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기막힌 살인 누명 '도뢰(圖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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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기막힌 살인 누명 '도뢰(圖賴)'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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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⑥_기가 막힌 살인 누명

우리나라는 고소, 고발 공화국?

고소의 사전적 의미는 범죄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수사기관에 해당 사실을 신고하여 범인의 처벌을 요구하는 의사표시를 말한다. 이를 피해자가 아닌 제3자가 신고할 경우엔 고발이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 고소, 고발 사건이 너무 많다고 지적한다. 최근 신문 기사를 보면 한해 평균 50만 건 이상의 사건이 접수될 정도로 고소, 고발이 범람하고 있다. 절대량을 비교해보면 일본보다 60배가 많을 정도로 심각하다고도 말한다. 이 중에는 무고도 적지 않아서 검찰에서 허위고소와 무분별한 고소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무고죄 처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한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비단 지금만의 문제는 아니었던 듯하다. 전통시대 중국과 조선에서도 소송이 빈발했다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견해인데, 그 가운데는 무고 사건이 적지 않았다. 당시 남에서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허위로 고소, 고발하는 무고행위를 ‘도뢰(圖賴)’라고 했다. 도뢰는 백뢰(白賴)라고도 하는데, 악을 쓴다거나 억지를 부린다는 의미의 우리말 ‘용악’, ‘억지’, ‘생억지’와 뜻이 통한다.

▲ “죽어주세요 어머니, 가족을 위해서.” 중국 호북성 효감현에서 소작인이 지주를 집으로 초대해놓고 중풍에 걸린 노모가 이 때 자살하도록 권유하였다. 노모의 자살 원인을 지주에게 뒤집어씌우고 지주를 협박해서 밀린 소작료를 말소시키려는 전형적인 도뢰 사건이다. 한쪽에서는 가족을 위해 어머니를 자살로 몰고 가려는 아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자살하려는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이 비극적이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1891년 7월 10일자. 『점석재화보』는 청 말기인 1884년부터 1898년까지 상해에서 발행되던 그림신문이다.
▲ “죽어주세요 어머니, 가족을 위해서.” 중국 호북성 효감현에서 소작인이 지주를 집으로 초대해놓고 중풍에 걸린 노모가 이 때 자살하도록 권유하였다. 노모의 자살 원인을 지주에게 뒤집어씌우고 지주를 협박해서 밀린 소작료를 말소시키려는 전형적인 도뢰 사건이다. 한쪽에서는 가족을 위해 어머니를 자살로 몰고 가려는 아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들의 청을 받아들여 자살하려는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이 비극적이다. 『점석재화보(點石齋畵報)』 1891년 7월 10일자. 『점석재화보』는 청 말기인 1884년부터 1898년까지 상해에서 발행되던 그림신문이다.

19세기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당대 살인 사건을 잘 살펴보면 거의 절반이 도뢰, 즉 무고로 인한 살인 누명 씌우기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죽여 놓고 엉뚱한 사람에게 살인죄의 오명을 씌우기도 하고, 평소 원한이 있는 사람을 손봐주기 위해 도굴한 시체를 꾸며 그를 살인범으로 신고하기도 하였다. 과학수사가 발달한 지금, 시체를 이용해 공갈을 하거나 살인 누명을 씌운다는 설정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나 있음직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중국이나 조선에서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다는 것이 다산(茶山)의 관찰이다.

살인 혐의를 씌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

다산의 주장처럼 전통시대 중국과 조선에서는 여러 유형의 도뢰 사건이 발생했으니, 엉뚱한 사람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는 방법도 다양했다. 우선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따라가 보자.

중국 청나라의 어느 마을에 정인(鄭仁)이라는 인물과 그의 부인 정씨(丁氏) 부부가 살고 있었다. 사건은 부인 정씨가 남편 정인의 조카 정기(鄭奇)와 몰래 간통을 하다가 남편 정인에게 발각되면서 시작되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정인이 자신의 부인과 정을 통한 조카를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내뱉고, 결국 조카 정기는 이웃 마을로 도망쳐서 한 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정인이 평소 원한 관계에 있던 이웃 왕양옥(王良玉)을 길에서 만나 싸움이 벌어져 구타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날 밤이 남편 정인을 죽이는 절호의 기회가 여긴 부인 정씨와 정기 일행은 독약을 타서 살해한 후 남편이 폭행을 당해 죽었다고 관에 신고하여 죄를 왕양옥에게 뒤집어씌웠다. 정인이 죽은 날, 자신이 실제 그를 구타한 사실이 명백한 왕양옥은 수사 과정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허위자백을 하였고, 반면 살인범 정씨 일행은 장기간 법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사필귀정이라고 했던가. 천만 다행으로 사망한 정인의 시신이 독살되었을 때 띠는 푸른 빛깔이라는 점을 수상히 여긴 상급심 관리에 의해 부인 정씨의 불륜으로 인한 독살이라는 사건의 진실이 1년이 지나서 밝혀지게 되었다.

