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는 미국의 종교적 근본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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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는 미국의 종교적 근본주의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8.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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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반지성주의 시대: 거짓 문화에 빠진 미국, 건국기에서 트럼프까지 | 수전 제이코비 지음 | 박광호 옮김 | 오월의봄 | 528쪽

이 책은 건국 이래 200여 년간 합리적 계몽주의 대 종교적 근본주의라는 양대 축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거대한 지각변동을 선명하게 돋을새김해낸 문명 비평서이자, 그 결과로 봉착하게 된 현대 미국의 근본적 위기에 대한 통렬한 사회 비판서다. 또 왜 이토록 평범한 미국의 보통 사람들이 트럼프를 지지하는지를 밝히는 문화연구서이기도 하다.

트럼프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례 없이 무식하고 상스러운 언행과 기행으로 심지어 보수 우파로부터도 외면당하며 다음 대선에서는 패배하리라는 전망이 유력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2016년처럼 또 한 번 이변이 펼쳐질지. 그런데 더 큰 문제는 트럼프가 마지막이 아니리라는 것이다. 12년 전 조지 W. 부시가 그랬듯이. 21세기의 미국은 언제든 제2의 부시, 제2의 트럼프를 호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유권자들의 주기적인 정권 교체 열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그 기저에 도사리고 있으며, 그것은 건국 이래 미국을 움직여온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경향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 논지다.

저자는 부시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8년을 현대 미국 정치사에서 반지성주의와 반합리주의가 절정에 이른 시기로 보았다. 부시 행정부를 반지성주의의 경향으로 간주한 것은 부시의 개인적 결함들 때문이라기보다는 1970년대 이래 미국 문화에서 우둔함의 기준을 점점 더 낮게 규정해온 일반적인 과정의 한 징후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책의 초판(2008)이 출간된 지 8년 후 그가 진단한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가 다시 한 번, 아니 한술 더 떠 최악의 형태로 재연되고 말았을 때, 저자에겐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트럼프가 당선될 수도 있겠다고 예측하기도 했다. 오바마와 너무나도 대비되는, 미국사에서 가장 반지성적인 대통령의 등장으로 충격에 빠진 미국 지식인들에게 이 책은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

건국자들이 품었던 원대한 계몽주의적 이상은 유럽 문명의 식민지였던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와 함께 신대륙에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의 열망은 많은 미국인들을 강력히 추동하며 미국을 세계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나라로 만들었다.

저자는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반지성주의와 반합리주의를 증폭시킨 가장 큰 원동력으로 종교적 근본주의의 부활을 지목한다. 계몽주의의 시작 이래 서구 문명을 바꿔온 위대한 합리주의적 통찰 대부분에 반대하는 종교적 근본주의는 자발적 무지에 기초하고 있는데, 이는 진화론 대 창조론의 싸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선진국 가운데 진화론을 확립된 주류 과학이 아니라 여전히 ‘논쟁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은 나라는 미국뿐이다. 성경과 충돌하는 세속적 지식과 학습을 거부하는 근본주의의 길이 합리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조화시키려는 합리적 기독교의 길을 가로막으면서 미국의 반지성주의는 더욱 심화되었다.

