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맹자〉 - 호혜적 공감의 문화 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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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맹자〉 - 호혜적 공감의 문화 정전
  • 고현석 기자
  • 승인 2020.07.1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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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문화정전 5강>_ 안외순 한서대학교 교수의 「<논어> <맹자> - 호혜적 공감의 문화 정전」

네이버문화재단의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일곱 번째 시리즈 ‘문화정전’ 강연이 매주 토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 카오스홀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문화 양식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문화 전통, 사회적 관습으로 진화하며 인류 지성사의 저서인 '고전'을 남겼다. 이들 고전적 저술 가운데, 인간적 수련에 핵심적이라 받아들여지는 저술을 문화 정전(正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52회로 구성된 이번 시리즈는 인류가 쌓아온 지적 자산인 동서양의 ‘문화 정전(正典)’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이 마주한 삶의 문제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5강 안외순 교수(한서대 글로벌언어협력학과)의 강연 중 주요 대목을 발췌·요약해 소개한다.

정리   고현석 기자
사진·자료제공 = 네이버문화재단


안외순 교수는 먼저 “문화 정전으로서의 『논어』와 『맹자』의 위상 확립 과정”을 스케치하고 “중국 고대 문화 텍스트들인 ‘육경’ 정전 형성 과정에서 공자의 공헌, 그리고 『논어』의 정전 형성 과정에 기여한 『맹자』의 공헌”과 관련하여 두 서적을 간단히 소개한다. 그에 이어 『논어』와 『맹자』, “두 정전이 새로이 개척한 문화적 위상과 가치”에 대해 본격적으로 “핵심 가치인 인(仁)의 특성과 그 확장 논리인 내치론과 외교론, 그리고 도덕(감정)론”을 통해서 살펴본 다음 “관련 항목들의 한국적 전개” 문제와 연관하여서는 약간의 언급으로 마무리한다.

▲ 지난 6월 6일, 안외순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 지난 6월 6일, 안외순 교수가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 문화정전〉의 5번째 강연자로 나섰다. 사진제공=네이버문화재단

1. 한국인의 문화 DNA?

한국인의 문화 DNA라고 할 때 길게는 2000년, 짧게 잡아도 600년 이상 한민족과 함께한 유교 문화를 빼고 논하기 어렵고, 유교 문화라고 할 때는 그 시원에 공자(孔子: 孔丘 B.C. 551?B.C. 479)와 맹자(孟子: 孟軻, B.C. 372-B.C. 289)가 자리하며, 이들의 사유를 가장 잘 담아낸 책이 『논어(論語)』와 『맹자(孟子)』임을 일컫지 않을 수 없다. 단연 유교 최고(最高/最古)의 정전(正典)이라 하겠다.

총 20편으로 이루어진 『논어』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과 국가 생활에 대한 공자의 사상과 학문, 편저술 활동, 교육 활동, 정치 활동과 유세 활동 등에 대해 그의 사후 제자들이 수록한 책으로서, 공자 사후 70여 년 뒤 전국 초기인 기원전 400년경 출현하였는데, 제자들에 의하여 실제 작성된 것은 이보다 앞섰다고 한다. 『맹자』는 공자의 사숙제자를 자처한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현실에 실천하기 위하여 당대 군주들에게 유세하고, 제자들과 토론하고 교육한 것에 더해, 말년에 만장(萬章)과 공손추(公孫丑) 두 제자들과 함께 저술한 책이다.

2. 문화 정전으로서의 『논어』, 『맹자』의 위상

이미 진대(秦代)의 분서(焚書)와 멸학(滅學) 기조로 제자백가들이 거의 진멸(盡滅) 상태였지만 다행히도 한대(漢代)에 훈고학이 일어나고, 비록 외유내법(外儒內法)일지언정 공자학이 국정 이념으로 채택되면서 쟁명(爭鳴)하던 백가들은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 성경현전(聖經賢傳) 기준도 만들어지고 고대 문물과 정신을 담고 있던 육예(六藝)라 불리던 서적들 또한 이제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악』, 『춘추』의 ‘육경(六經)’에 들면서, 이에 주석을 달거나 그에 준하는 책은 ‘전’이라고 하였다. 『논어』는 전(傳)이었다.

