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시대 뉴노멀의 정치풍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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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시대 뉴노멀의 정치풍속도
  •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 승인 2020.07.19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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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직설_ 서유경 칼럼]

코로나19가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사회적 거리 두기, 혼밥, 1인용 빙수, 떨어져 앉아 영화보기, 혼자 여행하기, 나 홀로 쇼핑 등등. 우리는 차츰 이런 뉴노멀 풍속들에 익숙해져 간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어쩌다 점심시간에 혼자 식당에 들어서면 손님들의 힐끔거리는 눈총이 꽤 따가웠다. 당신은 밥 같이 먹을 친구 하나 없어 혼자냐는 약간의 면박이 섞인 책망의 시선이었다. ‘혼자세요?’라는 주인의 타박성 탐문도 당신이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면 점심 장사에 피해가 될 수도 있다는 손익계산 못지않게 혼밥 손님의 존재에 대한 낯섦의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지나친 일반화 오류가 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아는 한 우리 한국인은 유독 ‘혼자’라는 사실에 극심한 공포감을 느낀다. 또 ‘혼자서’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모임에 갈 때마다 친구든 지인이든 미리 만나서 함께 가려고 애를 쓴다. 또한 다른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한다고 지목될까 염려하여 같은 시공간에 있는 사람들을 기민하게 쓱 한 바퀴 휙 둘러본 다음 ‘안전한’ 침묵 모드로 바꾸거나 아니면 ‘힘 실린’ 다수 쪽에 슬쩍 손드는 행태도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옛말에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다. 혼자는 불안하니 편을 짜서 숨을 공간을 만들고, 괜히 튀는 발언으로 손해 보느니 눈 딱 감고 비굴한 미소 한 번 씨익 날리면 힘 안 들이고 숟가락 얹을 수 있는 법 아니던가.

사실 우리 사회의 ‘편먹기’ 관행은 혼자라는 사실에 대한 극도의 공포감과 괜히 긁어 부스럼 내기보다 대충 분위기에 편승하여 중간 가는 게 남는 장사라는 얄팍한 이해타산이 오래 함께 맞물려 돌아가 응축된 결과물이다. 문제는 바로 이 편 먹기와 분위기 편승이 주체의 상실을 의미한다는 데 있다. 편먹은 덕분에 ‘나’나 ‘너’ 대신 ‘우리’나 ‘그들’이 주체화한다면, 나나 너의 주장과 행위는 익명화되며 그 주장과 행위에 대한 책임도 원칙적으로 나나 너에게 묻기가 어려울 것이다. 작금의 대한민국이 진영논리와 유체이탈 화법 천국이자 책임지는 사람이라곤 하나 없이 그저 치고 빠지는 한탕주의 사회가 된 원인도 알고 보면 바로 이런 폐습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이런 우리의 오랜 관행을 타파하고 있어 흥미롭다. ‘거기 당신, 가까이 오지 마! 마스크 안 썼잖아.’ 마스크는 어느덧 ‘나’와 ‘너’의 경계를 가르는 표식인 동시에 내가 너의, 네가 나의 경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인증’이 되어 있다. 마스크가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물론 ‘안전’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전에 무리를 지음으로써 안전을 추구했던 방식을 과감히 포기해야 얻을 수 있는 역발상의 뉴노멀을 시사한다. 코로나19 시대의 안전은 무리 짓기가 아니라 사회적 거리 두기가 담보하기 때문이다.

이 언택트 시대, 우리는 공식ㆍ비공식을 망라하고 각자 있는 곳에서 화상으로 비대면 회의를 한다. 참여자 수만큼 화면을 N 등분하여 각자에게 배분된 한 개의 상자 속에 담겨진 나나 너는 모두가 동시다발적으로 화면을 응시하며, 본의 아니게 참여자의 일거수일투족까지 꼼꼼히 살피게 된다. 게다가 이 화상 공간에는 누구나 개별적으로 발언을 해야 하며 1/N만큼의 몫과 의결권을 평등하게 행사한다는 암묵적인 약속 같은 것이 존재한다. 대개의 경우 회의의 전(全) 일정이 녹화되며 그것은 언제든 필요한 순간에 나나 너의 책임을 묻는 도구로 쓰일 수 있다. 이 뉴노멀 시대의 신풍속은 너나 나의 주장과 행위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책임이 탈주체화될 가능성을 철저히 봉쇄하며 우리를 제각각 실명 소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신풍속인 마스크는 또 어떤가. 마스크는 그게 누구의 얼굴이든 평등하게 한 장씩만 허용된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심지어 수개월 간 그것을 집요하게 거부했던 트럼프에게조차 평등하게 착용 의무를 부과한다. 이런 점에서 마스크는 가장 실효적인 정치적 평등의 담보자이다. 마스크가 우리 사회에 가져올 아주 흥미롭고도 중요한 정치적 효과는 이것 말고도 하나가 더 있다. 마스크는 우리의 주된 소통 수단인 입을 가리기 때문에 입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자유로운 소통행위가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된다. 이에 또 하나의 뉴노멀 풍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말 알고 싶다면 이제 그의 ‘입’이 아니라 ‘눈’을 주시하라.

예로부터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이 마음의 창을 통해 서로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면 보다 진정성 있는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리라. 만약 우리 정치인들이 서로서로의 마음의 창을 들여다본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진정성 있는 정치가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약 그들이 우리 국민과 눈을 맞춘다면 더 나은 정치가 꽃피는 나라가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코로나19 시대, 우리는 정치인의 눈을 지그시 들여다본다. 그들이 우리 앞에 펼쳐진 이 뉴노멀의 화폭에 너와 나의 마음에 닿는 진정성 있는 정치 풍속도를 정성껏 그려줄 것이라는 높은 기대감과 함께.


서유경 논설위원/경희사이버대·정치철학

경희사이버대학교 후마니타스학과 학과장 겸 문화창조대학원 미래시민리더십〮거버넌스 전공 주임교수. 현재 한국NGO학회 회장과 대통령직속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 연구주제는 한나 아렌트 정치정치미학, 시민정치철학, 한국민주주의의 패러다임 전환 등이다. 저서로 The Political Aesthetics of Hannah Arendt와 『제3의 아렌트주의』 (근간), 역서로 『아렌트와 하이데거』, 『과거와 미래 사이』, 『사랑 개념과 성 아우구스티누스』, 『아렌트 읽기』, 『시민사회』, 『이사야 벌린의 지적 유산』, 『책임과 판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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