2006년 퓨 포럼의 연구 조사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다. “어느 것이 미국의 법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까? 성경입니까, 국민의 뜻입니까? 국민의 뜻이 성경과 충돌할 때 어느 것이 되어야 합니까?” 경악스럽게도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60퍼센트가 국민의 뜻이 아니라 성경이라고 답했다. 그런 관점을 견지하는 이들 가운데 백인 주류 개신교인은 16퍼센트, 가톨릭교인은 23퍼센트, 그리고 스스로를 세속주의자로 여기는 이는 7퍼센트였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의 뜻이 아니라 성경을 받들어야 한다니! 문제는 이것이다. 근본주의의 부활과 관련해 과거와 오늘날의 중대한 차이 중 하나는 현대의 우파 근본주의자들이 한 정당의 편에 서서 정치에 개입하고 또 자신들의 도덕적 가치를 제도화하는 것이 종교적 의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우파 정당의 표밭에 머물지 않고, 극단적 보수 기독교 대학들을 통해 우파 전사들을 양성하는 한편, 심지어 교황 무오류설과 낙태, 동성애, 혼전 성관계, 피임 금지에 대한 헌신을 내세우는 우파 가톨릭교인들과도 긴밀한 동맹을 맺으며 세속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과는 관계없이, 미국 반지성주의와 반합리주의의 두 가지 중대한 구성 요소는 1890년대 이래 대체로 변하지 않았다. 하나는 지성주의와 세속의 고등교육이 신앙의 완강한 적이라는 믿음이다. 건국 초기의 독학자에 관한 낭만적 신화는 ‘단호한 개인주의’를 상징하는 관념과 연결되어 교육이 정부의 마땅한 의무라는 생각을 공박하는 데 흔히 사용되어왔다. 또한 매카시 시대와 반항의 60년대를 거치면서 우파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를 결부시켜 만들어낸 부정적인 이미지는 엘리트에 대한 경멸과 배척을 낳았다. 그리고 1960년대 이후 부활한 종교적 근본주의가 많은 지역의 공교육에 악영향을 끼쳤는데, 이는 미국 고등학생들이 유럽과 아시아의 동년배보다 과학 지식이 부족한 이유 중 하나다. 다른 하나는 사이비과학이라는 독소로, 진화론을 둘러싼 문화 전쟁의 초기 단계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사회 영역에 적용하여 도금시대의 과도한 부와 빈곤 체제를 합리화하려 했던 사회다윈주의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까지는 우생학의 보루로, 또 진력나는 20세기 중반에는 에인 랜드의 ‘객관주의’ 철학으로, 그리고 최근에는 시장경제 숭배와 온갖 정크과학으로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반지성주의를 증폭시킨 또 다른 원동력으로 활자문화에서 영상문화(인포테인먼트 문화)로의 급격한 이행을 지목한다. 미국 지성사에서 1960년대가 중요한 이유는 영상문화에 의한 활자문화의 쇠퇴가 시작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활자가 요구하는 자발적인 집중은 인포테인먼트 매체가 조장하는 반사적인 주의 산만과 정반대의 것이다. 넘쳐나는 정보를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능력의 쇠퇴는 과학과 종교에 관한 대중의 무지를 강화한다. 미국인의 3분의 2 이상이 DNA가 유전을 밝히는 열쇠임을 알지 못한다. 열에 아홉은 방사선과 그것이 인체에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성인 다섯에 하나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확신한다. 2001년 미국 성인 가운데 소설이나 시집을 한 권이라도 읽은 이는 절반이 안 되었다. 논픽션을 한 권이라도 읽은 미국인은 57퍼센트뿐이었다. 이런 응답들은 초·중등학교의 공교육이 놀랄 만큼 실패했음을 가리키고, 대중이 왜 진화론이나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자의 경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는가를 보여준다. 이는 지구온난화를 거짓말이라고 일축해버린 트럼프를 유권자들이 심판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준다. 전문가를 조롱할수록 트럼프는 지지자들의 사랑을 더 받을 뿐이었다. 이것이 현재 거짓 문화로 백악관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을 미국인이 선출한 가장 큰 이유다.

반지성주의는 대중의 무지를 먹고 자란다. 저자는 대중지식인들이 협력하여 진실을 흐리고 은폐하는 인포테인먼트 문화에 중독된 대중의 지적 게으름을 일깨우고 탈-탈진실의 시대를 만들어나갈 책무가 있다고 강력히 호소한다.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정치, 경제, 역사, 종교, 문화 등 사실상 거의 모든 측면에서 세례를 받아온 나라라는 점을 고려할 때, 미국 사회에 만연한 비합리성과 반과학성을 추적하는 이 책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보수 유튜버들이 양산해내는 가짜 뉴스, 근본주의적 개신교 세력의 정치세력화 및 사회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조장은 절묘하게도 우리의 현실과 닮아 있다. 한 신학자(김진호)의 추산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파워엘리트 중 40%가량이 개신교 신자라고 하는데, 그들은 이미 두 번의 연속적인 극우 정권 창출 및 유지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 반합리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부추기는 종교적 근본주의가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추적한 이 책의 내용을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일로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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