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의 홍수설화
상태바
동아시아의 홍수설화
  • 이주노 전남대학교·중문학
  • 승인 2024.04.07 06: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나의 테제_ 『동아시아의 홍수설화 연구』 (이주노 지음, 전남대학교출판문화원, 444쪽, 2024.02)

 

과거의 역사는 무엇을 중심으로, 혹은 무엇에 근거하여 보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민족주의의 경향이 심화된 최근 국가 간에 지난날의 역사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첨예한 갈등이 벌어지는가 하면, 이념이 과잉된 시기에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둘러싸고 사회적 갈등을 빚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거의 역사에 대한 자국 혹은 자민족, 자파 중심적 해석의 다툼 양상을 흔히 역사전쟁이라고 일컫는다. 이러한 역사전쟁이 중국과 대만 사이에도 벌어지고 있다. 다만 이 역사전쟁은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도 않고 요란한 폭발음을 내거나 세몰이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역사전쟁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중국과 대만 사이에는 대만 원주민 문화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즉 대만에 최초로 정착하였던 원주민이 어디에서 기원하였는가를 둘러싸고 두 나라의 학계가 대치하고 있다.

중국 학계는 대만의 원주민 문화가 중국 대륙에서 기원하였으며, 대만은 남도(南島)문화의 중간역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관점에 의하면, 대만의 민진당은 탈중국의 정치적 목표를 위해 적극적으로 대만 ‘원주민’이 지니고 있는 오스트로네시안(남도어족)의 특징과 문화기호를 이용하고 있다. 즉 대만 당국이 원주민이란 의제를 이용하여 양안의 역사를 분리해 ‘중화민국 대만화’와 ‘점진적 대만독립’을 꾀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대만 학계는 남도어족의 대륙기원설을 부정하면서, 대만 원주민이 지니고 있는 말레이족 속성을 강조하여 남래설(南來說)을 주장한다. 이들은 중국의 일부가 아닌 대만의 독자성을 강조하고, 원주민 문화가 대만문화의 기점이라고 주장한다. 1949년 무렵에 대만으로 이주한 옛 중앙연구원의 학자들, 이를테면 스장루(石璋如), 둥쭤빈(董作賓), 루이이푸(芮逸夫) 등이 대체로 ‘중심과 주변’의 관점에서 대만의 원주민문화를 바라보았다면, 최근의 학자들은 기존의 중국 중심의 관점과 패러다임을 부정하고 있다. 대만의 원주민을 둘러싼 중국과 대만의 논쟁은 학술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만, 사실 이 논쟁은 대만의 독립을 둘러싼 중국과 대만의 정치적, 군사적 갈등과 대립이 학술계에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논쟁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면서 중국 측의 주장을 강화해주는 것이 바로 홍수남매혼 신화에 대한 기존의 학설이다. 기존 학설의 주창자로서 대표적인 연구자로 루이이푸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중국의 중앙연구원에서 연구하다가 훗날 대만으로 이주하여 대만대학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고고인류학 및 민족학 연구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특히 먀오족(苗族) 문화의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주지하다시피 홍수남매혼 신화는 홍수의 재난에서 살아남은 남매가 결혼하여 인류를 다시 전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루이이푸는 홍수남매혼 신화를 다룬 1938년 논문에서 이러한 유형의 이야기의 “지리분포는 대략 북쪽으로 중국 본토에서 남쪽으로 남양군도에 이르고, 서쪽으로 인도 중부로부터 동쪽으로 대만 섬에 이른다”고 밝힘과 동시에 “지리적으로 살펴보면 그 문화중심(culture center)은 중국 본토의 서남부임에 틀림없으”며, 이 이야기가 “중국의 서남부에서 기원하여 사방으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루이이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대만과 인도지나반도, 보르네오와 인도에서 채록된 수 편의 홍수남매혼 신화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거는 이 유형의 지리적 분포를 입증해줄 수 있을지라도 전파의 경로를 밝혀주기에는 턱없이 미흡하며, ‘중국 서남부 기원설’의 근거가 무엇인지 명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이푸의 주장은 이후 중국신화학계에 의해 별다른 의심 없이 보편적인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그의 주장은, 대만 원주민의 기원인 오스트로네시안은 중국 남서부에 거주하던 민족이 기원전 3000여 년 경에 대만으로 이주하였다가 동남아 도서부를 거쳐 서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퍼졌다는 학설과 결합함으로써 대만의 독자성과 독립, 대만 원주민의 남래설을 반박하는 유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

