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를 완성하고 근대를 열어젖힌 동아시아 ‘정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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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완성하고 근대를 열어젖힌 동아시아 ‘정치 이야기’
  • 김한나 기자
  • 승인 2020.06.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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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정담: 동아시아의 군주론, 일본의 근대를 열다 | 오규 소라이 지음 | 임태홍 옮김 | 서해문집 | 332쪽
 

‘동아시아 고전 시리즈’는 동아시아 지성사의 숨겨진,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텍스트를 소개한다. 30년간 역사·고전 출판에 천착해온 서해문집이 공들여 채집한 이 시리즈는 수 세기 앞을 내다본 원전의 통찰과 격조 있는 번역에 힘입어, 동아시아적 보편과 각국의 특수가 부딪히고 스미는 근사한 지적 풍경을 그려 보인다. 오규 소라이의 『정담』을 시작으로, 일본 자본주의와 장인정신의 원류가 담긴 『도비문답』, 근대 일본의 이념적 뿌리인 난학의 발전과정을 채록한 『난학사시』가 출간된다.

『정담』은 ‘동아시아의 군주론’으로 불리는 에도시대 일본의 고전으로, 최고권력자인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요청으로 대학자 오규 소라이가 집필한 ‘현실정치 이야기’다. 주자학의 고답적 공리공담을 벗어나 현실에 바짝 다가선 ‘지식인적 유학자’인 소라이는 ‘정치와 도덕의 분리’로 대표되는 그의 ‘근대적 정견’들을 이 책에 빼곡히 담아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이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다”며 한탄한 바 있는 ‘소라이학(學)’의 정수가 바로 『정담』이다.

오규 소라이는 에도 시대(1603~1868) 사상가이다. 쇼군의 건강을 책임지는 어의의 아들로 태어난 소라이는 부친이 탄핵과 유배를 당하면서 소년·청년기를 벽지에서 보냈고, 그곳에서 기층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생생히 목도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이 당대의 유학자-정치인들과 ‘다른 생각’을 품는 계기가 됐다고 회고한다. 소라이는 무엇보다 기존 성리학(주자학)의 형이상학적 담론을 “억측에 기반한 요설”이라 신랄하게 비판하며, 가시적이고 경험론적인 실천윤리와 그 작동기제로서 정치를 강조했다. 요컨대 관념보다 현실을 우선함으로써 정치에서 도덕을 분리해낸 것이다. 유학자로 출발해 기존 유학을 혁파한 이런 신선한 학풍은 ‘소라이학’으로 명명되며 일가를 이루었고, 바다 건너 조선에까지 이름을 떨치게 된다. 실제로 한 세대 뒤 조선의 탈주자학-반주자학 흐름을 주도한 정약용은 소라이학을 두고 ‘찬란한 문체’라는 최량의 찬사를 보낸 바 있다.

▲ 오규 소라이(荻生徂徕, おぎゅう そらい)
▲ 오규 소라이(荻生徂徕, おぎゅう そらい)

학자로서 성가를 높이던 소라이는 당대의 실력자 야나기사와 요시아스의 가신으로 발탁돼 현실정치에 발을 들인다. 그는 부모를 버린 자를 벌하는 대신 패륜의 직접 원인인 빈곤을 초래하고 방조한 정치인의 죄를 묻는 등 파격적인 주장을 거듭하며 주자학의 도덕관념에 젖어 있던 정가에 파급을 일으켰다. 만년에 이른 소라이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정치적 조언자로 자리매김한다. 이 책은 이 시기 쇼군의 자문에 응한 소라이의 정견을 묶은 것이다. 소라이의 유작이자 그의 세계관과 학문적 방법론의 정점에 위치한 작품이지만 최고 권력자를 위한 비밀스런 조언이 담긴 만큼 탈고 즉시 봉인되었고, 세간에 상재된 것은 메이지유신이 일어나던 1868년에 이르러서였다. 최초로 공개될 때 이미 150년 전의 생각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소라이가 제시한 정치-경제-사회질서 분야의 개혁안과 그 정책을 실행할 인재의 등용과 처우에 관한 전방위적 통찰들은 한 세기 반 넘는 시간의 풍화를 넉넉히 견뎌내며 막 근대로 진입하던 일본사회를 다시 한번 크게 격동시켰다.

그렇다면 또 한 번의 15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어떨까? 소라이와 『정담』을 니콜로 마키아벨리와 『군주론』에 견준 바 있는 20세기 일본 정치학계의 덴노(천황) 마루야마 마사오는 대표작 『일본 정치사상사 연구』에서 소라이가 일본의 근대를 개척하고 정치를 발견했다고 진단함으로써, 이 동아시아 클래식의 시효와 지평을 현대로까지 확장해낸 바 있다. 가까운 시일에 마루야마의 평가가 뒤집히지는 않을 것 같다. 『정담』은 여전히 쓸모 있는 ‘현실정치 이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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