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역사를 다르게 사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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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역사를 다르게 사유하기
  • 이명아 기자
  • 승인 2024.04.13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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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와 역사: 데리다 철학에 대한 하나의 입문 | 김민호 지음 | 에디스코 | 144쪽

 

자크 데리다(1930~2004)는 20세기 가장 빛나는 철학자이자 가장 난해한 철학자로 유명하다. 그의 철학이 난해하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오해되어 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푸코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데리다 철학은 실제의 삶, 인물, 역사를 간과한다고 평가했다. 데리다의 사유 전체가 언어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는 이야기라고, 데리다는 상대주의적이고 회의주의적인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데리다를 이런 시선으로 보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데리다와 역사’의 조합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저자는 데리다의 ‘해체’ 개념은 근본적으로 또 다른 역사성을 사고하는 문제였으며 “데리다의 이념적이고 철학적인 여정은 역사성의 곁에서 개시”되었다고 말한다. 세간의 오해와 달리 데리다 사상에서 역사 개념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저자는 데리다의 사상에서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이 역사, 역사성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살펴본다. 저자에 따르면, 데리다는 ‘역사 철학’이 존재하는 곳에 ‘역사’는 없다고 단언한다. 데리다는 역사 철학처럼 역사에 필연적인 목적이 있다는 “존재-신학-시원-목적론”의 역사성을 비판한다. 모든 것이 필연적인 곳에서는 의미가 생겨날 수 없다. 데리다는 역사 철학이 생을 무의미한 상태로 만든다고 보았다. 역사가 필연적인 목적지를 향해 간다면 “생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생은 그저 정해진 목적지로 가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이런 이념적 필연성은 물질적 필연성만큼 생의 고유한 풍요로움을 거세한다.

저자에 따르면 데리다는 이런 무의미의 압도적 폭력에 맞서서 의미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 철학자이다. 의미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과 부재를 경유해야만, 또 우연성과 우발성을 승인해야만 도출될 수 있다. 데리다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교차하면서 사건이 만들어지고 역사가 생산된다고 보았다. 저자는 데리다에게 “역사를 살아간다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우발적인 기회를 필연적인 리듬 속에서 소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역사는 무질서한 사태(우연)에 질서(필연)를 만드는 일, 기호를 통해 의미를 재단하고 포획하고 절취하는 액자화의 운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역사는 액자화의 운동이고, 액자화에 따라 동일한 사태도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데리다는 역사는 단선적 계열로 쉽게 결정되고 정리될 수 없기 때문에 역사다워진다고 보았다. 기호는 의미를 적재하고 있는 물질이지만, 기호와 의미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관계도 없다. 기호가 그 자체로 우발성을 체현하는 최소 형태인 것이다.

흔히 우리는 언어가 무의미를 진리로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언어는 의미를 유실할 위험, 무의미에 내맡겨질 위험에 처해 있다. 저자는 언어의 역사가 무의미와 진리라는 두 죽음 사이에 있다고, 물질적인 필연성과 이념적인 필연성 양자 모두와 거리를 두고 특정한 우발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소화하려는 노력 속에 역사와 생과 우리 사유의 운동이 있다고 말한다.

