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가 말하는 조선 말기의 살인 사건
상태바
흉기가 말하는 조선 말기의 살인 사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07.19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⑧_흉기, 살인을 말하다

규장각 소장 대한제국 시기의 검안

2015년 11월 14일 서울에서 열린 시위에서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숨진 농민 백남기씨의 사인(死因)을 놓고 한동안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민중총궐기’ 시위 도중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버스에 묶인 밧줄을 잡아당기던 중 순식간에 물대포에 강타당해 뇌출혈을 일으킨 그는 불행하게도 이후 1년 가까이 의식불명 상태로 있다가 사망했다. 그런데 그의 주치의였던 서울대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사망진단서의 사망 원인을 병사로 기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유족은 크게 반발했다. 누가 봐도 명백해 보이는 물대포의 충격으로 인한 사망인데도 병사라니? 우여곡절 끝에 이듬해 서울대병원에서 사망 원인을 외인사로 변경하였고, 경찰은 비로소 물대포 사용에 대해 공식 사과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었다.

이처럼 사망진단서에 적힌 사인은 죽음의 성격을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검시의 핵심 사안은 사망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라 하겠다. 조선시대에는 사인을 ‘실인(實因)’이라고 불렀는데, 검안(檢案)에서 특히 중요한 사항이었다. 살인, 자살과 같은 변사사건이 발생할 경우 시신을 검시하고 관련자들을 신문한 내용을 기록한 고을 수령의 보고서 검안은 지금의 의사의 사망진단서와 경찰의 피의자 신문 조서를 합친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특히 지금과 달리 조선시대의 검시는 기본적으로 두 차례 이상 거쳤는데, 1차 검시 즉 초검(初檢)은 시신이 소재한 고을 수령이, 2차 검시인 복검(覆檢)은 이웃 고을 수령이 수행했다. 이 두 수령이 파악한 사망 원인이 일치하지 않으면 추가 검시를 행했다. 정확한 실인 파악은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그리고 엉뚱한 사람이 사건에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 김윤보가 그린 검시 장면. 하단에는 피의자로 보이는 인물이 포박되어 있으며, 상단 우측의 관복을 입은 인물이 검시관이다. 『사법제도연혁도보』 수록
▲ 김윤보가 그린 검시 장면. 하단에는 피의자로 보이는 인물이 포박되어 있으며, 상단 우측의 관복을 입은 인물이 검시관이다. 『사법제도연혁도보』 수록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는 조선시대에 작성된 검안이 소장되어 있는데, 당시 검시가 실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살인과 자살을 부른 극단적 갈등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준다. 규장각에는 약 630여종이 넘는 검안이 확인되는데 대한제국 시기인 1897년~1907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최근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조영준 교수가 이들 검안에 그려진 흉기를 치밀하게 분석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제부터 조 교수의 글을 바탕으로 흉기에 비친 조선 말기의 살인 현장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검안에 그려진 흉기 그림

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규장각 자료 중에 살인 흉기가 그려진 검안은 모두 94건으로 집계된다. 그럼 어떤 흉기가 조선 말기의 살인 도구로 쓰였을까? 흥미롭게도 검안에 그려진 흉기를 유형화해보면 몽둥이(24건)가 가장 많았다. 그 다음으로 많은 것이 농기구와 칼(각각 20건), 돌(11건)의 순이었고 그 외에 끈과 총기(각각 3건)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경찰청 범죄통계 기록에 요즘은 칼이 범행도구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그 뒤를 공구가 잇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당시에는 몽둥이, 농기구가 상대적으로 많이 사용된 것이다. 이 시기 살인은 계획된 범죄가 아니라 대개 우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농촌에서 흔히 보이는 생활용품이나 가재도구, 농기구를 범행에 활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흉기로 쓰인 몽둥이는 다양했는데, ‘송봉(松棒)’이라 기재된 소나무 재질의 몽둥이가 있는가 하면 지게를 질 때 지탱하는 지겟작대기, 육모방망이, 모난 나무방망이 등도 있었다. 길이는 60-90cm, 혹은 120-150cm의 몽둥이가 가장 많이 쓰였는데, 요즘 야구방망이가 대략 1m 조금 넘는 것에 비추어 볼 때 당시 몽둥이를 이용한 범인은 대개 야구방망이보다 조금 작거나 아니면 조금 큰 몽둥이를 잡고 피해자에게 휘둘렀다고 하겠다.