▲ 도둑이 살인을 저지른 사건. 중국 항주에서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주인이 마침 외지로 일을 나가고 15살 난 딸만 집에 있었다. 결국 도둑이 진흙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대야로 가슴을 눌러 질식시켜 죽였다. 『점석재화보』 1896년 9월 11일자.
▲ 도둑이 살인을 저지른 사건. 중국 항주에서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주인이 마침 외지로 일을 나가고 15살 난 딸만 집에 있었다. 결국 도둑이 진흙으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대야로 가슴을 눌러 질식시켜 죽였다. 『점석재화보』 1896년 9월 11일자.

시체를 사거나 훔쳐서 이를 이용해서 타인을 살인죄로 엮는 도뢰도 있었다. 북위(北魏)의 명재판관 이숭(李崇)이 강주지방 도독(都督)으로 있을 때 일어난 사건이 그런 사례이다. 강주의 어떤 고을에 다른 지방에서 유배온 해경빈(解慶賓)·해사안(解思安) 형제가 살고 있었다. 이 중 동생 해사안이 자신이 지고 있는 군역(軍役)에 불만을 품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어느 날 도망을 감행한다. 그러자 형 해경빈은 자신이 나중에 동생의 부담까지 함께 떠맡을까 두려워한다. 결국 그는 동생을 죽은 것으로 위장해서 호적에서 이름을 삭제할 간계를 꾸민다. 마침내 성(城) 밖을 나가 동생을 닮은 시체를 구해서 동생이 살해당했다고 속여 장례를 치르고, 이에서 더 나아가 다른 군인 소현보(蘇顯甫), 이개(李蓋) 등을 동생 살인범으로 지목, 관아에 고발한다. 이 사건은 시체를 구해 남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는 행각을 벌였다는 점에서 발상이 기상천외하다. 사건을 주의 깊게 살핀 관리 이숭이 없었다면 자칫 죄 없는 사람들이 졸지에 살인범으로 전락했을 지도 모른다.

때론 자신의 목숨을 끊어 남을 무고하기도

중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도뢰 사건 중에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음으로써 타인에게 살인 혐의를 씌우는 극단적인 사례도 있었다. 남을 무고하기 위해 자살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인데,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한 마을에 섭명유(聶明儒)란 자가 살았는데, 무척이나 가난한 그는 군영(軍營)에서 큰 빚을 졌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아무리해도 군영에 진 빚의 원금과 이자를 갚을 방법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군영 병사들의 빚 독촉과 매질을 견딜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하고 자신이 거처하고 있는 담용광(譚龍光)이란 자의 집 뒤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다. 담용광은 섭명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거처를 마련해준 인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후 섭명유 유족의 행동이었다. 이들은 죽은 섭명유의 영혼을 위로하고 섭명유의 시신을 조용히 장사지내는 대신 엉뚱하게도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몰고 갔다. 유족 섭명전(攝明傳)이 죽은 섭명유의 살인범으로 담용광을 지목하여 관에 고한 것이다. 담용광이 섬명유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그를 엮어서 그로부터 많은 추징금을 뜯어내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러나 섭명전의 거짓말은 바로 탄로가 났다. 담용광이 섭명유를 자신의 집에 거두어 잘 보살핀 점에서 둘이 평소 원한이 있었음을 보기 어렵고, 또 담용광이 섭명유를 목매어 죽였다면 다른 곳에서 할 일이지 굳이 자기 집에서 죽게 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자살을 타살로 둔갑시킨 섭명전의 무고는 터무니없는 행위이자 속이 훤히 보이는 얄팍한 꾀에 불과했다. 사건의 진실은 바로 밝혀졌다.

