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의 변동 … 〈한일고금비교론〉 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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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제의 변동 … 〈한일고금비교론〉 ⑲
  •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 승인 2024.04.07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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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칼럼]

중세는 신분사회였다. 신분이 계급으로 바뀌어 근대가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신분과 계급이 겹치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가 있었다.

신분은 혈통에 따라 결정되는 사회적 구분이다. 오랫동안 명시적인 형태로 지속되었다. 계급은 획득하는 재산에 따라 생기는 경제적 격차이다. 그리 분명하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달라질 수 있다. 신분과 계급이 겹치는 이행기에는 사회ㆍ경제적 관계가 무척 복잡했다.

중세의 신분의 기본은 한국과 일본에서 같았다. 먼저 모든 사람이 良人(양인)과 賤人(천인)으로, 다음에는 良人이 貴族(귀족)과 平民(평민)으로 구분되었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貴族ㆍ平民ㆍ賤人은 세계 거의 모든 곳 중세사회에서 확인되는 보편적인 신분이고, 그 구체적인 양상은 각기 달랐다. 이에 대한 비교고찰을 위해 시야를 확대하자.

유럽 각국에서는 貴族이 武士(무사)이고, 文士(문사)는 그 보조자였으며, 平民과 賤人이 합쳐져 農奴(농노)를 이루었다. 일본은 貴族이 武士이고 文士는 그 보조자인 것이 유럽 각국과 같고, 平民과 賤人의 구분은 중국이나 한국과 같다. 중국은 貴族이 文士이고 武士는 그 보조자이다가, 그 반대인 만주족이 왕조 교체를 이룩했다. 한국에서는 줄곧 貴族이 文士이고 武士는 그 보조자였다. 貴族을 뜻하는 兩班(양반) 가운데 文班(문반)이 상위이고 武班(무반)은 하위인 위계가 武臣亂(무신란)이 일어나 잠시 무너졌다가 든든하게 회복되었다.

눌려 있던 상업이 발달해 저자에서 장사하는 市民(시민)이 힘을 얻게 되자 신분제의 개편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유럽 각국에서는 貴族과 農奴 사이에 市民이 또 하나의 신분을 이루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허용했다. 市民이 성장해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동안 다투던 貴族을 밀어내고 근대화를 이룩한 것이 거의 같았다. 동아시아 각국은 市民의 등장에 대처하는 방법이나 근대화에 이르는 과정에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에 참여해 타격을 받고, 중국에서는 淸(청)나라가, 일본에서는 德川幕府(토쿠가와바쿠후)가 등장했다. 둘 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게 하는 통치 질서 재확립을 긴요한 과업으로 삼고 신분제도를 정비했다. 시대 변화를 받아들여 市民의 등장을 인정하는 작업을 일제히 했으나, 그 방법은 아주 달랐다.

淸나라에서는 과거에 급제해 벼슬하는 능력자만 紳士(신사)라는 이름의 貴族 신분을 유지하게 하고, 그 하위 영역에서는 신분 구분을 없애 市民이 아무 제약 없이 경제활동을 하도록 했다. 그것은 현명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폐해가 심각했다. 공부가 오직 출세의 도구이게 했다.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 힘쓰는 선비는 있을 수 없게 했다.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순수학문은 있을 수 없는 나라를 만들었다.

淸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과거 제도가 철폐되자 貴族은 없어지고, 누구나 平民이 되는 하향평준화가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지적 수준의 하향평준화도 이루어졌다. 오랜 문명에 커다란 공백이 생겨, 계급투쟁이 격하되고 공산주의가 설득력을 쉽게 확보했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해, 뇌수술을 하는 지식인보다 이발하는 노동자가 더욱 자랑스럽다고 하는 주장이 공인되었다.   