그렇다고 『논어』의 중요도나 영향력이 ‘경’들보다 낮지는 않았다. 『한서(漢書)』에서 “전으로는 『논어』보다 위대한 것이 없다”라고 했듯이 다른 전들과는 격이 달랐고, 이미 식자(識字) 과정만 마치면 바로 『논어』를 읽도록 하는 등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당대(唐代)에는 구경(九經)이라고 하여 『논어』가 경의 반열에 들었다.

『맹자』 역시 전(傳)/기(記)의 대우를 받은 것은 분명하고, 후한 말기에 이르면 조기(趙岐)의 『맹자장구(孟子章句)』를 비롯하여 다수의 주석서들이 나오는 등 이미 권위 있는 고전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한당대(漢唐代) 유교의 국정 이념화에 수반되었던 외유내법(外儒內法)의 성격과 후기의 지나친 훈고학적 분위기로 공자나 맹자가 강조했던 인(仁) 중심의 학문이나 국가 운영 방향은 다소 거리가 있는 역설적 상황이 초래되었다.

송대(宋代)에 이르면 ‘십삼경(十三經)’ 체제가 이루어지면서 두 텍스트 모두 ‘경’의 반열에 들었고 절대적으로 존중되었다. 여기에 남송(南宋)을 거치면서 주자[朱熹]의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출간 이후부터는 아예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사서만 입문서로 간주하고, 회의주의와 도덕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게다가 원(元)에서는 국가 관리 시험 범위를 ‘사서(四書)’로 한정하고 『사서장구집주』를 정통으로 삼았는데, 이런 분위기는 명(明)을 거쳐 청말(淸末) 양무운동으로 과거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읽는 순서까지 『대학』→『논어』→『맹자』→『중용』으로 정해주었다. 특히 조선의 경우는 건국부터 말기까지 주자학 일변도였기에 사서집주식 『논어』, 『맹자』의 영향이 지대했다. 주자학은 결과적으로 두 정전이 본래 지닌 실사구시(實事求是) 성격과 생동감 넘치는 특성들이 사장되는 등 방사하다[肆]는 평을 받았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청(淸) 학계에서는 실증주의적 고증학과 육경의 연구 경향이 재흥하여 『논어』, 『맹자』에 대해서도 한(漢)/송(宋) 절충론적 접근이 이루어졌다. 다산 정약용의 경우 『논어』, 『맹자』 등 경전에 한당학, 송학, 청학 및 일본 등지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여 장단취사 하였다.

3. 온고지신의 문화 정전 『논어』

1) 온고(溫故): 문화 정전 형성자로서의 공자, 고전에서 노닐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니, 또한 기쁘지[說] 아니한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樂] 아니한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으니, 또한 군자(君子) 아니겠는가?
(『논어』 「학이(學而)」)

『논어』를 펼치면 맨 처음 마주하는 내용이다. 공자가 생각하거나 공자가 실제 살았던 ‘좋은 삶’ 또는 '행복한 삶’의 기준이 공자 이전과 경계 짓는 방식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가운데 오늘의 주제와 관련된 부분은 특히 첫 문장이다. ‘배우고 익힘으로써 자기를 이루는 기쁨’ 부분에서 중국 고대 전적과 문화의 집적체인 고전들의 정전 형성 주체로서의 공자를 만날 수 있다. 호학(好學)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평한 공자였기에 일생이 학습 대상 아닌 것이 없었다. 그것은 대략 “㉠ 의식주를 위한 기술지 ㉡ 인간관계상의 당위적 도리 ㉢ 『시』, 『서』, 『역』과 같은 경전을 익히는 오늘날의 인문 교양 ㉣ 인간의 자기완성에 관여하는 위기지학으로서의 도(道) 등”으로 정리된다. 이 중에서 문화 정전을 의미하는 것은 ㉢ 『시』, 『서』, 『역』 등 공자 이전의 고전 텍스트들이다. 이러한 공자 이전 시대의 고대 문물이 실려 있는 문헌들이 그에게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보고였다.

당우하은주(唐虞夏殷周)의 문물과 정신은 당시만 하더라도 ‘육예(六藝)’로 불리던 『시』, 『서』, 『역』, 『춘추』, 『예』, 『악』 등에 실려 있거나 제도로서의 예/악 등에 존재하였다. 『서』는 당우하은주의 정치사 서적이었고, 『시』는 주(周)의 군주와 민의 노래 시집이며, 『역』은 우주론 및 점술서이고, 『예기』는 주의 의례서였으며, 『춘추』는 노(魯)의 역사서였고, 여기에 악보집 『악』이 있었다. 이들이 공자의 ‘학이시습’의 주요 대상이기도 했다는 점이다.

