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 지키기와 유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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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 지키기와 유연성
  • 박광기 대전대·정치학
  • 승인 2024.04.14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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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기 칼럼]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원칙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말 그대로 원칙이 무너지고 갈등과 혼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고, 또 법이나 규정에 따라 만들어진 원칙이라면 원칙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하여 책임과 처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지켜져야 할 원칙이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거나 일방적으로 ‘강요’나 ‘복종’, 또는 ‘무조건적인 수용’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원칙을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원칙을 사전적인 의미로만 보면, ‘어떤 행동이나 이론 등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일관되게’라는 의미는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치중되지 않고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하며, 또한 특수한 경우에만 적용되거나 적용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를 두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원칙은 대상과 내용에 따라서 적용이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보편성과 일관성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 사회에 어떤 원칙이 정해지고 그 원칙을 적용하고 준수해야 하지만 예외적인 상황이 너무나 많이 발생하여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 흔하다는 것이다.

원칙을 정하고 그 원칙이 지켜져야 하지만, 현실에서 그 원칙의 예외적인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면 원칙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우선 원칙을 정함에 있어서 절차적인 정당성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원칙의 내용은 적절하고 보편적이며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원칙에 대한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이유와 원인은 무엇인지 등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원칙을 준수하고 적용하는 경우보다 예외적인 상황이 더 많거나 예외적인 상황이 원칙의 근본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 등이 발생한다고 하면, 그 원칙은 더 이상 원칙으로서의 가치와 적용의 타당성을 잃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원칙은 더 이상 적용과 준수의 가치나 의무를 잃게 되고 원칙을 잘못 만들었거나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더 이상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수정이나 폐기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번 정해 놓은 원칙을 바꾸거나 없애는 것은 그 원칙을 정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원칙은 원칙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거나 없애는 것이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또한 그 원칙을 위반하는 것은 불이익이나 처벌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상황이 이러니 한 번 만들어 놓은 원칙은 그 원칙의 적용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그 원칙이 보편성과 일관성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원칙을 지켜야 하는 부담이 생기고 또한 그 원칙을 준수할 것을 일방적으로 강요받게 된다. 누구나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다른 한편으로 원칙의 보편성과 일관성을 유지하고 내용 역시 적절한 타당성을 갖춘 원칙이라고 해도, 그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나 다른 원칙과의 충돌 등으로 인해서 어렵거나 갈등을 유발하거나 모호한 특수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런 특수한 경우나 원칙 적용의 모호성이 나타나게 되면, 원칙을 적용함으로 인해서 그 원칙을 정한 기본 취지나 목표, 그리고 원칙의 의미에 반하는 이유 등으로 인해서 상대적인 불이익이나 의도하지 않은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경우나 원칙의 적용이 모호한 경우에 원칙을 지킬 것을 강요하는 것은 그 원칙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훼손될 수도 있다. 따라서 만약 이런 경우가 발생하게 된다면,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는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고, 따라서 원칙의 예외적인 경우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이런 특수한 경우가 발생하게 될 때, 우리는 '원칙의 적용에 대한 융통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원칙의 적용에 대한 융통성은 정말 예외적이고 신중해야 한다. 융통성을 고려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원칙의 중요성과 그 의미 및 취지를 지키기 위해서 예외적이고 특별한 상황에 대한 인정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원칙의 적용을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원칙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특별하고 예외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사적 이익을 위한 특별한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익을 고려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경우에만 한정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융통성의 적용은 특혜 또는 권리나 권력의 남용에 해당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문제와 갈등 상황을 보면 무엇이 원칙이고 또 어떤 것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인지, 무엇을 지키고 어떤 것을 고쳐야 할 것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당장 의대 정원 확대 문제만 봐도 그렇다. 물론 이런 문제가 원칙의 적용과 융통성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선 원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원칙의 적용이나 수정 또는 폐기의 문제나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박광기 대전대·정치학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 전공 교수. 독일 뮌헨대학교 정치학 박사. 대전대 대학원장 및 도서관장, 국무총리실 인문사회연구회 및 경제인문사회연구회 기획평가위원, 한국연구재단 사회과학단장, CBS 시사포거스 및 시사매거진 앵커, 한국정치정보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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