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숲, 그리고 바다가 살아 숨쉬는 경남 사천
상태바
하늘과 숲, 그리고 바다가 살아 숨쉬는 경남 사천
  •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 승인 2020.06.21 1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혜숙의 여행이야기]_경남 사천 3번 국도, 삼천포에서 선진리까지

사천 땅은 나비의 날개를 닮았다고 한다. 날개 사이로 깊숙이 내륙을 향해 들어간 바다가 사천만이다. 이순신 장군이 처음으로 거북선을 출전시켜 승전했던 그 바다. 만의 동안과 서안은 모습도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서안은 갯벌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하지만 동안은 비교적 매끈하다. 남해군 미조면에서 출발한 3번 국도는 사천시 대방동을 지나 사천만의 매끈한 동안을 따라 달린다. 대방동. 과거의 삼천포다. 이제 삼천포는 없는데, 늘 ‘삼천포 간다’고 한다. 가면, 아직은 삼천포가 있다.

▲ 창선-삼천포대교. 가운데 섬이 모개도로 앞쪽의 사장교는 삼천포대교, 뒤쪽의 아치교는 초양대교다.
▲ 대방군영숲. 고려 말부터 조선말까지 이곳에 주둔했던 수군기지의 군사들이 훈련하고 쉬던 숲.

삼천포대교가 허공을 가르며 활공한다. 그 곁을 줄지은 새처럼 케이블카가 난다. 까마득한 새처럼 고요하다. 삼천포대교는 사천시 대방동과 남해군 창선도를 연결하는 ‘창선-삼천포대교’의 일부다. 각기 다른 모양과 형식의 삼천포대교, 초양대교, 늑도대교, 창선대교, 단항교 총 5개의 다리가 모개도, 초양도, 늑도를 디딤돌 삼아 이어진다. 삼천포대교 입구 서쪽에 ‘삼천포대교공원’이 있다. 넓은 주차장이자 광장이고, 또 전망대고 산책로다. 삼천포대교 동쪽 아래는 숲이다. 팽나무와 느티나무 등의 활엽수 몇 그루가 있는 작은 숲이지만 그늘이 아주 짙어 나무가 수백 그루는 되는 듯하다. 대방 군영 숲, 일명 군인 숲이라 부른다. 삼천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다. 세금으로 거둔 쌀을 보관하는 창고를 설치하자 사람들이 모여들어 삼천리라는 마을이 생겼다. 개성까지 물길 따라 삼천리나 되는 먼 곳이라는 뜻이었다. 고려 말에는 왜구의 노략질을 방비하기 위한 수군 기지를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진성을 쌓고 방어기지로 활용했다. 상주하던 군인들은 이 숲에서 훈련하고 쉬었다고 한다.

▲ 군영 숲 뒤편은 옛 조선소 거리다. 이름 희미해진 해원조선.
▲ 해원조선. 선명한 간판이 영화로웠던 시절을 소환한다.

숲의 이면은 대방마을의 오래된 골목길이다. 몇몇 식당을 지나면 낡은 건물들이 좁은 골목을 그리고 있다. 옛 조선소 거리라 한다. 높은 담장의 조선소는 지금 폐선처리장으로 바뀌었고 주변에는 조선소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다. 조선소는 70, 80년대가 전성기였고 지금은 소규모 조선소들이 사천시 곳곳에 점점이 남아 있다. 빼빼마른 콘크리트 벽에 ‘해원조선’이라는 이름이 희미하게 보인다. 몇 걸음 뒤 ‘해원조선’ 사무실이 영화처럼 나타난다. 벽에는 금이 가고 미닫이문은 낡았지만 박공의 이음새는 완벽하고 나무판에 새겨진 조선소 이름은 선명하다. 조선소 옆의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해변이 열린다. 그리고 곧 촘촘하게 쌓인 석축 위로 울창한 숲이 보인다. 석축 위로 오르면 입이 딱 벌어진다. 비밀의 요새, 대방진굴항이다. 굴항은 고려 말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 시설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은 이곳에 거북선을 숨겨두었다가 지나가는 왜선을 침몰시켰다고 한다. 석축과 푸른 숲에 안겨 숨은 굴항은 미끈한 곡옥의 모습이다. 이제 굴항은 주민들의 선착장이고 주변은 민가다. 이순신 장군이 굴항 석축에 우뚝 서서 삼천포 내항 너머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대방진굴항. 고려 말 왜구를 막기 위해 설치한 군항 시설의 하나로 이순신 장군이 이곳에 거북선을 숨겨두었다고 한다.
▲ 이순신 장군이 굴항 석축에 우뚝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계신다.