일본의 德川幕府는 武士와 賤人인 사이의 平民을 둘로 갈랐다. 상공업을 하는 市民을 町人(쪼닌)이라고 일컬고, 농촌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農民(농민)과 별개의 신분이게 했다. 신분 구분을 분명하게, 신분마다의 규범을 엄정하게 했다. 武士만 칼을 차고 다니게 했다. 武士와 町人은 도시에만 살아야 하고, 농사를 지을 수 없게 했다. 이밖에도 여러 세세한 규정이 있어, 누구나 전에 살던 대로 그 자리에서 살고 변신은 생각할 수 없게 했다.

간섭하거나 침해하지 않아 町人이 상공업을 착실하게 발전시켰으나, 다음 시대로 나아가 근대화를 이룩할 동력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武士 쪽에서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明治維新을 추진해 근대화로 나아가는 길을 열면서, 신분제도는 타파하지 않고 재정비하는 역행을 보여주었다. 華族ㆍ貴族ㆍ平民ㆍ賤民의 구분을 분명하게 한 것이 그 핵심이다. 호적은 물론이고, 이력서, 지원서, 졸업장 등의 문서에도 신분을 명시하도록 했다. 이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자랑하도록 국민을 교육했다.

하급 武士, 町人, 農民 등을 통틀어 평민이라고 한 것은 신분 타파의 의지가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상급 武士는 貴族이 되어 특권을 더욱 분명하게 했다. 그 위에 華族을 두어 天皇의 혈통은 신성하다고 한 것은 중세 이전의 고대 신화 재현이다. 天皇이 신성한 만큼 賤民은 더럽다고 여겨 계속 박해하는 것은 일본이 최후진국이게 하는 자가당착의 함정이다. 

오늘날에 貴族은 사라졌어도 天皇과 賤民이라는 양극단은 그대로 있고, 신분 구분의 후유증이 사라지지 않아 일본이 침체하게 한다. 역동성을 얻지 못하게 방해한다. 학계를 보면, 제한된 분야의 전문가만 있고, 총설계자는 없다. 내가 쓰는 글이 자기 소관사를 건드렸으면 작은 티도 잘 찾아내고, 전체에 대한 총괄론은 누구의 소관사도 아니므로 하지 않으리라.

한국의 朝鮮王朝는 임진왜란의 당사자여서 처참하게 파괴되었어도 살아남았다. 행운이 불운이어서, 淸나라나 德川幕府의 등장에 상응하는 쇄신이 없었다.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사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게 市民이 등장하는 시대변화를 적절하게 받아들이는 신분제 개편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라의 무능 탓에, 어떻게 하든 돈을 모아 市民이 되면 상위 신분을 획득하는 길이 여럿 열려 있었다. 

17세기에 시작된 변화가 19세기에 이르니, 兩班이 70% 이상 되고, 賤民은 1%에 근접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분제가 저절로 무너졌다. 이것은 불운이 행운인 역전의 좋은 본보기이다.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구체적인 사례나 논의를 든다.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 2, 65-68면에서 가져온다.)

나라에서 재정을 보충하려고 功臣錄勳(공신록훈)을 판매하니, 1606년부터 1728년 사이의 구입자 가운데 兩班이 27%, 平民이 49%, 賤民이 24%였다. 賤民이 24%였다는 것이 놀랍다. 한 지방 1690년부터 1858년까지의 호적에서, 兩班은 9.2%에서 70.3%로, 平民은 53.7%에서 28.25로, 賤民은 31.1%에서 1.5%로 바뀌었다. 兩班은 70.3%, 賤民은 1.5%로 되는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졌다.

朴趾源(박지원)은 〈兩班傳〉(양반전)에서 兩班을 팔고 사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그렸다. 丁若鏞(정약용)은 “족보를 가지고 관가에 소송하러 오는 자 가운데 진짜는 열의 하나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족보 위조는 쉽게 할 수 있었다. 丁若鏞이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고, 반대가 되는 말을 했다. 주요 발언이므로 원문을 들면 “使通一國而爲兩班 即通一國而無兩班”라고 했다. “나라가 다 양반이 되게 하면, 바로 온 나라에 양반이 없게 된다”고 직역하면 재미가 없다. “다 양반이 되면, 양반이 없어진다.” 이렇게 알고 인용하자.