공자가 기존의 고전들을 수집, 정리, 연구한 결과 마침내 그는 스스로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고 자평하면서 정리 작업을 마쳤다. 사마천은 이에 대해 ‘공자가 직접 『서』와 『예』를 서(敍)하고, 『시』를 산정(刪定)하였으며, 『악』을 바로잡고, 『역』의 단(彖)ㆍ계사(繫辭)ㆍ설괘(說卦)ㆍ문언(文言)을 차례지었다’라고 했다. 맹자는 공자가 『춘추』를 지었다고 했다. 결국 역대 고대 왕조들의 역사와 문물, 전장, 법도 등이 후대에 전승될 수 있었던 것은 크게 공자에 빚지고 있다. 덕분에 한대(漢代)에 이르러 고대의 문헌들은 『서경』, 『시경』, 『역경』 등의 이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공자는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육경’의 텍스트 정본화에 기여했다.”

2) 지신(知新): 인(仁), 호혜적 공감의 새로운 관계 윤리

문화 정전 형성 과정은 필연적으로 당대는 물론 미래적 인류 보편의 문제와 관련된 지적 탐색을 수반하게 된다[知新].

① 문질빈빈(文質彬彬), 예(禮)와 인(仁)의 짝짓기

공자가 고대 텍스트들로부터 찾아낸 새로운 문명의 대안은 ‘인(仁)’이었다. 공자는 인(仁)을 예(禮)와 짝지움으로써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고 본래의 질서를 찾으리라 전망했다[克己復禮爲仁]. 인은 질박함의 대명사였고 예는 문화, 세련됨의 상징이었기에 문과 질이 조화를 이루면 빛나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의 상황으로 귀결될 것이었다.

② 호혜적 공감의 관계적 가치 인(仁)의 탄생

공자가 세상에 내놓은 인(仁)의 핵심은 호혜적 공감의 관계적 가치이자 원리였다. 새로이 탄생된 공자의 인(仁)은 다양한 여타 개별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 하나의 개별 가치들이기도 하고, 그 가치들의 총칭이자 원리이기도 하다. 즉 『논어』에는 개별 가치로의 인(仁) 외에도 서(恕), 예(禮), 덕(德), 효(孝), 의(義), 충(忠), 직(直), 애(愛), 친(親), 신(信), 용(勇) 등 다양한 가치들이 강조되고 있는데, 총칭으로서의 인은 다양한 이들의 의미를 대표하는 가치로서도 표현되고 있기도 하다. 이때 이들의 공통된 의미는 ‘타인에 대한 사랑[愛人]’이다.

“자기가 하고[立/達] 싶으면 남도 하게 하는 것”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하지 않는 것”

인용문에서 보이는 인(仁)은 인간의 존재론적 관계성 혹은 공동체성에 의거하여 호혜적 공감, 호혜적 동일률에 기초한 공감 원리에 기초한 정의이다. 고립적 존재일 수 없는 인간이라면 행복을 위해서 필연적으로 관계윤리를 잘 설정해야 하는데 그 기준이 자신과 타인을 동일선상에서, 그것도 자신 욕망하는 바와 원하지 않는 바를 배려해서 그 선을 정하는 호혜성이 원칙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또 인간의 공감에 기초하여 이 공감능력이 증진될 것을 희망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의 개념은 한편으로는 완성주의적 성격도 지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혜성의 원칙에 의거한 합의론적 성격을 띠는 측면도 있다.

③ 정치적 과제: 부민과 교민, 그리고 정명

호혜적 공감의 가치 혹은 호혜적 동일률의 행위 원리로서의 인(仁)은 개인의 생활 영역 차원에서 적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 세계에서의 실천도 무엇보다 중요하다.

