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출직 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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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출직 권력
  • 문성훈 편집기획위원/서울여대·현대철학
  • 승인 2019.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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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사색]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지난 9월에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전 세계 13개 국가의 민주주의의 실태를 분석하면서 오늘날 민주주의가 위기라고 진단한다. 왜 그럴까? 보고서는 그 이유로 부정부패, 엘리트 집단에 의한 정책 장악, 사회적 불평등과 배제, 선거를 통한 권력 교체의 어려움, 최고 통수권자의 막강한 권력 등을 지적하면서 이른바 비선출직 권력의 등장을 여기에 포함시키고 있다.

비선출직 권력이라?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정치인들이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아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국민이 선출하지 않은 사람들이 권력을 갖는다? 그렇다. 보고서는 사법, 행정, 기업 등에서 비선출직 권력이 등장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아마도 검사, 판사, 고위공직자, 그리고 대기업 총수나 경영진들의 막강한 권한을 염두에 둔다면 이들이 권력자로 비추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비선출직이 행사하는 직책상 권한 말고 이들을 권력으로 지칭한 이유는 분명 다른 데 있다. 국민이 선출한 사람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 임용된 사람들, 아니면 상속을 통해 권한을 갖게 된 사람들이 국민의 주권에 해당하는 권력을 행사하거나, 국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은 선출직 정치인들의 권력을 무력화시킨다면 비선출직이 권력화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국민 주권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 말이다.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횡포를 부리고, 소비자에게도 갑질을 한다. 그리고 선출직 정치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법안을 제정케 한다. 아니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법안 통과를 가로막는다. 이렇게 되면 선출직 정치인들의 권력은 기업 권력에 종속되며, 그 결과 이들을 선출한 국민들의 주권마저 무력화된다. 최악의 경우 대기업이 선출직 정치인들에게 뒷돈을 댄다면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은 국민이 아니라, 돈으로 넘어간다.

언론권력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론이 여론을 좌지우지하면 정권을 탄생시킬 수도, 몰락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언론이 편파 보도를 일삼는다든지, 사실을 왜곡 보도하고, 추측성 기사는 물론 가짜 뉴스까지 양산한다면, 국민의 여론은 조작되고, 언론이 특정 정치인이나 장관, 혹은 고위공직자들을 표적 삼아 연일 비판 기사를 써댄다면, 결국 자리에서 물러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결국 국민의 선택권은 무시되고, 국민이 선출직에 부여한 권력 역시 무력화된다.

이런 상황은 검사, 판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검사나 판사의 권한이 사회정의실현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이나 조직의 권력을 위해 사용된다면 말이다. 최근 들어 정치권의 고소 고발이 남발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사법적 영역으로 이전된다. 이렇게 되면 검사나 판사가 선출직 정치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게 된다. 그리고 장관이나 고위공직자 임명 과정에서 검사가 선택적 수사를 감행하거나, 선출직 정치인에 대한 재판이 편파적으로 시행된다면, 대통령의 인사권이 무력화됨은 물론 국민의 주권행사인 선거 자체도 무효화 된다.

아마도 가장 큰 문제는 기업권력, 언론권력, 법조권력이라는 비선출직 권력이 서로 유착관계를 형성할 경우일 것이다. 언론이 자본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 역시 기업권력으로 변질된다. 그리고 기업권력이 자신을 위해 일하는 법조계 ‘장학생’들을 육성하게 되면, 이들 권력 간의 연결고리는 자연스럽게 완성된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명백하다. 민주주의 자체의 파괴이다. 국민의 주권을 위임받은 선출직 정치인의 권력을 국민 자신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 언론, 법조인들이 통제한다면 더 이상 국민은 주권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 군사정권 시대에는 1인 독재자가 전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이나, 언론, 사법부가 독재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기 쉬웠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독재 권력이 사라지자 이들 자체가 권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비선출직 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불가피하다.


문성훈 편집기획위원/서울여대·현대철학

연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거쳐,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 철학과에서 악셀 호네트 교수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여대 기초교육원 현대철학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며, 『베스텐트 한국판』 책임편집자, 철학연구회 연구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미셸 푸코의 비판적 존재론』, 『인정의 시대』, 공저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테제들』, 『포스트모던의 테제들』, 『현대정치철학의 테제들』, 『현대페미니즘의 테제들』이 있고, 역서로는 『사회주의 재발명』, 공역서로는 『정의의 타자』 『인정투쟁』 『분배냐, 인정이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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