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 사회의 형성과 여성의 변화…여성에게 근대란 어떤 시대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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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 사회의 형성과 여성의 변화…여성에게 근대란 어떤 시대였나
  •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사회학
  • 승인 2020.09.1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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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

■ 책을 말하다_ 『근대 여성 12인, 나를 말하다: 자서전과 전기로 본 여성의 삶과 근대』 (김경일 지음, 책과함께, 336쪽, 2020.07)

한국 여성의 근대는 근대와 근대성이 내포한 남성중심성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한국 여성에게 근대는 남성 중심주의와 식민주의의 극복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가지는 것이었다. 후자와의 관련에서 보면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실학, 자주적 근대화와 같은 능동과 주체의 요소도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식민주의에 의해 강요된 근대 역시 부인할 수 없다. 개성과 인격의 집약으로서 단발을 보면 1895년 김홍집 내각에 의한 단발령이 남성을 대상으로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된 것이라고 한다면, 여성의 단발은 이보다 늦은 1920년대에 여성 스스로의 자발성과 주도성에 의해 단행되었다. 사회운동의 주류를 이루는 사회주의 여성이 여성 인구의 다수를 이루는 여성의 정서를 고려하여 전통의 결발(結髮)로 다시 돌아가기는 했다 하더라도 단발을 통해 나타난 근대의 표상은 이처럼 자율과 주체라는 점에서 성에 따라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당시의 세계 추세였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 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부장의 남성 중심주의에 동시에 도전해야 한다는 점에서 여성의 근대는 그만큼 주체적이고 집단적인 노력과 투쟁이 요구되는 지난한 일이었다.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도전과 관련하여 모든 여성이 동일한 양상의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다. 이념으로 보자면 역사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의 여성들은 자유주의나 보수주의에 비해 보다 더 그것을 적극 비판하였고, 또 그에 도전해 왔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보수주의 여성들이 가부장제로부터 자유로웠다거나 그로 인한 피해자 역할에서 면제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가부장의 남성 중심주의와 관련한 자유·보수주의 여성의 입장은 이러한 점에서 자못 징후적 복합성을 보인다. 우선 이들은 가부장 남성의 억압을 스스로 내재한 상태에서 다음 대에서 되풀이하는 것을 통해서 ‘앙갚음’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해소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체념과 포기의 상태에서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삭여야 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사회나 해방 이후 남성 중심의 주류사회에서 민족과 사회,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국가를 표방한 여러 단체와 행사들에 활발히 참여하면서도 이들 마음의 기저에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한 짙은 회의와 궁극의 절망, 그리고 때때로 깊숙이 빠져들곤 했던 자기 연민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말을 하지 못하는 존재로서 살아야 했던 여성 중에서 가장 먼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이 층에 속하는 여성이었다. 여기에서 말을 한다는 것이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으로서의 언어라기보다는 말과 글을 통한 자아의 표명과 주장을 의미한다고 한다면, 근대로 이행하면서 스스로를 말할 수 있는 여성은 그나마 자유주의 계열의 범주에서 가장 먼저 온전한 형태로 출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들 여성의 자서전이나 전기가 가지는 의미가 있다. 근대 문명 일반과 마찬가지로 글을 통한 자아표현으로서의 전기와 자서전 쓰기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남성들이 전유해 왔다. 기억과 시간의 지속 안에서 자신의 삶을 영원히 남기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배제된 여성이 자신의 삶의 궤적에 의미를 부여하게 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 비로소 가능했다. 소수의 한정된 중상층 지식인 여성 중에서도 이념으로 보면 자유·보수주의 여성들의 그에 대한 글쓰기가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빈도를 보인다.

근대 여성 12인 나를 말하다에서 필자가 주로 자유주의 계열에 속하는 12인의 여성의 자서전과 전기를 선정하여 검토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이후 시기의 이른바 교육받은 여성들의 비중이 더욱 높아지는 시기에 교육과 종교, 언론, 독립운동, 여성운동, 사회사업과 예술 활동 등의 영역에서 주로 활동한 여성을 대상으로 이들에게서 나타난 여성의식과 민족 인식, 사랑과 결혼, 가족과 모성의 4가지 주제를 분석한 이 책에서 필자는 주로 신여성 연구에 치우쳐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어 온 자유주의 근대 여성 계열이 한국의 페미니즘 역사에서 지니는 의미와 한계를 해명해 보고자 하였다.     

2010년대 후반기 이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과 젠더 문제의 사회적 확산은 놀랄만한 속도의 진전을 보여 왔다. 2015년 메갈리아의 탄생, 2016년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과 이후에 이어진 성폭력 고발, 미투 운동의 지속, 그리고 2018년 혜화역 항의 집회 등 일련의 사건을 배경으로 페미니즘 리부트(feminism reboot)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현상이 출현했다. 온라인으로 접속하고 오프라인의 시위 현장에서 서로 소통하는 영영 페미니스트(young-young feminists)의 등장은 남성 지배 사회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국 페미니즘의 폭넓은 스펙트럼과 더불어 그에 수반한 복합적 모순의 양상을 동시에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페미니즘은 자신의 역사에는 짐짓 무관심하거나 사실상 그것을 방치해 온 측면도 아울러 존재한다. 설령 역사라 하더라도 그것이 신여성과 같은 특정 주제에 집중되어 있어서 연구의 폭과 주제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 있는 경향을 보인다. 역사와 이론이 따로 가는 이러한 이중구조와 더불어 양자 사이의 불균등 발전은 서구와 비교해 볼 때 자생의 토착 이론의 근원이자 기조로서의 역사에 대한 이 분야 연구자들의 관심과 주의를 촉구하고 있다. ‘케이 페미니즘(K-feminism)’으로서 한국의 페미니즘이 세계 페미니즘과 동시성을 획득했다는 최근의 평가가 제대로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의 페미니즘은 자신의 고유한 역사 전통에 대한 내재성과 주체성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사회학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거쳐 동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덕성여대 교수, 뉴욕주립대(Binghamton)와 프랑스 파리 인간과학연구소(Maison des Sciences de L'Homme)에서 후기박사과정, 일본 동경대학 경제학부 객원연구원, 버클리대학, 워싱턴대학 교류교수 등을 역임했다. 한국사회사와 사회사상, 역사사회학, 동아시아론 등에 관심이 있으며, 여성과 노동 문제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일제하 노동운동사』,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제국의 시대와 동아시아 연대』,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한국 근대 여성 63인의 초상』(공저), 『신여성, 개념과 역사』, 『Korean Women: A Sourcebook (공편)』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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