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삼각형으로 풀어본 20세기 문학이론
상태바
기호삼각형으로 풀어본 20세기 문학이론
  • 임홍배 서울대·독문학
  • 승인 2020.08.23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역자가 말하다_ 『한권으로 읽는 문학이론: 소쉬르부터 버틀러까지』 (올리버 지몬스 지음, 임홍배 옮김, 창비, 295쪽, 2020.06)
   
이 책은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에 재직 중인 독문학자 올리버 지몬스(Oliver Simons) 교수의 『문학이론 입문』(Literaturtheorien zur Einführung, 초판 2009, 개정증보판 2014)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은 기존의 문학이론 입문서와 달리 이론의 분류체계부터가 독특하다. 언어학과 기호학에서 ‘기호삼각형’이라 불리는 기호ㆍ의미ㆍ지시대상의 관계를 기본적인 분류기준으로 삼아 특정한 이론이 세 항목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는가에 따라 크게 세 유형으로 나누고 있다. 이런 분류방식은 특정 이론의 위상과 강조점을 기호삼각형이라는 시각적 모형에 따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아울러 세 항목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일견 서로 배타적인 듯한 이론들 사이의 상관관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이것 또한 종전의 문학이론 입문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징이다.

▲ 원저자_ 올리버 지몬스와 책표지
▲ 원저자_ 올리버 지몬스와 책표지

기존의 문학이론 입문서들은 대개 특정 방법론의 주요 내용을 요약해서 독자의 쉽고 빠른 이해를 도모하는 경우가 많다. 그와 달리 이 책에서는 해당 이론가의 사고체계와 특징적인 글쓰기 방식이 응축된 텍스트의 핵심 부분을 인용하여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해당 이론이 어떻게 형성되고 전개되는가를 발견하고 저자의 생각을 함께 따라갈 수 있도록 서술하고 있다. 이론을 요약해서 작품분석의 도구로 써먹기 쉽게 정리한 교과서식 서술을 과감히 탈피하여 독자가 능동적으로 텍스트 읽기와 사고에 동참하도록 유도하는 서술방식이 돋보인다.

‘의미의 이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제1부에서는 해석학의 범주에 드는 사상가들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길게 인용된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에서 하이데거는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경구로 간주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을 현대 독일어로 번역하는 일이 고대와 현대 사이를 갈라놓은 깊은 낭떠러지를 건너뛰어야 하는 아찔한 모험만큼이나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저자가 이 말을 인용하는 까닭은 이것이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 번역과 해석에만 적용되는 예외가 아니라 문학작품에 대한 해석의 난관으로 일반화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비판이 제2부에서 다루어지는 라캉이나 데리다의 사고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는 것을 미리 환기하기 위함이다. 1부에서 짧게 다루어지는 페터 손디(Peter Szondi)는 독문학자가 아닌 한국의 문학 전공자에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여기서 인용된 손디의 슐라이어마허 해석을 보면 해석학의 창시자라 할 수 있는 슐라이어마허의 사유가 20세기 구조주의의 발상과 근접한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사례에서 보듯이 독자는 ‘의미’와 ‘기호’와 ‘지시’라는 상이한 범주로 분류된 사상가들 사이에 어떤 상관성이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있다.

▲ 20세기 문학이론의 계보
▲ 20세기 문학이론의 계보

‘기호의 이론’을 다루는 2부는 정신분석과 구조주의 그리고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을 포괄한다. 2부의 서술체계에서 프로이트를 맨 앞에 놓은 것은 단지 연대기적 순서 때문만은 아니다. 프로이트 자신은 소쉬르의 언어학을 몰랐지만, 프로이트는 꿈에 나타난 ‘그림 수수께끼’의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그 수수께끼에 대한 ‘해석’만 존재하며 원칙적으로 꿈 해석은 종결될 수 없다고 보았다. 프로이트의 이런 생각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자의적이라는 소쉬르의 생각을 함축하는 동시에 나중에 라캉이 말한 ‘미끄러지는 기표’라든가 데리다가 말한 ‘차연’(差延) 개념을 선취하는 통찰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한물 간 정신분석가로 치부되기도 하는 프로이트를 그런 이유에서 2부의 첫머리에 배치하고 있다. 2014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프로이트를 1부에 넣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던지기도 하는데, 만약 그랬더라면 프로이트의 비중은 훨씬 축소되고 프로이트가 끼친 영향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시의 이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3부에서는 기호삼각형에서의 ‘지시대상’ 즉 현실의 맥락을 아우르는 사회ㆍ문화ㆍ역사ㆍ육체ㆍ매체를 다루고 있다. 20세기 후반 이래 문학연구는 이런 영역들을 두루 포괄하는 문화적 실천의 맥락에서 작품을 분석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마지막 3부에 지시의 이론을 배치한 것도 문학연구의 그런 추세를 반영한 셈이다. 2014년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소쉬르 이래 ‘언어학적 전회’(linguistic turn)에 기초한 이론이 20세기 중반 수십 년 동안 득세한 이후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다시 사회역사적 맥락에 주목하는 연구 방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설명을 염두에 두고 2부와 3부를 비교해보면, 3부에서 다루어지는 이론들은 대체로 2부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포스트구조주의 이후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는 이론들이다. 이것 역시 단지 연대기적 순서가 아니라 3부에서 다루어지는 이론들이 더 활기찬 도전임을 시사한다. ‘매체’가 3부의 마지막에 배치된 것은 지금 가장 첨단의 이론으로 부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첨단의 매체이론이 간과하는 맹점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예컨대 매체이론의 선구자로 주목받는 키틀러(Kittler)는 주로 문학작품에서 매체의 효과가 드러나는 부분을 다루지만, 그럴 경우 문학은 단지 매체의 역사를 예시하는 증거자료로 활용될 뿐 문학의 문학성 자체는 관심 밖으로 밀려난다고 저자는 비판한다. 백화제방의 이론들이 아무리 화려해 보여도 처음부터 끝까지 늘 관심에 두어야 하는 것은 문학의 문학성을 되새기는 일이다. 현실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이론을 탐구하되 무엇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늘 바탕에 살아 있어야 이론 공부도 내실 있게 될 것이다.


임홍배 서울대·독문학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괴테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괴테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울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독일 고전주의』, 『괴테가 탐사한 근대』, 『독일명작의 이해』(공저) 등이 있고, 번역서로 『젊은 베르터의 고뇌』, 『로테, 바이마르에 오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천사는 침묵했다』, 『어느 사랑의 실험』, 『세상의 끝』, 『변신ㆍ단식광대』(공역), 『진리와 방법』(공역), 『루카치 미학』(공역)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