이 책이 대만 원주민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저술된 것은 물론 아니다. 이 책은 우선적으로 중국의 홍수신화, 특히 중국 소수민족의 홍수신화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와 대만, 일본,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으로 연구의 관심을 확장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홍수설화를 어느 한 지역이나 국가의 틀이 아니라, 더 넓은 시좌에서 바라보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홍수신화로서 여러 지역의 홍수남매혼 신화를 비교신화학적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었다. 이렇게 넓은 시야에서 살펴보노라면 동일한 서사구조를 갖추고 있는 홍수남매혼 신화일지라도, 지역에 따라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으로서의 모티프 혹은 에피소드가 각기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홍수 이후 대지의 안정, 불의 획득, 남매의 교구 방법 터득, 남매의 근친상간 극복 등의 모티프와 에피소드가 바로 그것인데, 이들 모티프와 에피소드 가운데 어느 것이 신화적 사유에 가까운지를 헤아려본다면 루이이푸가 주장한 ‘중국 서남부 기원설’의 타당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이 책에서는 대만과 류큐열도, 일본 본토 홍수설화의 친연성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였다. 즉 대만과 류큐열도의 홍수남매혼 신화는 남녀가 교합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에피소드, 그리고 남매가 단계적으로 이물을 출산하는 에피소드를 공통적으로 갖추고 있다. 또한 대만과 류큐열도의 홍수설화에서는 남매가 근친상간의 징벌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합 시에 무엇인가의 도구를 사용하는 에피소드를 운용하고 있으며, 홍수의 재난에서 뿌리가 강한 풀을 붙들고서 생존하는 에피소드를 운용하고 있다. 아울러 대만의 홍수신화에서는 흔히 홍수의 재난 속에서 불을 어떻게 획득하는지를 다룬 에피소드를 운용하는데, 이러한 에피소드는 필리핀의 홍수신화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또한 대만의 홍수설화 가운데에는 덮개나 돌멩이 아래에 감추어져 있던 물이 덮개나 돌멩이가 제거되는 순간 급속히 솟아나와 홍수를 이루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서태평양제도의 물 혹은 바다의 기원에 관한 신화와 매우 흡사한 신화적 사유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대만과 서태평양제도의 홍수설화 중에는 머리카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생존하는 에피소드가 똑같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 에피소드는 특정 지역에서만 운용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서태평양제도로부터 필리핀열도, 대만과 류큐열도를 거쳐 일본열도에 이르는 해양성 신화의 길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이 책은 비교신화학의 관점에서 중국과 한국, 일본의 함몰형 홍수전설을 살펴보았다. 국지적 함몰과 뒤이은 홍수의 재난을 다루는 함몰형 홍수전설은 중국의 역양형(歷陽型) 함호(陷湖) 전설과 한국의 ‘장자못 전설’, 그리고 일본의 ‘소토바(卒堵婆)에 피 묻은 이야기’ 등으로 대표된다. 이 책에서는 이들 함몰형 홍수전설의 유사형과 변이형의 양상을 정리함과 아울러, 이들 홍수전설 사이의 유사성과 차별성을 중심으로 각국의 홍수전설이 지니는 특징을 고찰하였다. 아울러 홍수의 재난에서 살아남은 인간과 동물의 교합에 의해 인류를 재전승하는 이른바 홍수인수혼 설화, 특히 그 가운데에서도 여인과 개의 교합을 다룬 설화를 살펴보았다. 여인과 개의 교합은 중국의 옛 전적에서 흔히 반호(盤瓠)전설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에서도 개를 조상으로 여기는 견조(犬祖)설화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견조설화는 중국 외에도 동남아와 대만, 류큐열도, 일본 본토에서도 두루 전승되고 있는데, 크게 보아 시조담(始祖譚)과 복수담(復讐譚)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 견조설화에는 ‘개의 피살’ 혹은 ‘아들이 아버지인 개를 죽이는 살부(殺父)’의 모티프가 운용되고 있는데, 이 모티프는 류큐열도와 일본 본토에서 ‘제3자에 의한 살해’로 약간의 변형을 보여준다. 동아시아 전역에 전승되고 있는 ‘살부’의 모티프를 지닌 견조설화는 인도의 불교설화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맺고 있으리라 본다.

 

이주노 전남대학교·중문학

전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명예교수. 서울대학교 중어중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현대문학을 전공하면서 민간전설과 신화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저서로 ≪중국의 민간전설 양축이야기≫, ≪루쉰의 광인일기, 식인과 광기≫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중화유신의 빛 양계초≫, ≪중국 고건축 기행≫, ≪색채와 중국인의 삶≫ 등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