▲ 잘린 다리가 개천을 떠내려오다. 중국 양주의 금만하(金滿河) 강가에서 잘려진 여인의 두 다리와 신발이 묶인 채로 목판에 떠내려온 사건. 피해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점석재화보』 1884년 9월 23일자.
▲ 잘린 다리가 개천을 떠내려오다. 중국 양주의 금만하(金滿河) 강가에서 잘려진 여인의 두 다리와 신발이 묶인 채로 목판에 떠내려온 사건. 피해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점석재화보』 1884년 9월 23일자.

조선 순조 때 전라도 강진에서 벌어진 사건

앞서 본 사례들처럼 남에게 살인 누명을 씌우는 도뢰는 중국 전통사회에서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흉악 범죄 중 하나였다. 전통시대 중국의 여러 지역 지방관이 남긴 사건 기록을 분석한 일본의 중국사 연구자 미키 사토시(三木聰)는 이런 일이 흔해서 시체를 이용한 공갈, 도뢰가 중국에서 하나의 풍속을 이룰 정도였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럼 조선은 어땠을까? 다산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조선에서는 극악무도한 사건은 없었지만, 타인을 살해범으로 모는 도뢰사건이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종종 일어나곤 했다. 다산이 유배생활을 하던 전라도 강진현에서 벌어진 다음 사건이 그 중 하나이다.

사건은 1803년(순조 3) 4월에 발생했다. 자신의 아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얻어맞아 6일 만에 죽게 되었으니 이들을 처벌해달라는 사망자 아버지의 고발장이 관아에 접수되었다. 이 때 죽은 자는 박광치(朴光致)이고, 박광치를 구타 살해한 자로 정화산(鄭化山), 정억(鄭億) 등이 지목되었다. 사건 접수 이후 강진현감의 1차 검시가 진행되었다. 현감은 고발장의 주장과 달리 박광치의 시신에서 심한 구타 흔적을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결국 목격자의 진술, 목맨 정황 등을 종합하여 박광치의 죽음은 타살이 아닌 자살로 결론내린다. 그런데 이 사건은 장흥부사의 2차 검시에서는 결론이 뒤집혀서 박광치가 목이 졸려 살해되었는데, 주범은 정억, 종범은 정화산이라고 했다. 이렇게 1차와 2차 검시 결과가 일치하지 않자 마침내 해남현감에 의한 3차 검시가 결정되었다. 그러자 마침내 고발장을 낸 박광치 아버지가 사실이 탄로 날 것을 우려하고는 갑자기 도주함으로써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사건의 실체는 이랬다. 박광치가 4월 12일에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다가 아버지가 휘두른 지게작대기에 얻어맞았다. 그러자 분을 참지 못한 박광치가 곧바로 뜰 앞의 살구나무에 목을 매 자살하는 패륜을 저질렀다. 당황한 그 아버지는 여러 궁리 끝에 자신이 자식을 죽게 했다는 오명을 벗어날 궁리를 한다. 결국 박광치가 자살하기 몇 일 전에 이웃 정화산 등과 싸운 사실을 빌미로 그들이 아들 박광치를 죽게 했다는 무고를 감행하고 만다. 자살을 타살로 꾸미는 돌이킬 수 없는 거짓을 꾸민 것이다.

▲  대한제국기인 1904년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황여인 사망 사건의 검안. 간통을 의심한 남편이 부인을 목졸라 살해한 사건이다. 검안에는 시신 검시 기록과 함께 관련자들에 대한 신문 내용도 담겨있다. 앞서 다산 정약용은 공갈, 무고와 관련 있는 인명사건이 적지 않다고 법관들의 주의를 당부한 바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대한제국기인 1904년 경북 문경에서 일어난 황여인 사망 사건의 검안. 간통을 의심한 남편이 부인을 목졸라 살해한 사건이다. 검안에는 시신 검시 기록과 함께 관련자들에 대한 신문 내용도 담겨있다. 앞서 다산 정약용은 공갈, 무고와 관련 있는 인명사건이 적지 않다고 법관들의 주의를 당부한 바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다산은 중국과 조선의 살인사건 판례를 연구한 그 유명한 『흠흠신서(欽欽新書)』를 남겼다. 이 『흠흠신서』에는 앞서 본 것 외에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났던 도뢰 사건이 여럿 실려 있는데, 범죄 수법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도 종종 확인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조선시대의 이런 기막힌 살인 무고는 요즘의 고소 남발 현상과 관련은 없을까? 이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탐구가 필요하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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