인식이 수세기 후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로 정식화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이 정식화에서 간과하지 말 것은, ‘역사의 원조(princeps historiae)’(이 역시 키케로의 문구이다) 헤로도토스의 책에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많다는 인식에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런 불신은 헤로도토스 당대부터 그에게 부착된 낙인이었다. 고대에는 같은 장르에 속한, 혹은 적어도 비슷한 논제를 다루는 후배가 선배를 의식하면서 논쟁 혹은 험담을 하는 것이 상투적 수법이었지만, 헤로도토스의 경우에는 ‘역사’가 비체계적인 데다가 초창기여서 더 집중적인 표적이 되었을 것이다. 채 반세기도 지나기 전에 후배들은 그가 거짓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일삼는다고 비난했고, 새로운 문학 형식의 창안자라는 공로는 그에 압도되고 말았다.

그리스어와 그리스 문학을 몰랐던 르네상스기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가, 『법률론』에서 키케로가 헤로도토스에 대해 ‘역사의 아버지이지만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모순된 태도를 취한 점을 의아해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로서는 의문을 품는 것 외에 달리 할 것이 없었고, 전근대 내내 그런 모순된 태도가 풍미했다. 그리고 연구와 서술의 엄격하고 비판적인 방법을 금과옥조로 삼은 19~20세기의 근대 역사학에 의해 헤로도토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욱 심화되었다. 오히려 투키디데스를 ‘역사의 아버지’로 부르고 싶다거나, 아니면 최초의 진정한 역사가로 봐야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2500년이나 지속된 헤로도토스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20세기 후반부터 크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반전의 동인은 크게 두 가지였고,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에 준 충격이 가장 중요했다. 역사는 하나의 과학이라는 근대적 신화를 떨쳐버리고, 오히려 문학ㆍ수사학에 더 가깝다는 인식 변화를 배경으로,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역사학ㆍ문헌학의 비판적 방법을 적용하는 대신, 그냥 하나의 온전한 작품으로 다루려는 경향이 대두했다. 특히 영어권 고전학자들이 도입한 서사 기법(narratology) 연구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 또 다른 계기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이행기 그리스 문화에서 배양된 것, 특히 문해력(literacy)보다 여전히 구술성(orality)이 우세한 문화의 산물로 접근하면서 얻어진 성과였다. 예컨대 반시나의 『구전 전승』처럼 식민지 시대 아프리카의 구전 전승과 역사 기술의 관련을 비교 자료로 활용하면서, 『역사』를 더 이상 근대적 시선이 아니라 당대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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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헤로도토스는 왜 역사의 아버지인가?

일찍이 저명한 고전학자 모밀리아노는 기원전 5세기에 유대인과 그리스인이 공히 페르시아 제국의 충격 속에서 강력한 정치적(혹은 민족적, 심지어 민족주의적) 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었던 점에 주목했다. 그런 공동체 의식의 고양을 잘 구현한 것이 바로 역사 서술의 탄생이었다. 신명기적 역사라 불리는 『구약성서』의 역사서들(「여호수아」부터 「열왕기 상, 하」까지)과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그것이다. 그들은 분명 근동의 오래고 다양한 과거 기록의 형식들과 판이했다. 그저 통치자들만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가 주체였으며, 또 서사적이라는 점이 달랐다. 역사 기록이 아니라 역사 서술이라 부를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구약의 역사서들과 헤로도토스의 『역사』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었다. 우선 역사서 생성의 객관적 조건이 달랐다. 유대인은 민족의 땅(Eretz Israel)을 상실한 가운데, 야훼 신앙을 강화하는 종교 개혁을 통해 민족을 구원하려 했고, 역사서 편찬은 그 일환이었다. 반면 『역사』는 페르시아 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자긍심 속에서, 그리스인(Hellenes)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 영광을 기리기 위해 쓴 것이었다. 역사 서술의 형식과 내용도 근본적으로 달랐다. 유대인의 역사서들은 여러 저자들이 협력한 편찬물이며, 야훼가 민족사를 주관하는 서사였다. 반면, 『역사』는 헤로도토스 개인이 탐구한 것이며, 신들이 퇴장한 역사적 공간에 대한 서사였다.

