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라시아 역사는 흉노/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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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라시아 역사는 흉노/훈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 이현건 기자
  • 승인 2024.04.13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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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흉노와 훈: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 유라시아 세계의 지배자들 | 김현진 지음 | 최하늘 옮김 | 책과함께 | 360쪽

 

흉노/훈은 서양에서는 ‘야만인’ 동양에서는 ‘오랑캐’로 일컬어졌다. 세계사에서 이들의 위치는 고대 후기 로마 제국과 중세 초기 게르만 민족의 역사에 덧붙은 각주에 불과할 따름이다. 저자 김현진 멜버른대학 교수는 이러한 학계 시각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통념에 정면으로 도전해 흉노/훈 제국의 위상을 바로잡고자 이 책을 썼다.

이 책은 크게 두 가지를 말한다. 먼저 몽골고원의 흉노와 유럽의 훈은 같은 집단명을 사용한 강력한 연결고리를 가진 존재들이며, 이들의 역사는 유라시아적 관점에서 검토해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흉노/훈 제국이 고대 후기와 중세 초기 유라시아 세계 형성에 미친 영향은 막대하며, 이들은 세계사를 바꾼 고대 문명 중 하나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것이다.

훈/흉노에 관한 종래의 역사서는 중앙아시아의 흉노, 유럽의 훈 어느 한쪽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동부의 흉노와 서부의 훈을 별개의 존재로 인식하고 서술할 경우 흉노/훈계의 여러 세력이 고대 유라시아 각지에서 일으킨 변화를 통합적으로 인지할 수 없게 된다. 유럽과 아시아를 별개의 역사가 아닌 하나의 역사로 보는 시각이 필요한 이유다.

이 책은 1차 및 2차 사료는 물론 최신의 고고학적 발굴까지 망라하여 흉노/훈 제국이 고대 유라시아에 가져온 지정학적 변화와 유럽·이란·중국·인도의 문명에 남긴 흔적을 살펴보며 역사 연구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소그드 상인 나나이반데(Nanai-vande)는 313년에 쓴 편지에서 남흉노가 중화 제국 수도 낙양을 점령한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흉노’를 ‘훈’이라 불렀다. 박트리아 혈통을 지녔고 중국 서부 둔황 출신의 승려 축법호(竺法護)는 280년에서 308년 사이에 번역한 《점비일체지덕경(漸備一切智德經)》, 《보요경(普曜經)》에서 어떤 애매한 표현도 없이 흉노를 분명하게 ‘후나’(인도 사료에서 ‘훈’의 다른 표기)라고 썼다. 이 밖에도 고고학적 발굴이나 많은 역사적 증거들이 흉노와 훈은 같은 집단명을 사용했고, 정치적·문화적으로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저자는 먼저 사마천의 《사기》에 언급된 흉노의 정치체제를 인용하면서, 흉노가 국가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무질서한 부족 연맹에 가깝다는 학계의 선입견을 반박하며 1장을 시작한다. 왕과 부왕을 둔 복잡한 위계의 준봉건제를 채택한 흉노의 정치 체제는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전제정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복속 부락을 효과적으로 통치한 흉노는 ‘배아 수준’의 초기 국가라는 학계의 통념과는 맞지 않는 세련된 정치 질서를 지닌 국가였다.

오늘날 내몽골에 해당하는 오르도스 지방에서 유래한 흉노는 서기전 3세기 중국 통일 이전에 존재한 것으로 알려졌다. 흉노를 오르도스 지역에서 몰아낸 진시황은 이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서기전 209년에 집권한 통치자 묵특의 지휘 아래 흉노는 동호, 월지, 혼유, 정령 등의 초원 연맹을 차례대로 정벌하여 내륙아시아 동부 세력을 통일하고, 고조 유방의 한(漢)나라를 포위하여 조공을 받아내며 강력한 제국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후 한무제와의 대결로 타격을 입은 흉노는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었고, 남흉노는 한나라의 속국이 되어 중국령으로 들어갔다가, 311년에 중국을 전복시킨다. 이때 흉노의 통치자 유연이 중화 제국을 점령하면서 5호 16국 시대가 도래했고, 이 시기는 초원 내륙아시아의 정치 전통과 중국의 행정 전통이 합성된 독특한 시기였다. 이처럼 흉노가 중국에 미친 영향력은 넓고도 깊었다.

한편, 2세기와 3세기에 알타이 지역에 머물렀던 북흉노는 4세기 이후 여러 집단으로 나뉘었는데, 더 서쪽으로 떠난 흉노 집단은 다시 두 개 집단, 중앙아시아 남부의 백(白)훈 집단과 유럽의 훈 집단으로 나뉘게 된다. 키다라 왕조의 지배 아래 있던 백훈 제국은 5세기 중반 에프탈 왕조에 의해 지배 세력이 대체되었고, 이 에프탈 왕조가 페르시아와 인도의 영토를 점령하면서 인도와 이란 문명에 짙은 흔적을 남겼다.

유럽으로 진출한 훈은 그들 앞에 놓인 모든 존재를 정복했다. 동유럽의 알란과 고트, 스키트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하고, 양 로마 제국을 복속시키며 유럽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이들의 대두와 서로마 제국의 해체는 새로운 유럽, 즉 ‘중세 유럽’의 시작을 알렸다. 이들은 도달하는 곳마다 복잡하고 혼종적인 내륙아시아 문화를 도입했고, 방대한 인구의 문화와 운명을 급진적으로 바꾸었다.

중국과 그리스·로마의 사서(史書)에서 묘사한 ‘미개하고 후진적인 야만인, 오랑캐 무리’와 흉노/훈은 거리가 멀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세련된 존재였고, 군사적으로 서방과 동방의 적수들을 압도했다. 이들의 정치 제도는 훗날 ‘봉건제’로 불리게 될 통치 체제로 유럽에 도입됐다. 유럽의 게르만계 족속은 흉노/훈의 계층 서열과 ‘공동통치’ 체제를 채용했다. 기병대 중심의 기동 전쟁 방식과 군사 엘리트에 스며든 기사도적 가치관 역시 훈을 위시한 내륙아시아 세력의 영향력으로 인한 것이었다.

유라시아 서쪽 가장자리는 훈 제국의 정복 이후 불가역적으로 지중해 연안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이 지중해의 패권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오늘날 ‘서구 세계’로 일컬어지는 서유럽의 독특한 정체성을 탄생시켰다. 이 새 유럽의 정치·문화적 기풍은 내륙아시아의 훈과 지중해의 그리스·로마, 게르만, 근동의 유대 기독교 전통과 문화가 복잡하게 뒤섞인 것이었다. 훈 제국은 서로마 제국을 멸하면서 서유럽 정체성의 탄생을 견인했다. 또한 훈 제국의 대두는 이후 1000년간 이어질 내륙아시아 세계 패권 독점의 시작점으로, 짤막한 막간극을 거쳐 근대 초기 서유럽 열강의 대두까지 이어졌다.

그리하여 흉노/훈 집단은 근대 세계까지 이어질 유산을 남겼고,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고대 세계의 외양을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저자는 흉노/훈을 인류사에서 세상을 바꾼 위대한 고대 문명 중 하나로 다시 평가할 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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