기록, 문자, 글쓰기를 뜻하는 에크리튀르는 데리다에게 역사와 철학의 가능 조건이다. 기록은 기호화이다. 기호화는 인용 가능하고 반복 가능한 의미의 단위를 재단하고 절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는 “기호화가 반복 가능한 단위의 생산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은 역사를 쓰는 행위가 근원적인 폭력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데리다가 보기에 차이와 반복의 체계 속에 대상을 집어넣는 “원에크리튀르의 제스처”는 고유성에 대한 위협이자 폭력이며, 이는 다른 모든 종류의 폭력에 앞서는 폭력이다. 고유하려면 모든 차이와 무관해야 하고 반복 불가능해야 하는데, 기호의 의미는 차이의 망 속에서 의미를 가지고, 반복 가능한 것으로서 인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데리다는 고유성을 고유한 채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기호화되고 기록되는 한에서만 역사가 되고, 그래야만 우리가 역사를 역사로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쓰기는 근원적으로 폭력적이지만, 우린 그 폭력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요컨대 선택, 선별, 여과를 포함한 모든 규정은 폭력이지만, 우리는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무엇을 선별하고 규정함으로써만 의미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데리다가 무의미와 허무주의에 맞서는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역사가 되는 특별한 사건이 따로 있는 것인가. 데리다가 보기에 처음부터 원본적인 사건으로 주어지는 사태는 없다. 의미 있는 사건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데리다는 기록되고 전승되는 반복 가능성 속에서 비로소 의미가 생성된다고 보았다. 그런데 무언가가 기록된다는 것은 기록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배제하고, 죽이고, 누락하면서 역사로서 액자화 되어야만 의미가 만들어지고 되새길 만한 무엇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건이 사건인지 아닌지는 사건의 시점에서 즉시 결정될 수 없다. 이런 결정 불가능성이 우리가 무언가를 사건으로 생산할 수 있게끔 허락한다.

또 기록의 가능성은 늘 그 기록을 하는 사람의 부재 가능성, 사멸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호와 서명은 서명자가 부재해도 여전히 기호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기호가 가리키는 대상이 부재하더라도 여전히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역사와 생은 이념적인 죽음과 물질적인 죽음에 저항하는 것, 양자로의 환원에 저항하는 것이다. 즉 역사와 생은 “두 죽음 모두를 미루는 운동, 차연시키는 운동”이다. 마찬가지로 텍스트도 실재적인 대상을 지시하는 활동으로 환원되지 않고, 이념적인 대상을 전사하는 활동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그 사이에서 길을 낸다.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ie’란 ‘그라메gramme’, 즉 서기소, 문자, 기록, 에크리튀르에 관한 학문을 의미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라마톨로지는 일개 언어학이 아니다.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는 “기호의 자의성에 관한 학”이고 “흔적의 비동기성에 관한 학”이다. 그라마톨로지를 언어학으로 환원하는 독해 때문에 데리다의 “텍스트-바깥은 없다”라는 테제는 “언어-바깥은 없다”로 오해받아 왔다. 그러나 데리다는 모든 것이 언어 안에 유폐되어 있다고 말한 적이 없다.

저자의 말처럼 데리다의 “텍스트-바깥은 없다”는 실제적인 역사를 무시하고 텍스트적인 유희에 집착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 바깥에 의미가 따로 있어서 텍스트에 의해 재현, 모사,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의미의 유일한 거처라는 말이다. 이는 역사를 쓰는 것은 텍스트를 직조하는 것이고 이 역사를 다스리는 초월적 심급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책의 저자는 “텍스트-바깥은 없다”는 “역사-바깥은 없다”라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데리다에게 말, 기호, 텍스트에 담긴 주권적 주관은 없다. 이는 텍스트는 자의적인 절취, 인용, 반복의 가능성 속에 있고, 의미의 변질 가능성이나 유실 가능성의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의미는 변질되고 유실될 수 있기 때문에 개별 주관의 자의적인 해석도 때때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는 역사에 어떤 필연성도 없다는 얘기다. 역사는 변전하고 생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데리다가 말하고 싶은 새로운 역사성의 의미다.

데리다는 우발성, 우연성, 무상성이야말로 절대적이라고 보았다. 그런 데리다의 사유를 허무주의라고 공격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데리다는 존재의 이유,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은 오히려 존재 자체가 아니라 존재의 부재 가능성에 의해 존립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즉 의미는 이러저러하게 있는 무언가가 이러저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으로부터, 요컨대 무상성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다.

“텍스트-바깥”은 없기 때문에, 즉 텍스트의 전개를 미리 규정하고 보장하는 의미, 목적, 텔로스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무의미한 것들 한가운데에서 의미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텍스트-바깥이 애초부터 없다면 우리에게는 무상하고 무의미한 이 세계를 진지하게 살아내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가 없다. 다른 바깥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이 무상한 세계를 약간 덜 무상하게 만드는 일이 되고, 근본적으로 나사 빠진 이 무논리한 세계에서 약간의 논리를 찾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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