첫째, 인(仁)의 정치적 실천에 대해 공자는 군주가 민의 근심과 호오를 함께 함에서 찾는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부민(富民)과 교민(敎民)의 정치’로 집약된다. 군주가 민과 호오를 같이 하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민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문제이다. ㉠ 의식주가 만족스럽게 해결된 ‘족식(足食)’ ㉡ 안전과 안보가 만족스럽게 확보된 ‘족병(足兵)’ ㉢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확보되는 ‘민(民)의 지지[民信]’에 의거한 정치이다. 이를 위해서는 통치자의 끊임없는 자기성찰[修己]이 필요하다. 그런데 공자는 민의 호오를 생명의 안전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그는 민을 부유하게 만들었으면 반드시 가르칠 것을 요구했다.

둘째, 인의 정치적 실천으로 공자가 주목한 또 하나는 질서를 바로 잡는 정명(正名)이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움”, 제(齊) 경공(景公)이 정치에 대해서 묻자 공자가 대답한 말이다. 그것은 좁게는 일국 내 정치 조직이 각각 자기 직분을 잘 수행함으로써 질서가 확보됨을 의미하고, 넓게는 일국 내의 모든 존재자의 질서 확보를 의미한다.

④ 정치 수단: 덕주법보(德主法輔)

이러한 정치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공자는 구체적인 행정 수단으로 덕치(德治)와 예치(禮治)라는 동의와 규범의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수단을 위주로 하고 정령(政令)과 형치(刑治)라는 물리적 강제력을 보조로 사용하는 덕주법보(德主法輔)의 방식을 제시하였다.

공자는 합법적이긴 하지만 폭력을 고유한 속성으로 하는 정치 영역이 자칫 공권력을 가장한 폭력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기에 정치과정에서 강제력인 행정 명령(정령)과 형벌에 치중하지 말고 먼저 자발성에 의거하는 덕과 예에 의한 정치를 중시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는 공자가 민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인정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⑤ 시의성

인(仁)은 반드시 구체적인 타자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구체적인 타자의 존재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시공간적 상황에 따라 적실성을 달리 요구하는 실존적 존재이다. 호혜적 공감의 인(仁)을 실천한다 함은 시의성(時宜性)을 확보함을 의미한다. 시공간적 시의성 속에서 ‘자기 성찰적 시선에서 타인 이해하기[推己及人]’. 그래서 맹자는 공자를 ‘성인 가운데 시의성에 으뜸인 자[聖之時]’이고 성인이 갖추어야 할 청렴, 자임, 조화의 덕목을 모두 집대성(集大成)한 자로서 상황에 맞추어 해당 덕목을 발휘하는 자로 평가하고 존경했던 것이다. 맹자의 담론은 여기서 시작한다.

4. 문화 정전으로서의 『맹자』

1) 정전 형성자로서의 맹자

『맹자』는 공자의 사유 세계에 대한 정치학적, 윤리학적, 철학적 이론 체계 구축 과정이고 『논어』의 정전 형성 작업의 결정체(結晶體)이다. 동시에 이것은 정전 『맹자』가 준비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논어』가 시적이고 간략한 문체라면 『맹자』는 산문체이고 논쟁적인 만큼 논지를 명확히 전달한다. 고전 인용에 있어서도 『논어』는 『시』를, 『맹자』는 『서』를 상대적으로 더 자주 인용했다. 전자가 아직은 주초(周初) 질서의 회복의 가능성을 믿은 결과라면, 후자는 어떤 형태로든 구체제(ancien regime)를 마감하고 신체제를 준비해야 하는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정치학적 담론, 그것도 방벌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사례들이 많은 역사서를 자주 인용하고 국가공동체의 존재 이유를 추적하고 있다. 공자가 왕의 유덕성을 요구하였다면 맹자는 이제 유덕자가 왕이 될 것을 요구하였다. 그가 민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음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맹자는 공자의 인(仁) 관념을 가치 차원에서는 인(仁)과 의(義) 개념으로 분화시켰고, 윤리 차원에서는 가족과 국가에 집중했다. 인정(仁政) 이론을 제창하면서 선진 법가류의 패도론과 당대 지배 사조이던 묵가(墨家)와 도가(道家)에 도전, 결과적으로 유가가 우위를 확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맹자에게 묵가의 위험성은 가족 공동체가 부정되는 것이었고, 도가의 위험성은 국가 공동체가 부정되는 것이었다. 공자와 맹자에게 가족과 국가는 개인이 의지하고 지켜야 할 최종 보호처였다.

