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오야기 쓰나타로, 조선사를 유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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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야기 쓰나타로, 조선사를 유린하다
  • 임병태 기자
  • 승인 2020.06.2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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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소개]

■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조선정탐과 출판활동 | 최혜주 지음 | 한양대학교출판부 | 332쪽
 

개항 이후 조선에 건너와 체류하면서 활동한 일본인 가운데 아오야기만큼 조선에 대해 많은 저서를 남긴 인물도 드물다. 그는 조선에 정통한 지식인으로 총독관저를 드나들며 총독정치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으로 식민통치에 협력했다. 그럼에도 그에 관한 연구는 그다지 알려진 것이 없는 실정이다. 이 책은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은 대표적인 재조일본인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행적을 검토하여 그가 어떠한 방법으로 식민통치에 참여했는지 밝히는 작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나아가 식민사학의 성립과정과 그 내용을 정리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현재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에 대한 이해의 토대를 마련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오야기 쓰나타로(靑柳綱太郞, 1877-1932, 호는 南冥)는 대한제국 시기에 내한하여 부산 지역의 교사와 [간몬신보(關門新報)], [오사카마이니치(大阪每日)신문]의 통신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선 사정을 조사하였다. 그 후 통감부에 소속되어 우편국장을 맡고, 재정고문부 재무관과 궁내부 주사를 역임했다. 퇴관 후에는 조선연구회와 경성신문사를 경영하면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대표적 어용언론인이다.

아오야기는 1910년에는 병합을 기념하여 조선연구회를 만들어 조선통치에 필수적이었던 조선 사회에 대한 실태 파악에도 주력하여 조선의 문화, 풍속, 민족성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민간연구자인 아오야기의 해석은 엄밀한 근대적 사료비판에 기초한 근대 실증주의 사학과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면 아오야기는 신라의 왕족 3성의 시조, 즉 박혁거세와 석탈해와 김알지가 모두 일본인이라는 근거없는 주장을 계속했고, 후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의 연구결과는 러일전쟁 이후 식민통치기에 걸쳐 조선에 이주하려는 일본인들에게 조선을 소개하는 안내서 역할도 했다. 문제는 그들이 그의 왜곡된 조선관을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 조선을 인식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폐해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내한 후의 활동 목적은 천황제를 침투시키고자 하는 식민정책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그가 식민통치 자료로 제공하기 위해 조선관련 서적을 간행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식민사학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는 현재 한일 관계의 현안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를 생각할 때, 역사왜곡의 원류로서 그의 행적이 시사하는 바가 큰 인물이다.

전체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1장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정한론의 대두과정과 관련하여 아오야기의 고향 사가(佐賀)현이 어떠한 곳인지 살펴보았다. 그의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오기까지 어떠한 교육을 통해 사상적 세례를 받았는지 검토했다. 2장에서는 아오야기가 일본 신문의 통신원으로 내한해서 통감부 관료로 생활하면서 낭인(浪人)들과 교류하며 병합을 추진한 과정을 담았다. 3장에서는 병합을 기념하여 설립한 조선연구회의 역할과 성격을 검토하고 다른 고서간행사업 단체인 조선고서 간행회와 자유토구사의 조선고서 간행 실태를 다루었다. 4장에서는 아오야기가 식민통치를 위해 총독에게 어떻게 협력했으며 그가 주장하는 대일본주의의 내용은 무엇인지 분석했다. 5장에서는 일본의 제 2고향인 ‘신일본’을 조선에서 어떻게 건설하려고 했는지 알아보고, 부원 개척의 방법과 대일본주의 실현을 통한 대륙경영 모색에 대해서도 분석했다. 6장에서는 아오야기는 3·1운동의 원인을 어떻게 분석했으며 조선인의 민족성이 어떻게 개조되기를 바라는지 규명했다. 7장에서는 아오야기의 조선사 인식의 문제점이 무엇이며 역사를 어떻게 왜곡했는지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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