헤로도토스가 그런 식으로 그리스 역사 서술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내부의 정치적ㆍ문화적 환경 덕분이었다. 정치적 환경이란, 헤로도토스가 페르시아의 전제주의에 맞설 수 있는 그리스인의 힘으로 간주한 자유와 평등이란 정치 이념의 확산이었다. 다시 말해 폴리스 구성원들(즉 시민)이 ‘정치적인 것’에 대한 각성을 통해 민주화 격동을 겪은 결과였다. 그리스 역사 서술의 탄생이 여기에 기인한다고 강조한 독일의 고대사가 마이에르의 주장은 일면적이지만 타당하다. 한편 문화적 토양, 즉 이오니아에서 일어난 지적 혁명의 영향도 중요하다. 기원전 6세기 이래 경험과 추론에 입각한 지식 체계가 인간과 세계에 대한 기존의 신화적 인식을 밀어내고 있었다. 요컨대,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배양한 객관적 조건은 크게 세 가지였다. 최근에 겪은 대사건(페르시아 제국의 그리스 침공), 그 충격 속에서 자각한 그리스 문명의 정체성(자유와 평등을 중시하는 폴리스의 세계), 탈신화적인 지적 풍토가 그것이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그 속에서 그리스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호메로스 서사시를 모델로 삼아 창조적으로 모방한 것이었다. 대서사에 어울리게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전쟁을 주제로 삼되, 역사적 공간에 한정했다. 크로이소스 왕의 이오니아 침공에서 크세륵세스 왕의 그리스 침공까지가 서술 범위였다. 그 역사적 공간에 대한 정보는 부득이 직접 탐구로 수집해야 했는데, 그것이 바로 『역사』의 창의성의 원천이었다. ‘역사(history)’라는 단어가 탐구(historie)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문학 형식을 실험한 그의 어려움은 만만치 않았고, 그래서 부단히 호메로스 서사시를 참조했다. 작품 전체의 구도는 물론 서사 기법에 이르기까지 모방의 흔적이 역력하다. 특히 구술 문화가 우세한 창작 여건 때문에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비그리스인의 세계에서 대체로 구술 정보를 수집했고, 또 『역사』를 집필하는 대로 청중에게 낭독했다. 구술 문화의 탁월한 유산인 호메로스 서사시는 매력적인 참고서였다.

『역사』에 지배적인 사건의 인과론은 단순하고 비합리적인 응보주의였다. 바꿔 말해, 인간의 동기와 행태의 패턴에 입각해 사건의 인과 관계를 설명하는 경향이 매우 약하다. 이 한계는 그가 다룬 역사적 공간을 구성하는 지역들의 자연과 주민들의 이질성과 다양성을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게다가 응보주의는 『역사』의 주제인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의 전쟁을 일관성 있게 설명하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최초로 그리스인을 정복한 크로이소스의 멸망 이야기가 『역사』의 첫 부분을, 그리고 최후로 그리스를 침공한 크세륵세스의 참패를 마지막에 배치한 것은 아주 의도적이었다.

물론 헤로도토스는 그리스인의 자유와 평등의 이념이 페르시아의 침공을 막아낸 저력이라는 점을 알았고 또 그것을 강조했지만, 그것을 치밀한 인과 관계로 논증하지는 않았다. 『역사』는 페르시아 제국을 물리친 그리스 민족의 정치적 자각, 그리고 그 영광을 기리는 작품으로 기획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체 서사를 압도하는 흐름은 아시아의 오만한 전제 권력의 형성과 파산이다. 그리스 청중은 아시아 세계를 잘 몰랐고, 또 헤로도토스는 그 넓은 세계를 직접 누비며 수집한 엄청난 정보를 어떻게든 『역사』에 담으려 한 결과였다. 하지만 핀리가 온당하게 지적했듯이, 헤로도토스의 그런 의욕이 아니었다면 현대의 페르시아사 연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역사를 낳은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그리스 세계의 협소한 역사 공간을 다룬 후배 역사가 투키디데스처럼 엄정하고 권위적 방식으로 정보를 추려 버렸다면 큰 손실이었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콜링우드가 『역사의 이념』에서 두 역사가를 비교한 문구를 상기시키고 싶다. “헤로도토스의 문제는 쉽고, 즉흥적이며, 설득력이 있다. 투키디데스의 문제는 드세고, 인위적이며, 거부감을 준다. 투키디데스를 읽으면 이렇게 자문한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 이 자는 대체 왜 그런가? 내 대답은 이렇다. 그는 비양심적이다. 그는 역사를 역사가 아닌 것으로 변질시켜 역사 쓰기를 정당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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