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장(物故狀)을 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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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장(物故狀)을 올려라!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06.1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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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⑦_고을 수령의 죄인 장살(杖殺) 관행

태형 집행 권한을 쥔 고을 수령

조선왕조에서는 지금처럼 행정권과 사법권이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못했다. 자연히 수령들은 행정 외에도 고을에서 일어나는 민, 형사 사건에 대한 수사, 재판 업무도 함께 수행하였다. 그런데 수령이 스스로 집행할 수 있는 형벌의 상한은 태형(笞刑) 50대까지였다. 이보다 중대한 사안은 수령이 자체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고 반드시 상부 관청에 보고하여 그곳에서 형을 확정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태형을 가할 수 있는 수령에 비해 관찰사는 유배형까지 집행할 수 있었다. 또 살인 사건과 같이 법정 최고형으로 처리할 사안은 중앙에 보고되어 국왕이 사형을 결정하는 구조였다. 여기서 태형은 당시 시행되던 다섯 가지 형벌인 오형(五刑:태형, 장형, 도형, 유형, 사형)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인데, 태(笞)로 죄인의 볼기를 10대부터 최대 50대까지 칠 수 있었다. 따라서 수령이 태형 50대를 넘기면 이는 요즘 표현으로 직권 남용에 해당한다.

▲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린 태, 장, 신장의 규격. 태형을 집행할 때는 제일 오른쪽에 실린 태(笞)를 사용했다. 태의 지름은 1센티미터가 채 안되고, 길이는 1미터 조금 넘었다.
▲ 『흠휼전칙(欽恤典則)』에 실린 태, 장, 신장의 규격. 태형을 집행할 때는 제일 오른쪽에 실린 태(笞)를 사용했다. 태의 지름은 1센티미터가 채 안되고, 길이는 1미터 조금 넘었다.

이웃 나라 중국은 어땠을까? 청나라에서도 조선과 마찬가지로 지방관이 스스로 재판을 통해 형을 집행할 수 있는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 예컨대 조선의 수령에 해당하는 청나라 지현(知縣)의 형벌의 한도는 장형 100대이다. 그 이상은 부(府)로 보내고 더 무거우면 또 성(省)으로 보냈으며 최종적으로 사형의 결정권은 황제가 가졌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청과 조선에서 지방관이 종종 상부 보고 없이 스스로 죄인의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다음에 살펴볼 청의 광동성 조주부에 속한 조양현(潮陽縣)의 지현으로 파견된 남정원(藍鼎元)이 관내 사이버 교주를 처형한 일화가 그러한 예이다.

청나라 조양현에서의 사이비 교주 처형

청 옹정제(雍正帝)가 재위하던 당시 조양현에서는 백성을 어지럽히는 신흥종교가 유행했는데, 후천교(後天敎)라는 것이 그 중 하나였다. 지현 남정원의 조사에 따르면 그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첨여삼(詹與參)과 주아오(周阿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교의 교주(敎主)는 첨여삼의 처이자 묘귀선고(妙貴先姑)를 자칭하는 임(林)씨 성을 가진 여자였는데, 마법을 알아서 바람과 비, 귀신을 언제든지 부릴 수 있다고 떠벌렸다. 이 후천교주 임씨는 남편 외에 호아추(胡阿秋)라는 샛서방을 두었는데, 둘이 같이 백성들을 꾀어 영험한 부적을 만든다든지 병을 낫게 하는 신령한 물을 조제한다든지 아이가 없는 사람에게는 아이를 주고 과부에게는 밤에 살며시 죽은 남편을 재회시켜 준다든지 하는 등의 거짓 술수를 행했다. 그러자 이 고을뿐만 아니라 각지의 사람들이 불원천리 달려와서 주머니를 탈탈 털어 공물을 사서 재물을 바쳤다.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제자로 입문하겠다는 자도 부지기수였다. 그야말로 문전성시가 따로 없었다.

▲ 남정원(藍鼎元) 초상. 청조 복건성 장포현 사람으로 1727년 광동성 조양현(潮陽縣)에 부임하여 처리한 일을 기록한 『녹주공안(鹿洲公案)』을 남겼다.
▲ 남정원(藍鼎元) 초상. 청조 복건성 장포현 사람으로 1727년 광동성 조양현(潮陽縣)에 부임하여 처리한 일을 기록한 『녹주공안(鹿洲公案)』을 남겼다.

