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취감형’ 판결 논란 … 정약용, 정조 판결에 문제를 제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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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취감형’ 판결 논란 … 정약용, 정조 판결에 문제를 제기하다
  •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 승인 2020.04.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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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 심재우의 ‘법률과 사건으로 보는 조선시대’ ⑤_ 국왕 정조의 '주취감형' 판결 논란

주취감형을 둘러싼 최근의 비판 목소리

주취감형이란 주취(酒醉), 즉 술에 취한 상태로 범행을 저지른 경우 형벌을 감해주는 것을 말한다. 근거는 무엇일까? 현행 형법 10조에는 심신장애로 인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할 수 있다는 규정이 나온다. 만취한 것을 심신미약 상태로 볼 수 있다면 감형이 가능한 셈이다.

문제는 주취감형이 국민 법감정과 다르다는 데 있다. 그래서 단지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감형해주는 것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거세다. 2018년에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음주운전자가 모는 차량에 치어 목숨을 잃은 군인을 기리기 위해 음주운전 단속 기준과 음주운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이른바 ‘윤창호법’이 국회를 통과하여 최근 시행에 들어간 것도 술에 취해 저지른 범행에 대해 단호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당시에도 지금처럼 술에 취해 저지른 범행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가 논란이 되곤 했는데, 살인 사건 판결을 둘러싸고 국왕 정조와 다산 정약용의 입장 차이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살인 사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술

원래 조선시대에는 흉년에 술을 빚거나 팔지 못하도록 하는 금주령(禁酒令)이 수시로 내려졌다. 이런 정책은 일차적으로 술을 빚는데 곡식을 허비하는 일을 막아 쌀값을 안정시키고 흉년을 극복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왔다. 그러나 각종 제사와 잔치 등에 술을 사용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실제로 다산 정약용도 『목민심서』에서 흉년에 양곡 소모가 많은 술 담그는 행위를 금지하도록 고을 수령들에게 권고하면서도, 소주와 달리 막걸리는 엄히 금지할 필요는 없다고 조언한다. 막걸리는 요기를 할 수가 있고 나그네에게 도움도 된다는 이유에서다.

▲ 김홍도의 「주막」. 나그네가 주막에서 요기하는 장면으로, 막걸리를 파는 주모의 모습도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김홍도의 「주막」. 나그네가 주막에서 요기하는 장면으로, 막걸리를 파는 주모의 모습도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에 술을 팔아 생업으로 삼는 자가 늘어나면서 주금(酒禁) 실시에도 불구하고 술 소비량은 줄지 않았다. 양조 규모도 시간이 갈수록 점차 확대되어 간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면 술은 잡기(雜技)와 함께 농촌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장애요인으로 인식될 만큼 음주가 성행하였고, 술로 인해 여러 가지 사건을 초래하곤 했다.

정조가 살인 등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인들을 심리, 판결한 기록인 『심리록(審理錄)』에는 정조 재위 24년간 모두 964건의 살인사건 판례가 실려 있다. 이들을 범죄 발생 원인별로 나눠보면 금전 문제, 음주, 간음, 원한, 모욕, 우발적 폭행, 분쟁 등 다양한데, 이 가운데 음주 살인은 79건에 달해 전체의 8퍼센트가 넘는 비중을 차지했다. 술로 인한 갈등이나 폭력 행위가 살인으로 비화한 사례가 적지 않았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통계이다.

그래서일까. 1790년(정조 14)에 살인사건을 직접 심리하던 국왕 정조는 이런 말까지 한다. “상놈들이 살인을 저지르는 이유는 오직 술, 여색, 재물 세 가지 때문인데, 그 중에서도 술의 폐해가 가장 심하다”고.

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형량을 감경해줄 수 있는 사안에 대한 규정이 있었는데, 음주 살인사건의 판결 내용을 보기에 앞서 잠깐 살펴보자. 먼저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담고 있는 책 『주례(周禮)』에는 세 부류의 형벌 면제 대상자를 ‘삼사(三赦)’라 했다. 삼사는 유약(幼弱:8세 미만의 어린이), 노모(老旄:80세 이상 노인), 준우(蠢愚:사리 분간을 못하는 지적, 정신적 장애인)를 말하는데, 이들은 죄를 지어도 벌을 면해주었다. 또 명나라 『대명률(大明律)』에는 나이가 너무 어리거나 연로한 자, 혹은 중병에 걸린 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속죄금을 받고 형을 면제하는 감형 규정이 있었다. 특히 7세 이하 어린이나 90세 이상 노인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를 저질러도 형벌을 가하지 못하도록 했다.