이것은 중국의 하향평준화와는 반대가 되는 상향평준화이다. 상향평준화로 모두 兩班이 되면, 무식꾼이 남아 있을 수 없다. 글을 배워 한시문을 지어야 가짜라는 의심을 떨친다. 급제 가능성이 없어도, 과거장 근처까지라도 가야 한다. 문집을 남기면 더욱 빛난다. 이 모든 것이 허세이고 허사라고 나무랄 필요는 없다. 지적 수준을 높이고, 교육열을 키우고, 학문을 존중하는 기풍을 조성했다. 실용이 아닌 창조를 인정하고, 그 능력을 기르도록 했다.
  
“다 양반이 되면, 양반이 없어진다”는 말이 그대로 되었다. 1894년에 甲午更張(갑오경장)을 할 때 신분제를 철폐한 것이 27년 전의 일본 明治維新과 아주 달랐다. 신분제 철폐가 甲午更張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하고 말 것은 아니다. 성문법보다 불문법이 더 큰 효력을 가졌다. 민심의 동향이 세상을 움직였다. 누구나 兩班이 되어 신분제가 없어지는 바람이 불자 賤民도 저절로 사라졌다.

일본에서는 천민 차별이 계속 심하다. 島崎藤村(시마자키도우손)이 1906년에 내놓은 《破戒》(하카이)라는 소설에서 교사가 된 청년이, 신분을 감추어야 한다고 하는 아버지의 훈계를 어기고 자기가 賤民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부당한 편견과 맞서 싸우기로 했다. 그래도 파문을 일으키기만 하고 동조자를 얻을 수는 없었다. 오늘날의 독자도 이 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기만 하고, 싸우러 나서지는 않는다. 

賤民 차별을 철폐하자는 衡平(형평) 운동이 1922년에 일본에서 일어나자 한국에서 바로 뒤따랐다. 일본의 천민 차별을 흉내 내려는 사람들이 있어, 차별 철폐 운동을 이식했으므로 둘 다 우습다고 할 것은 아니다. 일제가 일본에서처럼 모든 문서에 신분을 기재하도록 해서, 甲午更張을 무효로 돌리고 賤民을 되살리려고 한 것이 실질적인 투쟁의 대상이었다. 일제의 시도는 실패하고, 賤民은 사라져 차별도 없어졌다. 賤民 차별이 일본에서는 지속되고 한국에서는 없어진 것은 衡平 운동의 성패와 무관한 역사의 대세이다. 위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깊은 이유가 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賤民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것을 본다. 서산에서 안면도로 가는 길가에 4대째 고기 장사를 한다고 붉은 글씨로 커다랗게 써 붙인 식당이 있어 걸음을 멈추게 한다. 고기 장사는 賤民인 白丁만 할 수 있는 생업이었다. 그 기억을 되살려 요긴하게 쓴다. 

일본은 사람의 상하 등급을 분명하게 가다듬어, 차등론의 좋은 교본을 보여준다. 한국인은 누구나 당당하게 나서서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해 대등론이 어떤 경지인지 알 수 있게 한다. 선진의 질서를 후진의 무질서로 뒤집는 듯이 하면서, 선후 역전을 이룩한다. 

 

조동일 논설고문/서울대학교 명예교수·국문학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영남대학교, 한국학대학원 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서울대 명예교수이자 학술원 회원으로 계명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연변대학 명예교수이기도 하다. 주요 저서로 <서사민요연구>, <한국문학통사>(전6권), <우리 학문의 길>, <인문학문의 사명>, <소설의 사회사 비교론>(전3권), <대등한 화합: 동아시아문명의 심층>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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