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의 숨은 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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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숨은 코드
  • 이상억·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 승인 2019.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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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40대의 디자이너 이도(李祹, 즉 세종대왕)는 화선지에 묽은 먹으로 여러 방향의 획을 그어 보고 있었다. 가로 세로 직선과 사선 및 원, 점 등이 보였다. 새 문자를 구상해 보고 있는 것이다.” (졸저|디자이너 세종의 독창성: 한글의 숨은 코드, 2014, 역락. p.)

디자이너 자신도 몰랐겠지만, 수평·수직선 등을 택한 결과는 아래에 보인 꽉 짜인 조형미에 이르게 한다. 우선 ㄱ부터 ㅂ까지를 한 개의 네모 속에 가지런히 채워 넣을 수가 있을 것이다. 예상치 않던 네모 규격 속에 자음의 조형성을 입증하였다.

그 다음 ㅋ, ㅌ, ㅍ을 더 포함시켜 ㄱ부터 ㅍ까지를 더 큰 네모 속에 가지런히 채워 넣을 수가 있을 것이다. 위의 초기 모형을 조금 바꿔 도출한 디자인의 정제성은 수직 수평선의 일사불란한 조합에서 이미 잉태된 것이다.

▲ 졸저, 조선시대어 형태 사전, 2017, 표지
▲ 졸저, 조선시대어 형태 사전, 2017, 표지

나머지 ㅅ, ㅇ, ㅈ, ㅊ, ㅎ도 다음 책 장정 맨 위의 한 형상에 다 집약해 넣을 수 있다.

▲ 졸저, 디자이너 세종의 독창성: 한글의 숨은 코드, 2014. 표지
▲ 졸저, 디자이너 세종의 독창성: 한글의 숨은 코드, 2014. 표지
▲ 그림1

맨 위 형상은 다시 다음 단계의 비밀을 열 수 있는 열쇠 구멍이었던 것이다. 이 형상[훈민정음으로 명명, 뒤에는 한글]에 감춰져 있는 ‘코드’를 읽어 가는 과정은 꽤 상상력이 필요하다. 구멍 밑의 열쇠 같은 모양(그림1 참조)에 대해서는 용의주도한 모음의 디자인 과정을 아래에 훑어 본 뒤 다시 돌아와 보자.

점 ·, 수평선 ⼀, 수직선⼁를 기본으로 소위 ‘모음’을 만들었다. 대부분의 문자를 만들 때 흔히 “수직선, 수평선, 사선, 원” 등의 획을 사용하여 결합시킬 수밖에 없는 원천적인 제약이 있기 때문에 필연적 내지 체계적 일치를 보이는 유사성이 생겨 (일부 문자들은) 서로 비슷해지는 것이다.(이상억, 2002, 「훈민정음의 자소적(字素的) 독창성」, 고영근 외, 「문법과 텍스트」, 서울대 출판부)

원래 ㅣ+·, ·+ㅣ, ·+ ─, ─ +· 조합이 ┣ ┫┻ ┳의 결합으로 발전되었고 여기서 다시 ㅏㅑㅓㅕ, ㅗㅛㅜㅠ, ㅐㅔㅒㅖ, ㅘㅝㅙㅞ, ㅢㅚㅟ 등이 방사선형으로 확산된 것이다. 이 가획 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ㅒ, ㅖ, ㅙ, ㅞ  네 글자가 표지 아래 부분의 도형 같이 추가된다.

열쇠 구멍에 들어갈 열쇠 같은 모양(그림1 참조)은 모든 모음이 파생돼 나올 수 있는 원형이며, 이 ‘코드’를 찾아냄으로써 숨은 비밀을 여는 극치에 도달하는 경지를 보여 주었다 하겠다.


이상억·서울대 국문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대학교(Urbana)에서 언어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옌칭연구소 연구원, 고려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독일 뮌헨 및 보훔 대학교 연구교수, 서울대학교-UCLA 한국 내 한국어문화교육과정 책임자, 국제한국언어학회(ICKL) 회장, 서울대학교 미주센터 설립단장 겸 UCLA한국학 강의 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2006년에는 제55회 서울시 문화상 인문과학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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