▲ 1906년 발생한 전라도 전주군 사옥리 살인사건의 검안. 그림에서 보듯이 검안 내에는 가해자가 흉기로 사용한 ‘겸자(鎌子)’, 즉 낫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규장각 소장
▲ 1906년 발생한 전라도 전주군 사옥리 살인사건의 검안. 그림에서 보듯이 검안 내에는 가해자가 흉기로 사용한 ‘겸자(鎌子)’, 즉 낫의 모양이 그려져 있다. 규장각 소장

흉기로 이름을 올린 농기구에는 낫, 도끼, 괭이, 작두, 빨래방망이, 절굿공이, 고무래 등이 있었는데, 이 중 가장 자주 등장한 것이 곡식을 빻거나 찧는데 쓰는 절굿공이였다.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농기구가 때론 무서운 흉기로 변신했음을 의미한다. 예컨대 낫이 끔찍한 복수 살인에 사용된 사례로는 1906년 4월 전북 전주군 상관면 옥관리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웃집 연회에 참석한 사람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 이득서란 인물이 이웃사람에게 얻어맞아 죽게 되자, 이득서의 아들 이봉춘이 아버지 복수를 위해 가해자 이덕장을 찾아가 낫을 휘둘러 살해한 사건이다.

다음으로 몽둥이보다는 못하지만 농기구만큼 자주 등장하는 흉기가 칼이다. 칼의 종류로는 단순히 칼[刀子]이라 적은 것도 있지만 식칼이나 주머니칼도 보인다. 치수를 분석해보면 요즘의 30cm 가량의 식칼과 비교하여 이보다 작은 평균 24cm의 칼이 쓰였음을 알 수 있는데, 식칼이 아닌 주머니칼이 당시 범행에 자주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흉기, 급박한 살인 현장을 담다

앞서 방망이, 농기구, 칼 등 검안에 자주 등장하는 대표적인 흉기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이밖에도 돌, 총기, 끈, 담뱃대, 등잔걸이, 목침, 무쇠로 된 화로, 판목, 말뚝과 같은 여러 가지 도구가 범행에 쓰인 것으로 나온다. 이 가운데 돌이 상당히 높은 빈도로 살인에 활용되었다는 사실이 독특하다. 갈등이나 대치 상황에서 주변에 있는 돌을 들어 흉기로 사용하는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때 사용한 돌 중 무게가 적혀 있는 두 사례가 각각 4.5kg, 15kg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꽤나 무거운 돌이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 1898년 발생한 개성군 서부 관전리 살인사건의 복검관 교하군수 박주헌의 보고내용 및 가해자 최태평이 사용한 흉기 그림 부분이다. 돌멩이를 석자(石子)라 표현했으며, 길이와 너비가 기재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 1898년 발생한 개성군 서부 관전리 살인사건의 복검관 교하군수 박주헌의 보고내용 및 가해자 최태평이 사용한 흉기 그림 부분이다. 돌멩이를 석자(石子)라 표현했으며, 길이와 너비가 기재되어 있다. 규장각 소장.

돌멩이를 이용한 살인의 예로는 개성의 서부 관전리에서 1898년 10월에 발생한 김여인 치사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부부간의 갈등이 엉뚱하게 이웃집 여인에게 화가 번진 사례인데,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두부 판매상 이여인 집에서 자신의 흉을 보고 있는 아내를 발견한 최태평이 아내와 다투다가 화가 치밀어 마당에 놓인 돌멩이를 집어 던졌는데, 마침 싸우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웃의 김여인이 맞아 죽은 사건이다.

▲ 1899년 강원도 원주군 호매곡면 유여인 자살사건 검안. 검안의 표지 부분과 유여인이 사용한 칼 그림. 규장각 소장.
▲ 1899년 강원도 원주군 호매곡면 유여인 자살사건 검안. 검안의 표지 부분과 유여인이 사용한 칼 그림. 규장각 소장.

살인 흉기로 자주 등장했던 칼이 때론 자살 도구로도 쓰였는데, 1899년 강원도 원주군 호매곡면 평천마을에서 일어난 유여인 사망 사건이 그 한 예이다. 죽은 유여인은 겨우 28세의 청상 과부였다. 명색이 양반집 규수인 그녀는 당초 횡성의 박양반 집에 시집을 갔으나 남편이 일찍 죽자 친정에 홀로 남겨진 남동생을 돌보기 위해 사건이 나기 한 해 전에 친정에 돌아온 상태였다. 유여인에게 못된 마음을 품은 이웃의 상놈 5~6명이 과부 보쌈을 단행하였고 마침 동생 유삼남이 극력 저지하는 과정에서 그 중 함춘길이 얻어맞아 죽는다. 이에 앙심을 품은 함춘길의 삼촌 등이 집에 찾아와 행패를 부리자, 보다 못한 유여인이 신세를 비관하여 한밤중에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한 사건이다.

▲ 1907년 개성 서부 관전리 김기홍 치사사건. 통진군수의 초검과 교하군수의 복검에 나오는 흉기로 쓰인 육모방망이 그림이다. 초검에는 흉기의 길이, 무게, 두께 및 세 군데의 직경(위, 가운데, 아래)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 반면, 복검에는 모양과 함께 길이만 적었다. 흉기 길이는 1척 5촌인데 지금의 약 52cm이다.
▲ 1907년 개성 서부 관전리 김기홍 치사사건. 통진군수의 초검과 교하군수의 복검에 나오는 흉기로 쓰인 육모방망이 그림이다. 초검에는 흉기의 길이, 무게, 두께 및 세 군데의 직경(위, 가운데, 아래)이 모두 표시되어 있는 반면, 복검에는 모양과 함께 길이만 적었다. 흉기 길이는 1척 5촌인데 지금의 약 52cm이다.