1727년 11월 10일, 출장 갔다가 관아에 돌아온 남정원은 이들이 엄청나게 큰 교당(敎堂)을 짓고 손님 수 백 명을 초대하여 광대를 불러 이틀째 낙성식 축하잔치를 벌인다는 사실을 보고받는다. 자칫 신령님께 무례를 범했다가는 천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남정원의 체포 명령에도 예하 관속들이 출동하려 하지 않자 이들을 일망타진하러 그가 직접 출동하였다. 결국 교당을 수색하여 나무도장, 보화경(寶火經)이라는 해괴한 경전, 호아추가 여장을 할 때 입던 가발과 여자 의상, 신자들의 의식을 빼앗는데 쓰는 마취용 민향(悶香) 등을 압수하고, 교주인 묘귀선고라는 여자를 비롯한 주모자 10여 명을 체포했다. 이제 다른 악질범죄처럼 중앙정부에 사건을 보고해서 관련자들을 사형으로 다스리는 일만 남았다. 사교로 백성들을 혹세무민하고 재물 빼앗는 행위는 중죄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정원은 다른 방법을 택한다.

남정원은 중앙정부에 보고하면 고을 백성들이 당할 피해가 크다는 점을 감안하여 사건을 자기 선에서 매듭짓기로 결정한다. 즉 이 사건의 관련자들이 너무 많아 재판에 연루되어 많은 백성들이 증인으로 끌려나와 고초를 겪는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추문에 관련된 사람들 명부는 모조리 태워 없애고 더 이상 문제삼지 않기로 했으며, 첨여삼을 비롯한 종범 10여명은 장형으로 마무리했다. 다만 주범인 임묘귀와 호아추 두 사람은 장형 100대에 처한 다음 큰 칼을 채워 현청 대문 밖에서 망신을 당하게 하고 백성이 마음대로 형벌을 가해도 좋다고 벽보로 써 붙였다. 그러자 그들에게 속았던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들어 저마다 욕을 퍼부으면서 돌팔매질을 해대는 바람에 이들은 그만 돌에 맞아 죽고 말았다.

이처럼 남정원은 많은 백성들의 희생과 민폐를 피하기 위해서 이 사건을 중앙에 보고해서 사형에 처하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 대신에 후천교 주모자만 백성들의 손에 죽게 함으로써 현내에서 사건의 결말을 냈다. 당시 죄상이 명백한 경우에 중앙정부에 보고하지 않고 현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묵인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 청말 관아에서 복부에 매질을 하여 죄인을 장폐(杖斃)시키는 장면. 죄인의 머리와 다리를 두 사람이 고정하고 매를 가하려는 장면이 보이며, 그 옆에는 이미 물고된 여러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이백원(李伯元)의 소설 『활지옥(活地獄)』 수록.
▲ 청말 관아에서 복부에 매질을 하여 죄인을 장폐(杖斃)시키는 장면. 죄인의 머리와 다리를 두 사람이 고정하고 매를 가하려는 장면이 보이며, 그 옆에는 이미 물고된 여러 사람의 모습도 보인다. 이백원(李伯元)의 소설 『활지옥(活地獄)』 수록.
▲ 칼 찬 두 명의 승려. 여색과 아편에 빠진 승려 두 명이 소주(蘇州)의 성황묘 입구에서 칼을 찬 채 조리돌림 당하는 장면. 『점석재화보(點石齋畫譜)』 1884년 11월 22일자.
▲ 칼 찬 두 명의 승려. 여색과 아편에 빠진 승려 두 명이 소주(蘇州)의 성황묘 입구에서 칼을 찬 채 조리돌림 당하는 장면. 『점석재화보(點石齋畫譜)』 1884년 11월 22일자.

수령의 죄인 장살 관행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

사실 청대에 고을을 떠나 성(省)에서 재판을 받을 경우 증인들까지 자기 비용으로 출두해야하므로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서 본 조양현에서 일어난 후천교 사건처럼 현에서 종종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그 방법은 지현이 장형을 강력하게 집행해서 죽게 하는 장폐(杖斃), 감옥에서 죽이는 옥폐(獄斃), 식사를 주지 않고 굶겨 죽이는 수폐(瘦斃)가 있었다는 것이 중국사 연구의 대가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의 분석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땠을까? 조선왕조에서도 지방 고을의 수령이 관찰사의 묵인 내지 지휘 하에 조정에 보고하지 않고 사형죄를 범한 중죄인에게 형장을 가하여 장살(杖殺)시키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조선왕조로 가보자.

▲ 곤장. 군법을 집행하거나 도둑을 다스릴 때 썼으며, 사진 속 곤장은 대곤(大棍)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곤장. 군법을 집행하거나 도둑을 다스릴 때 썼으며, 사진 속 곤장은 대곤(大棍)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817년(순조 17) 전라감사에 임명된 이노익(李魯益)은 부임하자마자 온갖 비리의 온상으로 감영의 아전 최치봉(崔致鳳)에 주목한다. 여러 고을의 부정한 아전들의 괴수(魁首) 역할을 자행한 최치봉은 해마다 돈 수십만 냥을 각읍 아전들에게 나눠주고는 고리대의 밑천으로 삼아 백성들을 수탈했으며, 감사가 수령의 잘잘못을 탐문할 때면 엉뚱하게도 매번 최치봉의 손을 거쳐 내용이 뒤바뀌는 등으로 도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이같은 상황을 간파한 이노익은 부임한 지 10여 일만에 최치봉을 긴급히 체포하여 선언한다. “너의 죄가 죽어야 마땅하다”고.

