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훈칠의 수채 풍경화- 무한성에의 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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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훈칠의 수채 풍경화- 무한성에의 투항
  •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 승인 2020.08.1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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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의 그림이야기]

“풍경은 고독한 사람의 내면이 만들어내는 것”(가라타니 고진)

@ 권훈칠, 방풍림_종이에 수채_28×42cm_1995
@ 권훈칠, 방풍림_종이에 수채_28×42cm_1995

권훈칠은 1980년대 초반에 부분적으로, 198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풍경화를 그렸다. 그의 풍경화에는 대부분 자연만이 등장한다. 하늘과 바다, 대지와 나무, 바위와 풀 더러 건축물이 들어와 있다. 사람은 부재하다. 있다하더라도 흡사 산수화의 점경인물처럼 매우 작아, 저 멀리 희박하게 자리하고 있다. 대부분이 수채화이고 유화와 파스텔이 더러 있다. 수채화의 경우 붓질을 단속적으로, 조밀하게 겹쳐 올리면서 차분하게 완성해나간다. 정밀하고 단단하고 투명하고 맑다. 신선하고 경이로운 자연의 어느 한 순간이 내 앞에서 조심스레 흔들리는 느낌이다. 풍경들은 모두 원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극적인 장면이나 드라마 없이 그저 고요하고 차분하다. 드라마 없는 풍경화, 드라마 없이 풍경을 보는 이의 시선이 감지된다. 이 드라마 없음이 그의 풍경화의 또 다른 특징이다. 금광지, 김포수로, 방품림, 여주강가, 정암 및 성산일출봉, 제주등대, 협재 해수욕장, 태종대 등의 구체적인 장소를 그렸지만 실은 하늘과 물, 나무와 풀이 주된 대상이다. 시간을 응고시키고 격렬한 흐름 속에 있는 자연의 어느 한 장면을 순간 건져 올려 서늘하게 부동의 것으로 만들었지만 여전히 자연의 미묘한 뒤척임이 감지되는 그런 풍경이다. 특히 <방풍림>(1995), <제주풍경>(2000)이란 제목의 풍경화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수채화와 유화는 동일한 기법으로 그려지고 있음도 주목된다. 나는 이 두 점의 풍경화가 좋다. 한국에서 그린 정적인 풍경과 동일한 시선으로 로마근교의 자연풍경이나 로마의 종탑, 로마시내 풍경 등도 그려졌다. 풍경을 저 멀리 밀고 나가고 있어서 광막하고 무한한 자연의 힘이 느껴진다. 자신의 고독을 자기 외부의 곳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 의해 가능한 풍경, 고독이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지점에서 포착되는 것과도 같은 그런 풍경이다.

작가는 자연의 어느 한 부분을 선택한 후 이를 멀리서 조망한다.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화면 끝까지 밀어 붙였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자연의 위용이다. 도저히 가둘 수 없는 막막한 자연의 크기가 느껴진다. 작가는 자연풍경을 원경으로 보여주는데 이는 대상의 그윽한 확장이자 아득한 물러남이다. 이 물러남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자연풍경, 자연의 형상을 뒤로 물리고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련의 장치다. 그로인해 자연스레 생각과 마음도 물러나고 멀어진다. 선인들은 이를 일컬어 청원淸遠이라 했다. 이는 담박淡泊하고 그윽한 경지를 가리키는 의경으로서, ‘물상세계의 아득한 청명함과 내면세계의 깊은 심경’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다. 자연을 통해 생명의 본성과 삶의 이치를 깨닫는 한편 자연을 통해 정신력을 높이는 내면화 작업이 동양의 학문이자 예술이었기에 가능한 개념이다. 예술 행위는 자연을 통해 내면을 성숙시키고 우주전체를 품는 존재로 나아가려는 노력에 해당한다. 이는 자연과 일체가 되어 인간세상의 영욕에 의해 때묻은 마음을 깨끗이 씻어 버림으로써 심미적 자유와 해방을 얻고자 한 것으로 이른바 장자가 말한 ‘소요유’에 해당한다. 권훈칠의 풍경에서는 그 ‘청원’의 경지가 우선적으로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권훈칠의 풍경화는 특정 대상이 자리하고 있지만 실은 무한한 자연의 이미지가 감지된다. 작가/관객의 시선은 특정 자연 풍경, 장소를 보지만 실은 구체적인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허공, 무無, 공空을 보고 있는 듯도 하다. 공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내면을 본다는 것이다. 시선은 결국 무한이고 공이다. 동양의 지식인들은 무의 상태인 공허를 보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시했다.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 생성의 가능 상태인 무가 바로 지식인들이 추구하는 정신적 경지였다고 한다. 무의 경지를 내적으로 체험하고 현실 세계를 자족적 세계로 재구성하는 것, 그것이 또한 예술의 창조이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자연은 희미하고 허하여 공에 이르게 하니 여기에서 정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른바 자연(산수)의 관조를 통해 도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산에 올라 관조할 때 펼쳐지는 산수의 광활하고 공허한 공간, 혹은 바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무량무변의 광활함과 요원함을 안긴다. 그 안에는 수많은 세월이 유전하는 시간의 지속적 변화 또한 함축돼 있다. 시간적으로 시작과 끝이 없고 공간적으로 헤아릴 수도 한계도 없는 자연의 무한함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인간사는 너무나 사소해 보인다.

권훈칠의 풍경화에서 우선적으로 감지되는 것도 비애의 시선이다. 그의 풍경화에서 원경으로 놓인 무한한 자연과 현재의 시간을 강하게 암시하는 변화는 이른바 현량의 개념으로도, 산수화를 그렸던 이들의 세계관과도 밀접한 연관을 이루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무한성과 유한성의 간극, 그로 인한 존재의 비애감 등이 강하게 밀려든다. 자연은 부단히 변화하는 가운데 스스로를 넘어가면서 무수한 생명들을 산포시킨다. 움직임 속에서 하나의 형태로부터 다른 형태로 쉬지 않고 옮아간다. 그렇게 쉼 없이 움직이면서 기존의 형태를 만들고 부수며 소멸시키고 다시 생성시킨다. 인간은 그 같은 자연의 생명활동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반추한다. 자연의 이 무한영역에 자신의 유한한 생을 은밀히 비춰보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과 생명체들을 본다는 것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의 자리임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성의 타자성’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여정을 따라가는 일이 바로 예술의 길이기도 하다. 권훈칠의 풍경화 역시 그런 사례라고 본다.


박영택·경기대 교수/미술 평론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뉴욕 퀸스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연수를 마쳤다. 금호미술관 큐레이터를 거쳐 1999년부터 현재까지 경기대학교 서양화·미술경영학과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전시분석, 미술비평, 큐레이터십, 이미지 읽기, 현대미술의 이해 등을 강의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식민지시대 사회주의미술관의 비판적 고찰」 「한국 현대동양화에서의 그림과 문자의 관계」 등이, 저서로는 『예술가로 산다는 것』, 『테마로 보는 한국 현대 미술』을 비롯해 다수가 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 서울시립미술관 운영위원, 한국미술품감정연구원 이사, 정부미술품 운영위원, 아트페어 평가위원, 2020 전남국제수묵비엔날레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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