검안에 그려진 흉기 중에는 그림과 실측이 잘 기재되어 있어 당시 살인 현장 상황을 생생하게 복원해주는데 일조하기도 한다. 앞서 소개한 돌멩이로 맞아 죽은 김여인 사건이 일어났던 곳과 동일한 지역인 개성 관전리에서 1907년 발생한 김기홍 치사사건에서는 육모방망이가 흉기로 동원되었다. 죽은 김기홍이 성묘를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김태성이란 자의 두 첩과 합석하여 술을 마셨는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태성이 육모방망이 등으로 김기홍을 구타 살해한 사건이다. 초검을 맡은 통진군수 조동선의 검안에는 흉기의 모양과 실측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반면 교하군수 윤기섭의 복검에서는 길이만 간략히 제시되어 있다. 검시관이 누구냐에 따라 살인현장 상황에 대한 수사에 적지 않은 차이가 존재했음을 엿보게 해주는 사례이다.

형식에 그친 엉터리 그림들

한편 검안에는 성의가 없이 그려진 흉기 그림들도 적지 않게 확인된다. 이런 그림들은 흉기의 실체를 보여주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살인범을 특정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1905년 강원도 영월군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을 보자.

이 사건은 영월군 군내 상송리 학당곡에서 술값 시비가 살인을 부른 사안이다. 이 사건은 1905년 4월에 피해자 이달성이 강흥록에서 외상 술값을 요구하면서 발생했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시비가 격화되자 강흥록이 목침으로 피해자의 아래턱과 왼쪽 뺨을 강하게 가격하였고, 피해자는 결국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둔다. 당시 초검관은 영월군수 김선규였는데, 그는 검안에 「목침도형(木枕圖形)」이라 하여 흉기로 사용된 목침의 개형을 그려놓았다. 하지만 실측이 전혀 없이 간략하게 그려 넣어 실제 사용된 목침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상상하기 어렵다.

▲ 1905년 강원도 영월군 군내면 상송리 살인사건 검안. 영월군수의 초검 말미에는 범행에 사용된 목침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실측도 없고 그림도 무성의하다. 규장각 소장.
▲ 1905년 강원도 영월군 군내면 상송리 살인사건 검안. 영월군수의 초검 말미에는 범행에 사용된 목침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실측도 없고 그림도 무성의하다. 규장각 소장.

엉터리로 그려진 흉기의 또 하나의 사례로는 1902년 4월 경상도 거창군 천내면 송정의 주점동에서 발생한 사건에 대한 거창군수 최윤정의 초검안을 들 수 있다. 신용권이 외가 기제사를 다녀온 후 이웃의 유계안이란 자가 자신의 부인과 통간하려 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신용권과 유계안과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이에 유계안이 마을을 떠날 것을 요구한 신용권은 그 후 유계안의 부친 유문오 집에 찾아가 술에 취한 유문오와 시비가 붙어 그를 주먹으로 때리고 돌로 쳐서 살해한 사건이다. 검안에는 신용권이 사용한 돌의 모양이 대략 그려져 있으나 실측을 기재하지 않아 흉기로 쓰인 돌의 실체는 불분명하다.

▲ 1902년 경상도 거창군 천내면 유문오 치사사건 검안. 살인범 신용권에 대한 신문 내용 및 흉기 그림 부분이다. 흉기인 돌멩이 모습이 착종된 것은 규장각에서 배접을 잘못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애초 거창군수의 초검에서도 흉기에 대한 정확한 실측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규장각 소장.
▲ 1902년 경상도 거창군 천내면 유문오 치사사건 검안. 살인범 신용권에 대한 신문 내용 및 흉기 그림 부분이다. 흉기인 돌멩이 모습이 착종된 것은 규장각에서 배접을 잘못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애초 거창군수의 초검에서도 흉기에 대한 정확한 실측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규장각 소장.

규장각에 소장된 검안은 격동의 조선말기 농촌사회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살인 사건의 양상을 이야기한다. 살인 현장 조사에서 흉기가 발견된다면 이에 대한 그림을 검안에 그려 넣는 것은 조선시대 검시관의 의무 사항이었다. 그렇지만 당시 수령들 상당수는 객관적인 증거 자료로서 흉기를 제시하지 못했다. 흉기 그림이 무성의하고 형식에 그친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 이를 분석한 조 교수의 결론이다. 조선시대 검시 매뉴얼은 비교적 잘 갖추어져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도의 성패는 이를 운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