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때…도구적 이성의 틀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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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한 때…도구적 이성의 틀에서 벗어나자
  • 신정현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 승인 2020.06.07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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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시사 에세이]

한 개인이나 한 민족의 역사에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나의 준엄한 법칙이 있다. 역사는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꿈과 소망으로부터, 좀더 자세히 말하면 꿈과 소망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이름/이야기/신화로부터 탄생한다.’ 김춘수 시인은 역사의 이 준엄한 법칙을 그의 시 「꽃」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꿈과 소망으로 만들어진 ‘이름/이야기/신화가 없이는 세상은 온통 어설픈 ‘몸짓’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어느 민족도 ‘어설픈 몸짓’만으로는 의미 있는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세계사 속에는 ‘신화로부터 역사가 탄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이승에서의 삶이 몹시 힘겨웠을 때, 원시인들은 이 고단한 삶이 저승에서는 이어지지 않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 무리의 사람들이 ‘크-크-크-크라이스트(Christ)’ 하고 그들의 소망에 이름을 붙이자, 그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스도는 구원자로 태어났고, ‘성경(the Bible)’이라는 방대한 신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신화는 힘을 낳아 서양 중세의 한복판에 이르기까지 1,300여 년 동안 서구인들의 정신세계를 점령하고 고딕 문명을 축으로 하는 기독교 문명의 역사를 써내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오늘날의 초강대국도 탄생은 신화로부터였다. 영국에서 박해를 받던 102명의 퓨리턴이 신앙의 새 터를 찾아 네덜란드를 거쳐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삶은 죽음만큼이나 혹독했다. 1년이 지났을 때, 정확하게 절반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차라리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신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대답했다. “나는 새로운 에덴을 건설하도록 신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자이다.” 다시 물었다. “그 소명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다시 대답했다. “신앙의 자유와 물질적 풍요와 역사의 번영, 그리고 내면에서 비치는 빛으로 신의 선택을 알 수 있다.” 결과는 놀라웠다. “오직 믿음만이! 오직 성경만이!”(Sola fides! Sola scriptura!)라는 신화로부터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이라는 대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는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준엄한 법칙이 있다. “신화가 부패하면 역사도 이운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가 중세의 찬란한 고딕 문명을 일으켜 세울 때까지, 기독교 신화는 중세 사람들에게 살아있는 힘이었다. 그러나 그 힘은 어느 순간 사람들의 영혼을 옥죄는 폭력으로 변했다. 움베르토 에코가 그의 소설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중세 말에 이르러 속세의 권력을 가진 황제와 결탁한 교황이 기독교 신화를 독점하고, 그 힘으로 내세에서의 구원을 갈구하는 가련한 영혼들에게 전횡과 폭력을 일삼은 것이다. 에코의 소설 속에서 교황권의 통로가 되는 수도원은 그들에게 힘을 가져다줄 지식/이름만을 제외한 모든 다른 ‘이름’에로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서 도서관을 미궁으로 설계했고, 닫힌 공간에서 기독교 신화를 타락하게 했다. ‘[면죄부] 상자에서 돈 소리가 나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난다.” “가톨릭교회의 성찬 의식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단자는 화형에 처해 마땅하다.” 이처럼 타락한 신화로 어찌 역사가 이울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신화의 타락으로 역사가 이운다는 점에서는 미국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근면과 성실, 믿음과 절제, 그리고 꿈에 대한 확신으로 새로운 에덴을 건설하는 것을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으로 받아들였던 미국 역사의 개척자들은 1776년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그들 모두에게 몇 가지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천부인권’으로 천명했던 미국의 독립신화는 반세기가 채 지나기도 전에 ‘텅 빈 이름’으로 변해갔다. 남북전쟁이 시작되던 1860년 무렵 미국의 노예 노동자 수는 4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20세기 초, 미국이 산업 자본주의 사회로 변모하기 시작했을 때, ‘기막힌 신세계’(brave new world)가 미국인들의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효율! 효율! 효율!”을 외치던 헨리 포드가 창안한 자동화 공정 덕분으로, 인류 최초의 대중화 모델 자동차인 ‘모델 T’가 24초에 한 대씩 생산되었다. ‘참으로 멋진 신세계’였다. 그러나 그 후 수십 년에 걸쳐 발전을 거듭한 ‘멋진 신세계’에서, 어머니, 아버지, 남편, 아내, 가족, 공동체, 사랑, 기쁨, 자연 속의 인간 등등의 수많은 위대한 인본주의적 가치들이 ‘효율’과 ‘이윤’을 지고의 목적으로 하는 산업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하릴없이 무너져 내렸다. ‘얼마나 기막힌 신세계’인가? 1960년대에 들어 발달된 대중매체 산업은 대중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획일화된 문화를 소비하도록 강요하면서 문화전체주의 권력을 휘둘러 댔다. 그리고 1980년대에 레이건 대통령이 천명한 신자유주의는 ‘시장경제를 통해 얻어진 경제적 자유가 궁극적으로 정치적 자유와 개인적 자유를 낳는다’라는 궤변으로 ‘가진 자’들의 ‘천부인권’을 옹호하고, ‘갖지 못한 자’들의 ‘천부인권’을 무자비하게 유린했다.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는 누구를 위한 권리인가? 