대방동의 서쪽은 실안동이다. 실안(實安). 열매가 가득하고 편안한 곳, 사천만 동쪽 해안의 가장 남쪽마을이다. 낙조로 유명한 바다, 낚시로 유명한 해안, 아직 원시적인 방법으로 멸치를 잡는 마을. 길 가에 은빛 멸치들이 누워있다. 상처 없는 피부가 반짝거린다. 잔잔한 실안 바다에 참나무 말뚝이 촘촘히 박혀 있다. 태곳적부터 사용해 온 고기잡이 그물인 죽방렴이다. 죽방렴은 물길이 좁고 물살이 세고 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은 곳에 설치한다. 하늘에서 보면 V자 모양이다. V자의 꼭짓점에 자루그물을 걸어 두는데, 그물은 밀물 때는 열리고 썰물 때는 닫힌다. 밀물 때 들어온 물고기는 썰물 때 빠져나가지 못한다. 그러면 뜰채로 건져내면 그만이다. 실안 바다는 “물빨이 억수로 쎄”다. “그 물살을 이기려면 힘이 쎄질 거고, 그러니 멸치가 육질이 좋지예.” 작업장의 어둑한 그늘 속에서 어부가 멸치를 삶고 있다. 그리고 살짝 삶은 멸치를 커다란 채반으로 떠 올린다. 우락부락한 검붉은 팔뚝이 바다를 가뿐히 들어올린다. 실안 바다의 멸치는 힘이 세고, 어부는 더 힘이 세다.   

▲ 실안의 죽방렴 멸치. 상처가 없고 육질이 좋다.
▲ 실안 바다의 원시 어업 죽방렴. 밀물과 썰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는다.

실안에서 고개를 넘어 북향한다. 한동안 청량한 산길이 이어지다 스르르 내려서면 요트와 모터보트 등이 정박해 있는 삼천포 마리나다. 주변에 밭이 많다. 포도밭이다. 바닷가에 초록의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한없이 바라볼 수도 있겠다. 밭고랑에 누워 포도 잎 그늘 덮고 파도소리 들으며 이따금 손 뻗어 포도알 따먹으면 얼마나 좋을까. 포도밭이 사라지면 모충공원이 나타난다. 숲이 울창한 자그마한 곶. 달래끝 혹은 월천포(月川浦)라 부르며 동네 사람들은 거북등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초소가 있었다. 옛날 노산 이은상 선생은  충무공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하면서 이곳에서 시를 남겼다. 모충공원을 지나면서 해안도로는 사천대로가 된다. 바다 쪽 너른 논공단지를 멀찍이 바라보며 달리는 길이다. 바다가 완전히 멀어지기 전 선진리성(船津里城)이 있다. 선소가 있었던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는 고려 때 조창을 설치하면서 쌓은 토성이 있었다. 토성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가 그 주변에 돌을 쌓아 석성이 되었다. 선진리성은 왜성이다. 이곳에서 두 번의 전투가 있었다. 1592년 이순신 장군은 승리했고 1598년 조명 연합군은 패배했다. 성 앞에 조명군총이 있다. 왜군은 숨진 연합군의 코와 귀를 잘라 본국으로 보냈다. 이후 사람들은 남은 시신 위에 흙을 덮어 주었다. 그것이 지금의 무덤이다.  

▲ 선진리성.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왜성이다. 성 안에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심은 벚나무가 가득하다.
▲ 선진리성의 사령탑격인 천수각터에는 순국한 우리 공군장병을 기리는 충령비가 서있다.
▲ 선진리성의 남쪽 종포산업단지 근처에 있는 작은 섬 죽도.

원래 선진리성은 서, 남, 북쪽이 모두 바다와 맞닿아 있는 곶이다. 지금은 서쪽만이 바다와 마주하고 있다. 남쪽과 북쪽은 대규모 산업단지다. 사천만의 동안에도 옛날에는 갯벌이 많았다. 그 많던 갯벌은 이제 논공단지, 산업단지로 변했다. 사천만 서쪽 사람들은 불만이 많다고 한다. 그들에게 갯벌을 메워 세운 산업단지는 성공 사례다. 남쪽 산업단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높고 긴 담장에 줄줄이 달린 보안카메라가 따라온다. 반듯반듯하게 뻗은 산업로에는 보안 차량이 느리게 배회하고 있다. 가까운 바다의 작디작은 섬은 탯줄 같은 길을 하얗게 내놓고 있었다.    


류혜숙 여행칼럼니스트

대학에서 불문학을, 대학원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대학시절 무가지 음악잡지 ‘Hole’을 만들었고 이후 무가지 잡지 ‘문화신문 안’ 편집장을 잠시 지냈다. 한겨레신문, 주간동아, 평화뉴스, 대한주택공사 사보, 대구은행 사보, 현대건설매거진 등에 건축, 여행, 문화를 주제로 글을 썼으며 현재 영남일보 여행칼럼니스트 겸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내 마음의 쉼표 경주 힐링여행』, 『청송의 혼 누정』, 『물의 도시 대구』(공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