2) 인(仁)의 호혜적 공감의 정치: 인정(仁政)

『논어』가 좋은 삶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였다면 『맹자』는 좋은 정치에 대한 일갈로 시작한다. 국가의 이익을 묻는 양(梁) 혜왕(惠王)에게 대뜸 군주가 이익을 다투면 군주 일인의 목숨 부지도 어렵고 모름지기 군주라면 인(仁)과 의(義)를 추구할 때 이익도 그 속에 있어서 가족도 국가도 보전한다는 어투는 듣기에 따라서 다소 섬뜩하기까지 하다.

여기서 말하는 인(仁)과 의(義)는 공자의 호혜적인 공감의 관계 원리이자 동일률의 행위 원칙으로서의 인(仁)을 각각 정치적 가치로 개념화한 것으로, 전자는 ‘사랑’을, 후자는 ‘정의’를 의미한다. 맹자에 의하면 국가가 인과 의를 추구할 때 군주의 이익에 해당하는 가족의 안전도, 국가의 질서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지 않을 경우 군주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민의 저항권을 인정하는 논리이다. ‘인의(仁義)의 정치’는 다른 곳에서 ‘인정(仁政)’ 또는 왕도(王道) 정치라고도 불리면서 『맹자』 곳곳에 등장한다. 맹자는 ‘구체적인 상대에 대한 호혜적 공감의 원리’로서의 인(仁) 개념에 입각하여 군주가 자신의 존재이유인 민(民)에 대해 호혜적 공감의 정치, 곧 민의 처지를 공감하는 정치에 대한 요구가 강력했기에 ‘인정(仁政)’이라는 개념어를 별도로 제시하게 되었다.

① 인정(仁政)의 시작: 양생상사(養生喪死)에 후회 없는 양민(養民)

『논어』에서 제시되었던 ‘부민과 교민’이라는 정치 과제는 『맹자』에게서 인정(仁政), 곧 왕도 정치의 시작과 완성이라는 이론 체계로 수용되었다. 공자에게 인(仁)은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핵심 관계윤리였지만, 맹자에게서 인(仁)은 특히 정치영역에서 민(民)에게 더 절대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덕목이었다.

맹자에 의하면 호혜적 공감의 정치 인정(仁政)은 넉넉한 양민 정책의 시행으로 시작된다. 군주의 존재 이유는 어떤 경우에도 보민(保民)이다. 맹자의 강조는 선하지 못한 현실 인간이 선해질 수 있도록 사회경제적 환경을 제공하는 데 있었다. 그 기준은 공자의 호혜적 공감 원리인 인(仁)을 치자와 피치자의 보편적 욕구의 동일성이라는 차원에 적용하여 민도 즐길 수 있는 정치일 때라고 보았다. 치자가 피치자의 욕구를 자신의 욕구로 공감하고 일체화시켜 정책으로 시행하는 정치이다. 맹자의 복지 수준 혹은 민생의 기준은 꽤 높다. 아무리 천재지변이 있어도 “최소한 아사하거나 동사하는 이는 없어야” 하고, 평화 시에는 “산 사람을 봉양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는 데 후회 없는 수준”은 되어야 한다.

② 인정(仁政)의 완성: 오륜 교육으로

맹자는 충분한 양민의 토대가 구축된 후에는 진정성 어린 교육까지 진행되어야 인정이 완성된다고 했다. 양민은 인정의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맹자는 특히 ‘오륜(五倫)’을 가장 중요한 교육 내용으로 제시하였다. 오륜(五倫)은 개인의 숱한 관계망 가운데서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보편적인 관계망을 맹자가 다섯 가지로 압축하고서 인(仁)의 원리를 적용하여 구축해야 할 호혜적 윤리를 제시한 것이다.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오륜은 인륜(人倫)의 압축적 표현으로, 그것은 ‘사람[人]으로서 행하고 누려야 할 몫[倫=차례]’이라는 뜻에서 확장되었다. 이는 관계 중심적, 역할 중심적이지만 일방적이지 않고 쌍무적이고 호혜적 관계 윤리에 입각해 있다. 오륜은 주체적 개인을 중심으로 일차 조직인 가족 윤리부터 사회, 국가 윤리를 모두 망라하면서 확산되는 국가공동체 생활 전반을 표상한다. 요컨대 오륜의 윤리학은 사회적 역할 관계 안에서 개인이 맡은 역할의 원활한 수행과 이를 통한 공동선의 실현을 목표로 삼는다.