태어났다가 이우는 역사의 법칙에서 우리의 역사라고 비켜 서 있을 수는 없다. 20세기 초엽의 우리 민족의 역사는 제 민족의 역사를 제 민족의 손으로 쓸 수 없는 자의 역사로서 굴종의 역사였다. 소설 『날개』에서 작가 이상이 상징적으로 선언했다. “노예란 주인의 창문을 통해서만 세계를 바라볼 수 있고, 주인의 문을 통해서만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1919년 어느 순간 우리들이 우리 민족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을 때, 우리 민족의 역사는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그리고 1947년 7월 17일 ‘자유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었을 때, 우리의 역사는 다시 한번 환골탈태하게 되었다. 우리 민족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정치제도였기에 수많은 오용과 남용과 악용, 권력자들에 의한 독점과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고 민족공동체의 자유와 행복을 천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찬양되어 마땅했다. 무엇보다, 능력 있는 개인의 ‘사회적 신분 상승’(social mobility)을 헌법이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참과 합리, 상식과 정의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들로 숭배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이제 채소장수의 아들이 서울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수 있게 되었고, 무지렁이 농사꾼의 딸이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해 판사가 될 수도 있었으며, 리어카를 끌던 행상이 굴지의 실업가가 되어 대기업의 회장이 되기도 했다. 참과 합리, 상식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의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가 창조적 에너지를 결집하고 폭발시켜, ‘한강의 기적’을 낳은 것이다. 권력자들의 무능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미증유의 짧은 시간 동안에 자타가 인정하는 위대한 대한민국을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에 우리의 선배들이 건설해 놓은 위대한 대한민국을 지켜가고 있는가? 21세기에 들어 우리의 역사가 이울고 있다는 느낌이 압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난 수십 년 동안에도 권력자들의 무능과 부패가 홍수를 이루었고, 정경유착으로 빈부의 격차는 하늘을 찔렀으며, 신분이 낮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본권 유린이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지만, 참과 합리, 상식과 정의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거짓이 참을 구축해 세상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생각된 적은 없었다. 지난날에는 그래도 학생운동과 시민운동이 부패한 권력자들의 타락한 영혼을 흔들어 깨워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세계 굴지의 경제 대국들에 버금가는 국가의 위상을 바라보며, 가없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채소장수의 아들도, 농사꾼의 딸도, 리어카를 끄는 행상도, 오늘을 열심히 살면 내일의 행복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 사회 구석구석에서 ‘보편적 이성’(universal reason) -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합리이며, 무엇이 상식이고, 무엇이 정의인가를 묻는 이성 - 이 무너져 내리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그들의 ‘도구적 이성’(instrumental reason) - 참이냐 거짓이냐에 상관없이, 무엇이 나에게 이익이 되는가만을 묻는 이성 - 으로 모든 가치들을 난도질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대학입시는 ‘가진 자’들의 눈치 보기 경연장으로 변했고, 재력 있고 배경이 좋은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라야 법학전문대학원이나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판사나 의사가 될 수 있다. 전관예우를 받는 좋은 변호사를 사지 않으면 승소확률이 떨어지고, 헌법상의 ‘자유민주주의’는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을 지키기 위해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의 구호가 되었다. 그리고 정말 불안하고 두려운 일은 권력이 부패하지 않도록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할 시민단체나 정부 지원기관들이 ‘국민’을 볼모로, 때로는 ‘토착왜구’ 운운하며, 때로는 이중 잣대(double standards)를 들이대고, 때로는 광고나 언론플레이를 통해 지속적으로 국민들의 무의식을 두드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게 하는 ‘확정편향’을 일으키거나, 때로는 가해자가 거짓 연기로 피해자인양 하는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면서, 이념 놀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의 인고 끝에 ‘정의기억연대’의 부정을 폭로하면, 그는 한 사람의 ‘토착왜구’가 되는가?

“역사는 한 장의 양피지이다.”(History is a palimpsest.) 20세기 문화평론가 이합 하산(Ihab Hassan)이 한 말로, “오직 힘을 가진 자만이 제 손으로 제 역사를 쓸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면, “힘을 잃은 자의 역사는 힘 있는 자의 손에서 지워지고 다시 쓰여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손으로 우리의 역사를 써 나갈 수 있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참과 합리와 상식과 정의가 무너진 사회에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지키는 힘을 길러낼 수 있을까? 1995년에 출판된 소설 『배리(背理)의 고지(告知)』(Information)에서 작가 마틴 에이미스(Martin Amis)는 두 소설가의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 ‘순리’이고 무엇이 ‘배리’인지를 묻는다. 이야기의 두 주인공 그윈 배리(Gwyn Barry)와 리처드 툴(Richard Tull)은 대학 시절에 같은 방을 썼던 기숙사 동료로, 지금은 두 사람 다 소설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전도가 유망하던 툴은 빛을 보지 못했고, 재능도 없고 별 볼일도 없던 배리는 눈부시게 성공한 작가가 된다. 허튼수작이 우아한 삶으로 이어지고 재능은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거려야 한다니 운명의 장난임에 틀림없다. 툴은 중년 소설가로서의 자신의 삶에서 위기의식을 느끼고, 더 이상 소설 쓰는 일을 포기한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리를 망하게 하는 일에만 몰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순리(順理)일까? ‘재능이 있는 자가 성공하는 것?’ 아니면, ‘두 사람이 협력해 공생하는 것?’ 아니면, ‘재능이 없는 자가 성공하고, 재능이 있는 자가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 분기탱천해서 사생결단을 하는 것?’ 지금 우리들의 역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모두가 ‘보편적 이성’으로 돌아가 힘 있는 나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우리들의 새로운 이야기/신화를 창조해야 할 때이다.


신정현 서울대 명예교수·영문학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 석사 학위를, 미국 오클라호마주 털사대학교(The University of Tulsa)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영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1987년부터 2015년까지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The Stylistics of Survival in the Poetry of Robert Lowell”,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던 문학」, 「서구문학에 있어서의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과 현대미국시」, 「스페인어권 문학과 미국문학의 충돌과 상호작용」 등이 있고, 주요 저서로는 『The Trap of History: Understanding Korean Short Stories』, 『현대 미국문학론』(공저), 『포스트모던 시대의 정신』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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