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전쟁·다원패권 시대, 세계와 한반도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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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전쟁·다원패권 시대, 세계와 한반도의 미래는?
  • 박노자 오슬로대·한국학
  • 승인 2024.04.07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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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책을 말한다_ 『전쟁 이후의 세계: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한겨레출판, 316쪽, 2024.02)

 

국제 시사에 관심이 많고 뉴스를 열심히 보는 사람이라면 최근 몇 년간 그 누구라도 세계 상황이 본질적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무엇보다는 ‘전쟁’ 소식이 너무 자주 들린다. 우크라이나 전쟁에다 가자 전쟁, 수단 내전, 대만 해협 무력 충돌의 개연성 등에 대한 이야기를 매체에서 계속 접할 수 있다. 각종 전쟁에서의 인명 피해도 과거에 비해 훨씬 늘었다. 2023년 한 해 동안 전쟁 등 각종 무력 충돌 속에 희생된 사람들은 적어도 17만 명으로 추산된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몰자 수는 발표된 수치보다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을 가능성이 높기에, 사실 17만 명은 최소한의 추산치이고 실제적인 희생자 수는 더 클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전쟁에서 죽은 해는 냉전 종식 이후로 처음이다.

이처럼 인명 피해가 크지만, 전쟁 혹은 있을지도 모를 전쟁에 대한 준비로 인해 탈(脫)세계화 효과 역시 과거에 비해 훨씬 크다. 미국 중심의 일극(一極) 체제가 그 전성기를 구가했던 2000년대 초반에 미국이 이라크나 아프간 등을 침략하기도 했지만, 이로 인해서 국제 무역이나 해외 투자 등에서 세계화가 역전되지는 않았다. 한데, 2022년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결과로 러시아에서 외국 기업이 철수하면서 적어도 1,070억 달러가 넘는 상각(償却)과 매출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에서 현대 자동차는 큰 손해를 보면서 러시아 공장을 매각해야 했는가 하면, 러시아 칼루가(Kaluga)의 삼성 생산 법인은 2022년만 해도 공장 가동 중단 등으로 약 1,10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뿐만 아니라, 미-중 사이의 〈칩 전쟁〉도 세계화 시대에 중국과의 협업에 이미 익숙해진 한국 기업들을 크게 괴롭히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산업계로서는 무기나 포탄 등의 생산과 판매가 가장 수익성 좋은 사업이 됐다. 러시아에 대해 서방 각국과 일본, 한국이 결의, 실시한 약 2만7천 개의 경제 제재들은 전쟁 시대·탈세계화 시대의 상징처럼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여전히 서구나 일본산 반도체 등을 제3국을 통해 수입하고, 2023년에는 3.6%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기도 했다. 미국의 의지를 정면으로 거역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경제 제재 속 대량살상무기의 양산, 이 제재들이 간접·우회 무역을 통해 무력화되는 현실, 그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의 경제성장이나 방위산업의 새로운 ‘황금기’ 등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신간 『전쟁 이후의 세계: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에서 나는 ‘세계체제론’ 등에 입각해 이 탈세계화와 전란의 빈발, 혹은 ‘전쟁 경제’로의 전환 등 최근의 국제체제 변동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해보려고 했다. 더 나아가 왜 하필이면 러시아가 이 시기에 ‘전쟁 모드’로의 전환, 극우 국가주의적 통치 체제의 확립, 그리고 전쟁을 통한 정국(政局) 운영의 선두에 서게 되었는지 한 번 분석해보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취할 만한 외교 등에서의 노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봤다. 나의 주요 결론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중심의 일극 세계질서의 시기(1989~2010년대 중·후반)도 이제 끝났지만, 그것보다 더 일차적으로 194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세계체제적 패권의 시대 역시 지금 그 종말을 점차 맞이한다. 물론 이 미국 패권 상대화의 과정은 장기 지속형이다. 산업, 특히 제조업의 민수(民需) 부문에 대한 미국의 패권은 이미 존재하지 않지만, 학지(學知) 생산이나 군사 부문, 혹은 연성(軟性) 권력은 또 다르다. 그리고 미국의 패권이 점차 상대화된다고 해서 중국이 미국을 바로 대체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패권 교체기지만, 그 뒤에는 다원(多元) 패권, 즉 하나의 초강대국이 아닌 여러 열강이 패권을 나누어서 갖는 시기가 올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패권 교체를 수반하는 것이 무력을 이용하는 패권 다툼, 즉 전쟁인 만큼 패권 교체기는 동시에 전란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세계체제의 준(準)주변부, 즉 인도나 터키, 러시아 등지에서 강력한 권위주의 체제들이 확립되고, 세계체제의 핵심부인 구미권에서는 트럼프로 대표되는 우파 포퓰리즘이 판친다.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은 세계화의 전체적인 역전, 즉 탈세계화 추세와 연동돼 있다. 