조선에서는 영조 때 편찬한 『속대전(續大典)』에 이웃 아이들끼리 놀이하며 서로 실랑이하다가 쓰러뜨려 죽게 한 경우 가해자가 10세 미만인 경우 용서한다는 규정을 두었다. 정조대 법전 『대전통편(大典通編)』에는 위의 규정을 더 세분화하여 가해자가 10세 이상 15세 이하인 경우는 형 면제까지는 아니어도 사형보다 한 등급 아래인 유배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또 정신 질환자 및 귀머거리, 벙어리가 살인한 경우에도 유배로 감형해주는 규정을 신설하였다.

이처럼 나이나 장애에 따라 감형 여부가 결정되었지만, 음주 관련 규정은 마련된 바 없었다. 그렇다면 음주 여부는 양형(量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당시에도 요즘 논란이 되는 주취감형 판결이 종종 내려져 논란이 되곤 했다.

“술 때문이지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다”

정조는 사형수에 대해 가능한 너그럽게 판결하려고 노력한 군주로 유명한데, 술로 인해 빚어진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심리록』 판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1783년(정조 7) 경상도 의성에서는 전별연 자리에서 술김에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를 돌로 치고 발길질하여 당일 내장파열로 죽게 한 이동치(李東致)란 자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사건 보고서를 검토한 정조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인 상태에서 장난기 섞인 다툼이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고 지적하며, 가해자 이동치가 죽이려는 마음은 털끝만큼이라도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단언하다. 이와 같은 정조의 확신은 본 사건이 폭행치사가 아닌 과실치사로 판단하는 근거로 작용했고, 결국 정조는 가해자에게 엄히 형장을 친 후 풀어주도록 명령한다.

▲ 조선말기 화가 김준근이 그린 검시하는 장면.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고을 수령이 아전들과 함께 시신에 대한 검시를 진행했다.
▲ 조선말기 화가 김준근이 그린 검시하는 장면.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해당 고을 수령이 아전들과 함께 시신에 대한 검시를 진행했다.

이보다 5년 후인 1788년(정조 12) 경상도 고성에서 일어난 소거간꾼 사이에 일어난 살인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취중 싸움 중에 천봉기(千奉己)가 동료 조중달(趙中達)의 목을 조르고 무릎으로 늑골을 다치게 하여 8일 만에 죽게 한 이 사건에서도 정조는 이들이 평소 원한이 없었고 친하게 지냈다는 진술을 근거로 가해자에게 한 차례 형장을 가하고 석방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하라는 판결을 내린다.

음주 살인에 대한 정조의 생각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1782년 평안도 평양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에 대한 판결문이 아닐까 싶다. 이 사건은 강귀동(康貴同)이란 자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이웃에 사는 이대성(李大成)과 싸우다가 이를 말리는 그의 형 이기동(李己同)을 낫으로 내리쳐 현장에게 죽인 옥사이다. 피해자 이기동의 뒤통수가 낫에 찍혀 식도가 잘려나갈 정도로 범행 현장은 참혹했지만, 관련자들의 진술이 자주 바뀌고 증거가 불충분하여 재판이 8년이나 지체되었다. 사건 보고서를 종합하면 강귀동이 술에 잔뜩 취해서 집안에서 행패를 부리다가 이것이 이웃 간의 싸움으로 번져 이를 말리던 피해자가 억울하게 칼날에 찔리는 참변을 당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 흉기로 쓰인 농기구. 조선말기 검안에 등장하는 그림으로 왼쪽 두 개가 낫이며, 나머지는 괭이, 고무래이다. 당시 몽둥이, 농기구 등 생활도구가 살인사건 흉기로 많이 쓰였다.
▲ 흉기로 쓰인 농기구. 조선말기 검안에 등장하는 그림으로 왼쪽 두 개가 낫이며, 나머지는 괭이, 고무래이다. 당시 몽둥이, 농기구 등 생활도구가 살인사건 흉기로 많이 쓰였다.