이어 관내 여러 고을의 수령들에게 보내 최치봉을 매질하도록 하고는 마지막으로 고창현감 심한영(沈漢永)에게 명령하여 즉시 최치봉의 물고장(物故狀)을 올리라고 명령한다. 여기서 물고장이란 죄인이 죽은 사실을 적은 보고서를 말하는데, 따라서 물고장을 올리라는 말은 고창현감이 최치봉에게 엄히 매질하여 장살하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는 의미이다. 이 때 최치봉은 다음날 점심때까지만 목숨을 부지해달라고 심한영에게 빌었다. 자신이 결탁하고 있던 중앙의 재상들에게 호소하여 살 길을 도모하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현감 심한영은 그를 즉시 때려서 죽이고 만다.

▲ 서유구 초상. 농업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집필한 학자로 전라감사를 역임했다.
▲ 서유구 초상. 농업 백과사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집필한 학자로 전라감사를 역임했다.

사형 결정 권한이 없는 지방의 관찰사나 수령이 죄인을 장살시키는 관행은 서유구(徐有榘)가 전라감사 재임 중에 쓴 공문을 모은 『완영일록(完營日錄)』에서도 확인된다. 1834년(순조 34) 5월에 관내 무주부에서 박동이(朴同伊)란 자가 강도 방화를 저질러서 불행히 백성 한 명이 불에 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보고를 받은 서유구는 범인 박동이가 체포되어 오면 즉시 곤장으로 때려죽인 후 물고장을 올리라고 운봉현감(雲峯縣監) 유상호(柳相鎬)에게 지시한다.

당시 운봉현감은 도적 체포 업무를 전담하는 영장(營將)을 겸하고 있었는데, 서유구는 강도 방화범의 경우 주범, 종범 모두 법전에 사형으로 다스리게 되어 있는 데다 당시 흉년이 든 힘든 상황이므로 즉시 처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조정에 보고하더라도 어차피 사형죄 선고가 명백한 죄수 아닌가!

다산 정약용, 관찰사의 지시로 강도를 때려죽이다

한편 이보다 앞선 정조 말년에 고을 수령을 지냈던 다산 정약용도 강도살인범을 곤장으로 때려죽인 일화가 전해진다. 사건은 이렇다. 다산이 황해도 곡산부사로 있던 1797년(정조 21) 7월에 관내에서 강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는다. 범행 현장은 우뚝 솟은 산과 우거진 숲이 있어 평소에도 도적이 자주 출몰하던 곳이었는데, 피해자는 함경도 영풍 시장에서 소를 사가지고 오던 김오선(金伍先)이란 백성이었다. 죽은 자의 몸에서는 목과 가슴, 배 네 군데에서 칼자국이 발견되었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직접 현장에 달려간 다산은 오랜 탐문 끝에 마침내 범인을 특정하였다. 이렇게 해서 체포된 범인은 머슴 김대득(金大得)이란 인물이였는데, 그는 소를 빼앗기 위해 김오선을 죽게 한 사실을 자백했다. 그런데 사건의 수사 결과를 상세히 보고받은 감영에서는 조정에 보고하는 대신 김대득의 처형을 명령하였고, 결국 다산은 감영의 지시에 따라 김대득을 장살시켰다. 감사는 사안이 명백하므로 중앙정부에까지 보고하여 사건 처리를 오래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때의 황해감사는 이의준(李義駿)이었다.

▲ 황해도 곡산부의 강도 김대득에 대한 정약용의 사건 보고서. 『흠흠신서』 수록
▲ 황해도 곡산부의 강도 김대득에 대한 정약용의 사건 보고서. 『흠흠신서』 수록

지금까지 청과 조선에서 관행적으로 묵인되던 지방재판의 편법을 살펴보았다. 아무리 용서받지 못할 중죄를 저지른 악인(惡人)이라도 사형 결정권이 없던 고을 수령이 즉결 처형하는 것은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결코 공정한 재판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피의자에게 방어 기회도 제대로 주지 않고 더군다나 죽을 때까지 끔직한 매질이라니! 하지만 정조가 심리한 재판 기록인 『심리록(審理錄)』을 보면 당시 살인사건이 관에 접수되어 국왕의 판결이 나기까지 평균적으로 3년 6개월의 긴 시간이 걸린 것으로 나온다. 이는 판결 이후 사형 집행까지 걸린 기간을 뺀 수치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죄상이 명백한 경우 고을 내에서 사건을 신속히 마무리하려는 조치는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지도 모른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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