둘째, 중국과 달리 러시아는 세계화 시대의 ‘패배자’였다. 푸틴 통치 시기에 러시아의 국민총생산은 약 9배 정도 늘어났지만, 기술 집약적 제조업은 점차 쇠퇴했다. 한때 여객기 등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제품을 수출까지 했던 소련의 후계 국가인 러시아가 이제 수입 여객기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러시아의 거대 재벌(가스프롬, 스베르방크 등) 역시 그 자본력이나 시장 가치에서 세계 톱 20 대기업 축에도 못 들어간다. 서방과 중국 중심의 세계 경제에 완벽하게 편입된 러시아 경제는 말 그대로 글로벌 ‘주유소’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푸틴은 패권 교체라는 ‘추세’를 타서, 서방과의 부분적인 단절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인접 국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공을 통해 자신의 종신 집권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의 전쟁 경제로의 전환을 통해 반도체 등 수입 대체 산업의 성장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푸틴이 경제성장을 나름대로 이루면서 수입 대체 산업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각종 정밀기계 등의 수입을 필요로 한다. 다원 패권의 시대가 점차 열리는 만큼 터키나 카자흐스탄 내지 중국을 통한, 서방의 제재를 우회하는 간접 수입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원 패권 시대에는 나토(북대서양 조약 기구) 회원국인 터키마저도 미국의 제재를 그대로 준수할 리가 없다. 

셋째, 패권 교체기는 앞으로 10~20년 동안 진행될 것이고, 다원 패권의 시대는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미래에 계속 지속될 수도 있다. 다원 패권 시대인 만큼 한국의 외교 역시 다원화돼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는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를 자주 거론하지만, 미국 일극 체제 시기의 유·무형의 규칙 내지 불문율들이 – 대러시아 제재 무력화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 더 이상 주효하지 않고 있다. 다원 패권 시대에는 결국 나름대로의 ‘국제 규칙’들이 만들어지겠지만, 그 규칙들이 어떤 모습일지 지금으로서 예상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일단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균형 있는 외교를 수행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것이다. 그리고 국제 전란기인 만큼 커다란 군수 공업 복합체를 가지고 있는 북한은 지금 중요한 지정학적인 행위자로 부상하고 있다. 앞으로도 북한의 ‘몸값’은 더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 이웃과의 지금과 같은 적대 관계는 한국으로서는 손해이자 위험부담이다. 그래서 균형 외교에다 더 필요한 것은 적극적인 한반도 평화 외교다. 동시에 한국의 시민사회가 침략으로 고통을 받는 우크라이나 민중이나 러시아의 반독재 운동과 보다 적극적으로 연대하는 것도 국가 아닌 시민사회 차원에서 한국의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일 수도 있다. 

세계 전란기는 쉽게 종결되지 않을 것이다. 한반도 평화에 대한 위협 역시 상당하다. 하지만 우리가 세계의 주요 트렌드를 제대로 이해하고 대비를 잘 하면 적어도 한반도 주민의 희생이라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희생 예방’, 즉 ‘평화의 공고화’야말로 한국 정부의 가장 중요한 국정과제가 돼야 한다는 것이 내가 이 책을 통해 보내고 싶었던 핵심적 메시지다.

 

박노자 오슬로대·한국학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코노프’(Владимир Тихонов)다. 모스크바대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칼럼들을 묶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으로 주목받았으며, 《당신이 몰랐던 K》 《미아로 산다는 것》 《주식회사 대한민국》 《비굴의 시대》 《전환의 시대》 등은 이 연장선상의 저작이다. 《조선 사회주의자 열전》 《거꾸로 보는 고대사》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우승열패의 신화》 등을 통해 역사 연구자로서의 작업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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