사건 판결문에는 다음과 같은 정조의 문제적 발언이 등장한다. “강귀동이 잔뜩 취하여 먼저 제 아내와 종을 때리고 이어 제 아버지에게 욕을 한 것만 봐도 그가 술에 곤드레만드레가 된 나머지 멍청이나 미치광이처럼 눈앞의 사람이 누구이고 수중의 낫이 무엇인지도 전혀 분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기동이 마침 이러한 때를 봉착하여 갑자기 날카로운 칼날을 맞은 것은 운수가 사나워서라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어찌 본심에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오로지 술이 빌미가 되어 저질러진 것이다. 이와 같은 죄수를 가볍게 벌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형정(刑政)은 아닐 것이다.” 결국 “진정 술 때문이지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 정조는 마침내 1790년(정조 14) 8월에 한차례 엄한 형장을 가한 후 살인범 강귀동을 석방시킬 것을 명령한다.

정약용, 정조 판결에 문제를 제기하다.

가능한 한 정상을 참작하여 옥의 죄수를 최대한 풀어주려는 국왕 입장을 고려하더라도 위의 사건들에 대한 정조의 태도는 파격적이다. 정조의 일련의 주취감형 판결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인물은 다산 정약용이었다.

정약용은 기본적으로 죄지은 만큼 벌을 받게 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법으로 용서할 수 없는 죄는 마땅히 의(義)로서 처리해야 하며, 따라서 악(惡)을 제대로 다스리지 않고 용서하는 일은 법관이 행해야 할 참된 정치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특히 그는 죄수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만을 음덕(陰德)이라 생각하는 당시 관리들을 강하게 비판하면서, 죄지은 자가 정당하게 죗값을 받는 것 또한 죽은 사람을 위한 음덕임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처럼 범죄자에 대한 지나친 관용과 은전에 비판적인 그는 자신의 저술 『흠흠신서』에서 이들 사건 판결의 문제점을 언급하며 자신의 소신을 피력했다.

술에 취해 낫으로 사람을 잔인하게 살해한 강귀동 옥사의 정조 판결문 다음에 남긴 정약용의 구체적인 의견은 이렇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큰 죄이지만, 술에 취해 죽인 것은 더 큰 죄라고. 따라서 참혹하게 낫으로 베어 죽인 살인범의 행동은 범행 의도가 뚜렷하므로 도저히 살려줄 수 없다고 꼬집었다.

▲ 『흠흠신서』 〈상형추의〉편. 왼쪽 부분이 경상도 고성의 상인 천봉기가 동료 조중달을 살인한 사건이며, 사건의 내용, 판결과 이에 대한 정약용의 논평이 실려 있다. 장서각 소장.
▲ 『흠흠신서』 〈상형추의〉편. 왼쪽 부분이 경상도 고성의 상인 천봉기가 동료 조중달을 살인한 사건이며, 사건의 내용, 판결과 이에 대한 정약용의 논평이 실려 있다. 장서각 소장.

또 고성 천봉기 옥사에서 정약용은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살인범을 용서해준다면 향후 백성들이 음주 행위를 형벌을 모면하는 좋은 핑계로 삼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러면서 앞서 『주례』에 나오는 사리 분간을 못하는 준우(蠢愚)와 음주로 인한 인사불상은 전혀 달라서, 준우가 지은 죄는 용서해줄 수 있지만 술주정은 결코 감형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바보나 정신이상자는 타고난 것이므로 하늘이 만든 재앙이지만, 술주정은 스스로 지은 재앙이라는 주장이다. 요컨대 술은 자신의 의지로 마신 것이니 술 마신 뒤의 범행 또한 고의적인 행동으로 볼 수 있어서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상 주취감형 문제를 두고 정조와 당대 최고의 학자 정약용의 견해는 확연히 차이를 보였다. 덕치(德治)를 내세워 감옥을 비우려는 국왕으로서, 또 법의 공평한 적용을 관철해야 하는 신하로서 그들이 처한 입장 차이가 주취감형에 대한 둘의 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보기에 정조의 판결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 같다.


심재우 한국학중앙연구원·조선시대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조선시대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 한국역사연구회 사무국장, 역사학회 편집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국가권력과 범죄 통제』, 『네 죄를 고하여라』, 『백성의 무게를 견뎌라』, 『단성 호적대장 연구』(공저), 『조선의 왕비로 살아가기』(공저), 『조선후기 법률문화 연구』(공저), 『검안과 근대 한국사회』(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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