③ 유덕자 정치론(有德者 政治論)

맹자는 양민과 교민의 인정을 펼칠 정치 주체에 대하여 유덕자(有德者) 정치론을 펼쳤다. 그는 오직 정치인은 정치의 덕, 곧 양민과 교민을 할 줄 아는 능력을 볼 것이지 출신, 나이 등 여타 변수는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서 양민과 교민이란 민의 처지, 민의 호오에 공감하는 정치를 말한다. 덕을 공공 영역에서 발휘함으로써 그 혜택[善]이 만민에게 공유되므로 맹자는 유덕자 통치론의 다른 표현을 ‘겸선(兼善)’ 개념으로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맹자의 덕(德)이 도덕성(morality)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가로서의 자질, 능력 등의 일종의 비르투(virtu) 같은 역량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역량 속에는 인민의 호오, 인민의 근심을 자신의 근심으로 삼을 줄 아는 호혜적 공감 윤리 인(仁)이 최고 덕목이다.

3) 인(仁)의 호혜적 외교론: 사대사소(事大事小)

맹자의 호혜적 공감의 행위 원칙은 외교 원리에도 적용되었다. 그의 ‘사대사소(事大事小)’ 외교 원칙이 그것이다. ‘소국도 대국을 섬기고, 대국도 소국을 섬길 것’을 의미하는 그것은 외교의 왕도를 묻는 제 선왕에게 맹자가 행한 대답이다. ‘사대(事大)’는 약소국이 현재적 힘의 차이를 인정하는 현명함에서, ‘사소(事小)’는 강대국이 약소국의 처지를 이해하는 시각에서, 또 영원한 강국은 없는 국제 관계에서 미래 자국의 평화를 기약하는 방식이다.

조선은 주지하다시피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을 취했다. 사대교린이란 명(明)과는 사대(事大) 관계를, 일본과 류큐(琉球) 등 기타 국가들과는 ‘교린(交隣)’ 관례를 취하는 노선을 말한다. 명과 행한 ‘사대’는 맹자가 말한 ‘사대사소’의 줄임말이다. 현실에서 조-명과의 사대/사소의 내용은 각각 조공(朝貢)과 책봉(冊封)의 예(禮)를 행함으로써 양국이 공식적인 동맹적 우호 관계를 맺음이다. 실제로 조선은 ㉠ ‘문명국’ 명/청과 더 가까운 반열에 오름으로써 동아 문명 공동체 내에서 보편 문명을 선진적으로 흡수하는 데 따른 자국의 위상을 높였고, ㉡ ‘강대국’ 명/청과 정치적 연대를 통해 국가안보를 확보함으로써 안보/외교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 국내적으로는 명/청 ‘천자(天子)’의 권위에 기대어 대내적으로 정권의 정통성을 획득하고 지배의 효율을 높이는 이익을 취했다.

이는 근대 이후 지금까지 지배적인 시각, 사대주의와 사대정책을 동일시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조선의 사대외교는‘명/청에 굴종하거나 그 권위에 종속당한 결과’ 가 아니고 약소국으로 나름 주권과 안보를 확보하는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사대(사소) 외교는 강대국 명/청과 약소국이지만 독자적이고 자유로운 주권 국가 조선이 호혜적으로 맺은 동맹 외교의 한 형태였다.

4) 인의(仁義)와 부끄러움[恥]의 도덕학

『맹자』에서는 원리로서의 인(仁) 개념을 명확히 하는 한편 개별 덕목으로서의 인(仁)에 대해서도 인(仁)과 의(義)의 두 가지 윤리적 가치 혹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사덕(四德)으로 체계화시키면서 심성론과 도덕론을 구성했다.

먼저 맹자는 이상적인 공동체 생활의 추구가치로서 호혜적 공감의 인(仁)만이 아니라 의(義)를 동시에 제시하였다. 공동체 생활에 최고의 가치는 사랑과 배려의 인(仁)이 요구되지만 이것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경계로서의 옳고 그름이라는 정의의 영역 의[義]의 기능이 수반되므로 인의(仁義) 두 가치를 동시에 제시하였던 것이다.

