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시대정신과 초월적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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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시대정신과 초월적 정의
  • 이국운 한동대·헌법/법사회학
  • 승인 2024.04.14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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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옮긴이 에필로그_ 『초월적 정의: 헌정주의의 종교적 차원』 (칼 프리드리히 지음, 이국운 옮김, 책세상, 244쪽, 2024.02)

 

지난 세기 후반 서구 정치사상의 흐름 가운데 가장 손꼽히는 것은 단연 규범적 자유주의의 주류화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몰락 및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현격한 대비를 이루면서 특히 영어권 정치사상에는 존 롤즈, 위르겐 하버마스, 로널드 드워킨 등의 선도 아래 자유주의의 규범적 토대를 정초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의 엄격한 구분을 강조하면서 암암리에 합리성의 이름으로 공리주의 또는 사회진화론을 옹호하던 그 이전 시대 자유주의의 특징에 비하여 자유주의의 규범적 토대를 확실하게 다지려는 이와 같은 흐름은 확실히 서구 정치사상의 전환 또는 그 방향을 함축하고 있다.

어느덧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이탈하여 서구 사회의 한쪽에 진입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서구 정치사상의 방향 전환은 큰 관심사이다. 이제 그 방향은 서구 문명의 영향 속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에게 미래 설계의 현실적인 고려사항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 한국 사회에서 제기되었던 공적 담론의 주요한 주제들, 예컨대, 공정과 상식의 실현과 법의 역할, 사회적 위험으로부터의 안전보장과 그 책임, 기본적 수요의 충족과 미래세대의 권리 등을 살펴보더라도 이러한 모습은 확연히 드러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21세기 들어 서구 정치사상이 규범적 자유주의를 넘어 정치 현상의 초월적·종교적 토대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한 점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슬라보예 지젝 등 한국 사회에도 잘 알려진 정치사상가들이 ‘사도 바울’을 공통의 문제 인물로 삼아 자유와 평등의 초월적 차원을 개척하고 있는 것은 대표적인 사례지만, 그 밖에도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타자윤리나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에 대한 광범위한 관심에서 드러나듯, 규범적 자유주의의 이른바 ‘세속적 초월’을 넘어서려는 논의들이 이곳저곳에서 돌출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최근에 필자가 번역·출간한 칼 프리드리히의 『초월적 정의 - 헌정주의의 종교적 차원』은 매우 이례적인 작품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 1964년에 출간된 이 책은 실증적 자유주의의 위세가 여전히 강력하던 당시의 시대 상황 속에서도 초월적 정의, 즉 정의의 근거를 초월적 차원에서 구하던 전통이야말로 서구 정치사상의 원류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이 흐름은 결정적으로 기독교 정치사상에서 꽃피었다. 개인의 자율성과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서구적 헌정주의의 두 축은 세계의 창조와 구속과 완성을 주관하는 신에 대한 신앙을 전제로 자유 속에서 정의의 초월적 근거를 추구하는 방식으로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는 이 책에서 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루터-칼뱅-후커-알투지우스-로크-칸트의 흐름을 따라 기독교적 헌정주의의 흐름을 추적한다.

다만, 이러한 주장을 내세우는 저자의 목소리는 사뭇 착잡한 분위기이다. 특히 1960년대 초반의 학술 강연을 담은 마지막 장에서 프리드리히는 ‘초월적 정의’를 갈망하면서도 그러한 갈망을 단연코 부정하는 시대, 자유를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숭상하면서도 그 속에서 정의의 초월적 근거를 부인하는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을 짙게 토로하고 있다. 이 점에서 필자는 이 책이야말로 앞에서 언급한 규범적 자유주의의 주류화 및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세속적 초월’을 초월하려는 정치신학적 논의에 대한 선구적 요청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이 책의 출간 당시 다소 우울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저자가 미처 누리지 못했던 시대정신의 공명(共鳴)이 바로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어쩌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기대가 담겨 있다.

기실 저자인 칼 프리드리히의 학문적 생애는 나치즘을 비롯한 전체주의의 폭력적 도전 앞에서 실증적 자유주의가 난파해버렸던 시대에 대한 반성이자 재건의 모색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1년 독일 라이프치히 태생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20년대 중반부터 하버드대학에서 헌법과 정치이론을 강의했고, 1970년대 초반 은퇴하여 1984년에 작고할 때까지 법철학과 정치사상의 두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당대 미국의 대표적 헌정주의 이론가였다. 프리드리히는 개인의 자율성과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서구적 헌정주의를 정리한 뒤, 그러한 입장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재건과정에 핵심적인 조언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나아가 학술적 차원에서는 이른바 ‘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주권자’의 존재에 집착하는 좌우익의 전체주의를 공히 비판하고, 미국 정치학계를 휩쓴 ‘행태주의 혁명’(behavioral revolution)의 한복판에서 헌정주의의 제도와 정신을 끈질기게 옹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정치사상은 최근 들어 행태주의에 맞서는 제도주의(institutionalism)의 선구로서 재해석되고 있기도 하다.

고백하건대, 훌륭한 선학(先學)의 좋은 책을 번역하는 동안 필자에게는 한 가지 고민이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을 살필 때,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초월적 정의의 추구로 해석한 대목과 정의의 초월적 근거를 부인하는 시대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마지막 장 사이에는 약 150여 년의 간격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 책이 번역·출간되는 시점을 고려하면, 그 간격은 200년 이상으로 벌어질 수도 있다. 필자의 고민은 저자가 공백으로 남겨 놓은 이 기간에 서구 사회에서 벌어졌던 정치사상의 변화를 ‘초월적 정의’와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기독교적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이는 저자가 남긴 공백을 어떻게 메워야 하는지, 달리 말해, 서구의 헌법이론과 정치사상에서 초월적 정의가 어떻게 위축되고, 변형되고, 사라졌으며, 지금은 또 어떠한 자취를 남기고 있고,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소생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지를 논의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에 관해서는 번역문의 다음에 ‘서구적 모터니티와 초월적 정의의 행방’이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해제를 덧붙였으니, 독자 제현(諸賢)의 비판적인 일독을 바랄 뿐이다.

헌정주의가 종교적 차원을 요구한다는 점에 대한 저자의 확신은 이 책의 본문 앞에 인용된 신약성서의 한 구절에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심판받지 않으려거든 심판하지 말라. 너희가 심판하는 그 심판으로 너희가 심판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 구절에 등장하는 너희가 하는 심판과 너희가 받을 심판, 너희가 하는 헤아림과 너희가 받을 헤아림이 오로지 초월적 정의의 차원을 상정하는 경우에만 서로에게 연결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서 말했듯이 이처럼 당연한 명제가 저자의 시대에 비하여 더욱 심각하게 조명되고 있는 최근의 현실은 과연 무엇을 함의하는 것일까? 모쪼록 이 책의 번역·출간이 한국 사회에서 초월적 정의, 즉 헌정주의의 종교적 차원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시작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이국운 한동대·헌법/법사회학

한동대학교 법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한 뒤, 같은 대학원에서 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서로 《헌법》, 《법률가의 탄생: 사법 불신의 기원을 찾아서》, 《헌법의 주어는 무엇인가》, 《헌정주의와 타자》 등이 있고, 마이클 왈저의 《출애굽과 혁명》, 스티븐 브라이어의 《역동적 자유》를 번역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 헌법의 공화주의적 독해와 이를 뒷받침하는 헌정주의적 법신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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