둘째, 맹자는 인간이 타인에 대해 공감할 줄 아는 능력을 인간의 본성과 관련하여 탐구하였다. 그는 덕성[virtue]으로서의 인(仁)에 대해서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사덕(四德), 곧 네 가지 도덕성(morality)으로 세분화하였다. 이 사덕은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의 사단(四端)이라는 일종의 도덕감정(moral sentiments)이 실천되어 체화될 때 발현되는 덕목이다. 맹자에 의하면 이 사단을 항시 실천하여 사덕을 보유하는 삶이 온전한 삶이고 완성된 인간의 삶인 것이다. 맹자에게 사단은 인간과 비인간을 경계짓는 기준이고, 사덕은 완성된 인간과 한계적 인간의 경계였다.

셋째, 맹자는 인간을 도덕적 주체로 자리매김하는 가장 토대에 부끄러움[恥, ?, 愧]이라는 가장 진솔한 자기성찰 능력을 꼽았다. 곧 맹자의 사단과 사덕의 이론적 토대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인간의 본성적 능력에서 출발한다. 맹자는 사단을 보유함에도 이를 실천하지 못하여 현실에서 사덕을 갖추지 못하는 현실의 인간은 최소한 그러한 자신을 부끄러워할 줄은 알아야[恥] 인간이라고 하였다. 맹자에게서 부끄러움은 인간만이 누리는 당위의 규범이 도출되는 원천이고 정의의 가치가 정립되는 토대이다.

따라서 맹자는 통렬한 자기반성을 통해 하늘을 우러러, 아래로 사람들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부모형제가 모두 함께 하고, 천하의 영재들을 교육하는 일들과 더불어 자신의 좋은 삶으로 꼽았다. 그런데 나머지 두 요소는 엄밀히 따지면 운명이라는 외적 측면도 있는 만큼 스스로에게만 완전한 책임이 귀결되는 부분은 ‘한 점 부끄럼 없이 산 삶’인 것이다.

5. 결론: 부끄러움과 문명

사대지국 청(淸)이 부끄러운 짓을 했다. 1882년 임오군란을 핑계로 조선에 들어왔다가 주둔하고 1894년 10월 일본에 패해서 쫓겨나갈 때까지 조선에 대해 전에 없던 내정 간섭을 하였다. 심지어 그간 유지되어온 사대사소의 원리는커녕 영약삼단(?約三端)까지 요구할 정도로, 사대의 국가로서의 체모를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조선인들에게 청은 더 이상 ‘사대의 나라’가 아니라 ‘오랑캐 떼놈’일 따름이었다. 외양은 사대(사소) 질서였지만 속은 힘에 의거한 근대 공법 질서였고, ‘외유내서(外儒內西)’였다. 그런데 청이 이렇게 사대(사소)의 예를 완전히 무시한 것은 유사 이래 처음으로 힘의 근대 공법 질서 앞에서 서양 국가들에 국가적 무례(無禮)뿐만 아니라 주권까지 유린당한 후 조선에도 그대로 행하였다.

아시아의 유일한 근대 제국주의 진입 국가 일본은 더 부끄러운 짓을 했다. 1894년 5월(음력) 조선 정부가 거듭 거부하는데도 군사 원조라는 미명하에 군대를 조선에 주둔하더니 6월 21일 야밤에 엄연한 주권국가 조선의 정궁 경복궁을 기습적으로 무력 점령하고 국왕을 협박하면서 조선을 보호하고 자주를 돕는 중이라고 후안무치한 명분을 내걸었다.

그렇게 시작된 일제강점기, 식민지 근대가 막바지이던 1941년, 조선인 청년 시인 윤동주의 순한글 시에서 문득 맹자를 만난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仰不愧於天)’. 제국주의도 모자라 전 세계를 전화(戰禍)로 뒤덮는 무법무도한 시대를 살아내면서도 오히려 그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세상에 대해 한 점 부끄럼 없이 살 것을 성찰하고, 또 그렇게 살 것을 맹서한다. 그것은 존재하는 날까지 어느 한 순간이라도 자신과 세상에 대해 불쌍하고 측은하게 바라보는 마음, 불의한 상황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응징하는 마음을 행여라도 놓칠까[放心], 그리하여 인간답지 못할까 자신에게는 깊이 성찰하고 동시에 불인불의한 세상에 보내는 강한 질타이기도 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동주에게 인의는 본성을 넘어 그렇게 실천되었었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의 후예인 우리 스스로에게 동주 정신은 얼마나 살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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